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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숲으로 [20]

향토소설가 김담 연재 산문(散文)

2019년 04월 02일(화) 10:51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노루를 보았다. 해는 막 이울어 숲정이에 저녁거미가 내리고 있었으며 이웃마을 굴뚝에서는 저녁연기가 가물거리고 있었다. 엉덩이에 생긴 둥그렇고 하얀 얼룩점은 노루궁뎅이버섯을 빼닮았고 울음소리는 사납고 꺽셌다. 그곳은 산 기스락을 따라 내가 흐르고 있었고, 내를 사이에 두고 논들이 펼쳐졌으며 민가는 없었다. 저녁 산책에 나서면 산으로 올라서지 않으면 길은 끊겨 그쯤에서 돌아서야 하는 막다른 거기엔 매화나무가 한 그루 있어 이제나저제나 꽃은 언제쯤 피려나 들여다보곤 하는 곳으로 멀리 노인산도 올려다보고 가까운 복가산도 둘러보면서 잠시 한눈을 파는 곳이었다.
갈대숲으로 변한 냇가 작벼리에는 이따금 고라니들이 출몰했으나 고라니는 사철 내내 흔히 볼 수 있었으므로 걸음을 멈추어서 뛰어가는 방향을 가늠할 뿐 오래 지켜보지는 않았다. 그렇게 흔히 볼 수 있는 고라니와 달리 마을에서 노루를 보는 일은 드물었다. 어느 해 한겨울 폭설이 내려 사방천지 길이 막혔을 때 노루들이 산 아래 골짜기로 몰려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뒤 한동안 소식이 감감했던 노루였다. 걸음을 멈추었다. 노루도 머춤하더니 빤히 나를 내려다보다 기어이 몸을 돌려 산 위로 뛰어올랐으나 곧 다시 멈추었다. 엉덩이 얼룩점이 하도 크고 환해서 손을 내뻗으면 금방이라도 손안에 들어올 듯했지만 노루는 내 사정 따위는 아랑곳없었다.
이따금 옛날이야기를 하던 아버지는 산짐승 이야기가 나올라치면 새끼 노루를 기르던 때를 회상하곤 했다. 장사니라고도 불리는 새끼 노루를 집에서 길렀고, 이 새끼 노루가 얼마 못 가 죽었는데 아버지 결론은 아마도 사람이 먹는 음식 그러니까 ‘간이 된 반찬’을 먹여서 그리된 것이라고 여겼다. 아버지가 한창 농사를 짓던 젊은 시절 우리집에는 온갖 집짐승들이 있었고, 늘그막에는 청둥오리까지 길렀으니 아버지가 새끼 노루를 기르려고 애썼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을 것이었고, 죽음의 원인을 사람이 먹는 밥반찬 때문이었다고 짚은 것도 일리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노루 고기를 먹으면 ‘재수가 없다’는 민간의 금기까지 전해주었고, 나 또한 유전처럼 노루 고기를 먹으면 재수가 없을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금기의 이면에는 여러 맥락이 있을 테지만 먼저 노루의 여러 가지 쓰임을 생각해 보면 그 일면을 어림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사슴과 동물인 노루는 어른 노루와 새끼 노루, 암컷과 수컷을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었으나 한자를 살펴보면 노루와 사슴, 고라니를 섞어 쓰는 까닭에 어느 것을 가리키는지 쉽게 알 수 없었다. 사슴은 물론 노루와 고라니는 모두 같은 사슴과 동물이다. 남한에선 일제강점기에 야생 사슴은 멸종했으며 지금 사슴농장에서 기르는 사슴들은 수입종이라고 알려졌다.
국수 이야기를 할 때면 흔히 인용되곤 하는 평북 정주 출신인 시인 백석(白石)이 남긴 유일한 시집 제목이 다름 아닌 『사슴』이고, 그가 쓴 시 가운데 노루라는 시가 두어 편 보이는데 『사슴』에 실린 ‘노루’ 전문은 두 줄로 ‘山곬에서는 집터를츠고 달궤를닦고/ 보름달아레서 노루고기를먹었다’ 이고, 잡지 조광에 실린 ‘함주시초 - 노루’ 편은 산골 사람이 새끼 노루를 팔러 왔는데, 새끼 노루가 당콩순을 다 먹었다고 즉 강낭콩 싹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값으로 서른 닷 냥을 부르고, 산골 사람을 닮은 새끼 노루는 산골 사람의 손을 핥으며 가랑가랑한 눈으로 흥정소리를 듣는다고 하는 내용이다. 시집 『사슴』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발행되었고, 함주시초-노루 편은 1937년 조광에 실렸다.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놀기’가 어쩌고 하시는데 맥락으로는 노루나 고라니 같은데 정확하게 놀기가 어떤 동물인지 몰랐으므로 그제야 여쭈니 “그 왜 있잖아?” “노루요?” “아니 그 왜 콩 이파리 뜯어 먹는?” “아, 고라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러니까 어른들께는 노루가 고라니요, 고라니가 곧 노루로 그놈이 그놈이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놀기는 평안도, 함경도 방언이었다. 그런데 고라니는 콩밭은 귀신같이 찾아서 예초기로 벤 듯 결딴냈지만, 들깻잎은 또 입도 대지 않았다. 왜 들깻잎은 먹지 않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겨울잠을 자는 동물의 세계』를 쓴 리자 바르네케가 한 말을 가만히 떠올릴 뿐이었다.
