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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숲으로[16]

향토소설가 김담 연재 산문(散文)

2019년 01월 28일(월) 14:54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일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가 지나면서 시나브로 낮이 길어지고 있었다. 동짓날은 태양이 다시 위력을 되찾는 날이기도 하지만, 농경사회였던 조상들에겐 새해 농사를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했으므로 먼저 잡귀 잡신을 쫓는 벽사를 행하기도 했다. 귀신을 불러들이는 제사상에 붉은 빛깔의 고춧가루를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팥죽의 붉은 빛깔은 또 귀신을 쫓는다고 여겨졌다. 이날 새알심이 든 팥죽도 먹지만, 나이도 먹는다고 하여 동지첨치(冬至添齒)라고도 하였으나 내겐 황진이가 쓴 ‘동지(冬至)ㅅ 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란 시조로 더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동짓달 초순에 동지가 들면 애동지라 하여 팥죽을 쑤지 않고 팥떡을 먹는다고 하고, 중동지와 노동지에는 팥죽을 쑤어 먹는다고 하였으나 이 또한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우리 집 노인은 맘이 내키는 대로 팥죽을 쑤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아세(亞歲), 즉 작은설이라고 하여 옛날 관청에서는 달력을 나눠주었다고 하니, 동짓날이 양력 12월 22일 전후이므로 새해 달력을 준비하면서 새해 맞을 채비를 하는 것은 예나지금이나 어금지금해 보였다. 그렇더라도 그때 느꼈을 시간의 속도와 지금 느끼는 시간의 속도가 같지는 않을 것이었다.
매일 변주하듯 조금씩 바꾸던 산책길을 전과 다르게 확 바꾸었다. 자주 걷던 언덕길이 태양광발전소로 바뀌었고, 여전히 공사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흙을 퍼 나르는 덤프트럭들이 일으키는 흙먼지는 사막을 휩쓰는 모래폭풍을 방불했다. 그렇지 않아도 날씨가 영상과 영하를 반복하는 동안, 날이 조금 따뜻한 날은 미세먼지로 뒤덮여 큰 산이 보이지 않았다. 봄철 황사를 걱정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사철 내내 미세먼지 걱정을 달고 살아야 했다. 비도 눈도 없는 메마른 겨울이 이어지면서 새해 벽두부터 양양 지역에서는 큰불이 났고, 고성군 관내 운봉산에서도 산불이 났다.
산불은 대부분 인간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한다. 지난해 우리 동네에서는 벼락이 쳐서 산불이 나기도 했지만 자연 발화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작은 부주의가 대형 참사를 불러오는 셈인데, 산불이 나면 동. 식물이 피해를 입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생태계가 뒤바뀌는 것이니 인간에게도 이롭지는 않을 것이었다. 우리 동네 또한 크고 작은 산불이 끊이지 않았는데, 산불이 지나가고 나면 계류에 사는 가재가 보이지 않았다. 가재는 2011년에 멸종위기 야생생물 관찰종으로 지정되었다.
예전에는 흔해서 한겨울 어린 우리들이 개구리를 잡을 때 같이 잡아서 작벼리에서 화톳불을 피워 놓고 불에 구우면 갈색이었던 몸통이 새빨갛게 변했다. 집게발에 물리기도 했지만, 그쯤은 어느새 요령이 생겼으며 오도독오도독 씹을 때의 맛은 퍽 별미였다. 그 당시에는 킹크랩이니 대게니 하는 게들을 흔히 볼 수 없었으므로 우리들에게는 가재가 절지동물의 으뜸이었다. 개울에 보가 생기기 전에는 칠성장어, 은어, 연어 하물며 숭어까지 올라오곤 했으나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샘물에 살던 ‘옹고지’도 그 개체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어 이제는 ‘옹고지국’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게 생명 가진 것의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인위적인 소멸은 아쉬울 수밖에.
뱀이 꼬리를 감추듯 해가 지고 나면 바람은 산꼬대하듯 더욱 맵차졌으며 그늘이 드러내던 깊이도 볕과 함께 가뭇없이 사라졌다. 밤이면 세상이 얼어붙는 소리 때문에 잠을 설쳤으나 그믐을 향해 가는 달빛은 더욱 맑고 깨끗해졌다. 덤불 속에 웅크리고 있던 새떼들 놀리는 재미에 흠뻑 빠졌던 순간도 잠시 이마를 스치듯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말똥가리 때문에 잠깐 넋을 잃었다. 산등성이를 들어내고 만든 논길을 따라 막 고빗사위를 넘듯 언덕바지를 향해 치오르던 참이었고, 말똥가리는 산 위에서 낮게 날아 동쪽으로 내달리던 중이었다. 말똥가리는 순간 방향감각을 잃었던 게 분명했다. 집을 나선 뒤 얼마 안 되어 까치에게 쫓기던 말똥가리를 올려다보면서 마음속으로 비웃었던 게 바로 조금 전이었다.