복작노루라고도 불리는 고라니는 송곳니는 있으나 뿔은 없는 반면 노루는 뿔도 있고 엉덩이에 흰 얼룩점도 있어서 고라니와 구별되었다. 무엇보다 논밭에 흔히 등장하는 동물은 고라니가 단연 으뜸으로 농사짓는 어른들에게는 말 그대로 원수였다. 논밭 작물을 망가뜨리기 때문이었다. 멧돼지가 옥수수 밭과 고구마 밭을 파헤치는 것처럼 고라니는 콩밭은 물론이거니와 하물며 당파까지 결딴내서 원성을 샀다. 들깻잎만 빼면 밭에 심는 작물 이파리는 다 먹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농가에서는 전기울타리까지 동원했지만 쉽지 않았다. 여름에 새끼를 낳는 고라니에겐 생사를 다투는 일일 것이었고, 노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었다.
『삼국사기』는 물론 ‘조선시대 선비들이 기록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눈에 비친 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모은 책 『조선동물기』에도 사슴과 고라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봉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과 이유원이 쓴 『임하필기』로 한라산에 산다는 흰 사슴과 고라니 고기와 고라니 가죽으로 만든 궤자 신발에 대한 이야기인데 고라니 고기는 맛이 아주 좋고, 고라니 가죽으로 만든 신은 질겨서 가짜 가죽신이 나오기도 했다는 얘기다. 리처드 포티가 쓴 『나무에서 숲을 보다』에는 중세 영국에서는 사슴 사냥터와 왕실림은 왕실과 귀족의 상징이었다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사슴과 동물은 동. 서양을 막론하고 인간과 매우 가까운 동물이었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노루는 속담은 말할 것도 없고 꽤 많은 속설들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보다 옛날이 노루 개체수가 더 많았던 것은 아닐까 싶으면서도 노루와 고라니, 사슴을 아울러 쓰는 관습에 따라 고라니에 대한 특별한 속설은 없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멧돼지를 사냥하던 시절에도 노루를 사냥했다는 소식은 없었다. 노루 뼈를 약재로 썼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고기를 먹었다는 얘기는 못 들었으나 문헌에는 노루 뿔과 피는 물론 고기가 맛이 좋아 육포로도 만들었다고 하니 어떤 맛일지 몹시 궁금했다. 그렇지만 노루를 식용으로 사육한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어느 사냥꾼이 말했다. 멧돼지는 볕바른 곳을 좋아하는 반면 노루는 그늘진 곳을 좋아한다고. 볕이 좋았던 어느 해 봄날 진달래 꽃잎을 따러 앞산에 들어갔다가 진달래나무 그늘에 검정 콩 같은 새까만 똥 무덤을 보았다. 어느 동물 똥인지 궁금해 했더니 폭설로 인해 눈이 적은 떨기나무 그늘로 옮겨서 지낸 노루 똥이라고 일러주었다. 고라니 발자국과 멧돼지 발자국은 쉬이 구별을 하면서도 고라니 똥과 노루 똥은 쉽게 구별하지 못했다. 최태영과 최현명이 쓴 『야생동물 흔적 도감』을 보면 고라니 똥은 살짝 찌그러졌고, 노루 똥은 총알 같다고 했지만, 토끼 똥과 너구리 똥처럼 확연하게 다르지 않았으므로.
산 위 비탈로 내뛰던 노루는 한순간 우뚝 멈추더니 이번에는 듣그럽게 울기 시작했다. 음울하고 불길한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온몸으로 우는 울음소리는 몹시 고통스럽게 들리면서도 한편 매우 이상스럽게 여겨질 정도 그 목소리가 탁하고 거칠었다. 방금 눈앞에서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크게 다쳐 우는 것이라고 여길 만했다. 어찌 들으면 애 끊는 듯도 또 어찌 들으면 뜻 없이 공허한 듯도 해서 그 울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도와주고 싶은 게 아니라 어서 쫓아버리고 싶어진다. 가느다란 다리로 잘도 달리면서 그러면서 또 잘 놀라기도 하는 노루의 전략일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인간과 동물이 접점을 찾지 못하는 내내 마을과 숲정이 사이를 오가는 산들에 사는 짐승들에게 인간은 내리 포식자이며 사냥꾼이었는지도.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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