놀란 토끼 벼랑바위 쳐다보듯 한동안 말똥가리가 날아간 곳을 바라다봤다. 말똥가리가 까치에게 꼬리가 잡힐 듯 잡힐 듯 쫓길 때 가중나무에는 또 다른 까치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가지 사이를 옮겨 다니고 있었다. 까마귀에게도 덤비고, 고양이에게도 달려드는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것처럼 나대는 까치 떼는 이미 여러 번 봐 왔지만, 맹금인 말똥가리에게 덤벼드는 것은 또 처음 봤다. 포수 집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조금 맥이 빠졌다. 새떼들은 끼리끼리 떼를 지어 다니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서로 섞여서 분주탕을 피우기도 했다. 동고비와 박새가 어울리기도 하고, 뱁새와 멧새가 서로 넘나들기도 했다. 부엉이가 깃들어 있다고 해서 딱따구리가 도망하지도 않았다.
개울에는 어디로든지 떠나지 못하고 홀로 다니는 백로 한 마리가 언제나 아슬아슬 위태로워 보였다. 간신히 얼음이 녹은 개울가에서 먹이사냥을 하는 오리들 곁에서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을라치면 내 몸이 다 추웠다. 덤불 속을 따로 날아다니는 딱새 수컷은 그곳이 덤불 속이어서 그랬는지 외려 씩씩해 보였는데 말이다. 그것 또한 인간의 눈이 불러낸 망상일 테지만, 아무쪼록 이 흙먼지와 왜바람 속에서도 한겨울을 잘 나서 따뜻한 봄을 맞이하기를 기꺼이 바랐다.
겨우겨우 문턱을 넘어서고 나면 그때는 또 방안 세상은 까맣게 잊었다. 창문 밖 바람소리에 군눈을 팔다 보면 문밖으로는 한발자국도 나설 생각이 나지 않았다. 큰 산을 오르는 것보다 어쩌면 더 힘든 일은 방문턱을 넘는 일인지도 몰랐다. 문턱을 넘어서기만 하면 그때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판판이 환호성을 질렀다. 귓불을 스치는 바람은 매워도 가슴은 탁 트였다. 마음은 황새걸음이었으나 막상 바람 때문에라도 앞으로 성큼성큼 나가지 못했다. 하필이면 그때마다 바람은 동쪽으로 불어댔다. 손이 곱아오고 볼은 시렸지만 괜찮았다. 안개가 낀 듯 틉틉하던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발걸음은 날개라도 단 듯 가볍디가벼웠다. 무엇보다 구름 한 점 없이 거칠 것 없는 짱짱한 하늘이 눈에 들었다.
발걸음은 숲 기스락, 숲정이 입새에서 멈췄지만 아쉽지 않았다. 그 골짜기로 스며들면 아지 못할 풍경이 펼쳐질 것이겠지만, 솔수펑이에서 불어오는 솔바람 소리만으로도 이미 무엇도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 가만히 솔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이, 한동안 볼 수 없었던 방울새 떼가 까맣게 날아올랐다.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들처럼 어지러웠지만 한순간이었다. 도서서 걸을 때면 먼 데 동해 수평선이 한 뼘쯤 자랐다가 어느 순간 수풀 사이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볕바른 비탈에는 금방이라도 원추리며 까치무릇들이 돋아날 듯 따스해보였다. 어디선가 버들개지 움트고, 매화가 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전히 영상과 영하를 오르내리는 기온이었으나 어쩌면 그 온도계 눈금에 홀려 엄살을 떨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발밑이 미끄러웠다. 바깥일을 하지 않았으나 손과 발가락에 팥알 같은 붉은 점들이 생겼다. 얼음이 박힌 것이었다. 반드럽게 얼음이 언 징검다리를 건너 학교를 다니던 시절, 발가락에 박혔던 얼음들은 날씨가 되우 추워지면 잊지도 않고 슬그머니 돌아와 자리를 잡았다. 바람이 따뜻해지고, 강에 패름이 일어 얼었던 강물이 풀리면 내 손과 발가락 얼음들도 녹아 사라질 것이었지만 무엇을 기다리느라고 시간을 탕진할 것이 아니라 한동안 그렇게 같이 살아도 괜찮을 듯했다. 왜바람이 등을 떠밀었다.
발이 뜸하던 노랑 얼룩, 검은 얼룩 고양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양이들 먹이로 논둑 한편에 놓아두었던 딱딱한 황태대가리는 그냥 있고, 마닐마닐한 양미리만 없어졌다. 짱짱하게 맑던 날이 다시 또 잠포록해졌다. 어딘가에 눈 내리고, 바람이 불고 있을 것이었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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