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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숲으로 [32]

향토소설가 김담 연재 산문(散文)

2019년 11월 14일(목) 10:38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숲이 흔들렸다. 멧토끼가 뛰어오른 뒤 이명처럼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키 작은 수풀은 이제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버섯을 찾던 눈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크고 작은 등성이와 골짜기를 넘어서 마지막 등을 넘으면 이제 내리막길이었고, 계류를 하나 건너면 마을로 들어서는 숲 입새에 다다를 수 있었으므로 무방비 상태에서 막 등성이에 올라서던 참이었다. 이따금 그곳에 앉아서 먼산주름을 바라다보기도 하고 눈앞에 구절초를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다리쉼을 하던 곳이었으므로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한 발을 내딛었을 뿐이었다.
멧토끼를 만난 것은 하도 오랜만이어서 환영을 본 것인가 잠시 의심했지만, 눈앞의 멧토끼는 걸음을 멈추고 두 귀를 쫑긋거리며 잠시 두리번거리다 그예 꽁지가 빠져라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순간 암전이 된 것처럼 눈을 감았다 떴다. 숲에서 산짐승과 맞닥뜨리거나 먼발치서 눈에 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으나 실제는 그러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곳은 바람맞이 산등성이어서 키 큰 나무가 적었고, 어쩌다 한두 그루 서 있는 나무들도 낡삭은 묏등 주변에만 있는, 거친 산버덩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내리쬐는 볕을 피해 고묵었으나 키가 작은 소나무 그늘을 찾아들어 배낭을 벗어놓고 잠시 숨을 골랐다.
한겨울 눈이 내려 쌓이면 작은오빠는 동네 친구들과 토끼사냥에 나섰다. 작대기를 하나씩 들고서 패를 나눠 산 위와 아래를 훑으면서 나무 그늘에 숨었던 토끼를 발견하여 튀기면 그때부터 멧토끼와 인간들 싸움이 시작되었다. 멧토끼는 길고 튼튼한 뒷다리 힘을 받아서 오르막에서는 날쌔지만, 내리막에서는 또 짧은 앞다리가 영 힘을 못 쓰는 까닭에 몰이꾼들은 갖은 꾀를 써서 멧토끼를 산 아래로 내리몰려고 했지만, 멧토끼라고 저 죽을 구멍이 그곳인데 그리 녹록하게 산 아래로 도망할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지금보다 멧토끼가 많았고, 어찌되었든 사냥에 나서면 한두 마리는 잡았다.
멧토끼 털가죽은 귀마개 등을 만들 수 있는 요긴한 재료였으므로 사냥한 멧토끼를 손질할 때 털가죽을 망치지 않도록 한쪽에 칼집을 낸 뒤 대롱으로 바람을 불어 넣어 가죽을 벗겼다. 그렇지만 이제 마을에서는 누구도 사냥을 하지 않았다.
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송이도 보았고, 능이도 만났으며 싸리버섯도 두어 개 그리고 흔히 잡버섯이라고 하는 갓이 냉면 대접처럼 둥글넓적하게 생긴 접시껄껄이그물버섯도 여러 개 만났다. 접시껄껄이그물버섯은 버섯들 가운데 단연 우뚝 커서 어디서든 눈에 잘 띄었지만, 마을에서는 누구도 식용하지 않았다. 갓은 거북 등딱지처럼 갈라지고, 색깔도 짙은 갈색과 노란색이 어우러져 보기도 좋았지만 그래서 역으로 독버섯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이 버섯은 먹을 수 있는 버섯이었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누구도 이 버섯을 식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습관처럼 지난해 오갔던 골짜기와 등성이를 찾아다녔지만 이미 앞선 발자국을 보았던 터라 알지 못할 허탈감으로 다리에 힘이 빠졌다. 그것은 버섯 양과는 크게 상관없었다. 그저 다른 이들 뒷거둠을 하는 듯한 기분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버섯이 하나든 두 개든 오롯이 처음 만날 때의 그 황홀을 다른 이와 나누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지만, 때때로 내 욕망을 무지르듯 선명한 흔적이 나를 맞곤 했다.
물매가 가파른 비탈을 미끄러지듯 내려오다 내 팔뚝보다 굵은 다래나무를 만났다. 혹시나 하고 멧돼지들이 먹고 남은 다래라도 있을까 하였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늘 아래 축축한 습지엔 논삶이한 어지러운 멧돼지들의 발자국은 확인할 수 있었다. 솔수펑이에는 멧돼지들이 솔검불을 파헤치고 떠들어 놓은 흔적이 흔했지만 멧돼지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으며 멧돼지와는 흔적으로 만나는 일이 더 잦았다. 이를테면 골짜기 습지에서 목욕을 하며 남긴 발자국과 나무줄기를 비비면서 벗겨진 나무껍질들이 멧돼지가 지나간 자취였다.
올해는 산 기스락에 있는 우리 집 밤나무 밭에서 밤을 거의 수확하지 못했다. 아람이 내린 뒤부터 밤마다 멧돼지들이 내려와 아람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처럼 알뜰하게 껍데기를 까먹는 것이 아니고 껍데기째 대강 씹어서 뱉어놓았으므로 멧돼지 소행인 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큰 산, 건봉산에 철책을 친 뒤 멧돼지가 큰 산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마을로 내려왔다. 물론 전에도 마을로 내려오는 일이 있었으나 올해 같지는 않았다. 우리 집 밤나무 밭을 결딴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고, 산 기스락에 논들이 있는 이웃집은 논둑에 텐트를 치고 밤을 새면서 멧돼지를 쫓아야 했다.
멧돼지들은 큰 산, 건봉산으로 가는 길을 아예 잃어버렸다. 우리 마을 학봉산과 건봉산은 송강 저수지를 사이에 두었으나 건봉산 기스락, 군부대부터 건봉사 입구까지 철책을 치기 전에는 멧돼지들이 자유롭게 산과 산을 넘나들었다. 그러나 철책이 생긴 뒤로는 앞산 학봉산을 오가는 멧돼지들이 마을을 경유하지 않으면 건봉산을 넘나들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서 마을로 내려오는 멧돼지는 점점 더 불어나고 있었고, 그에 따라 농민들 아우성도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그야말로 멧돼지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고 말았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울타리를 쳤고, 또 그 울타리 때문에 피해를 당하는 것인데도 욕감탱이가 되는 것은 애먼 멧돼지들이었다.
아프리카 돼지열병으로 민통선, 접경지역이 떠들썩했다. 도청과 군청에서 멧돼지 포획, 사살 작전을 실시할 예정이라는 안내 문자 메시지가 연일 들어오더니, 우리 마을에도 멧돼지 소탕을 위해 큰 산 출입을 금한다는 당부 방송이 있었다. 산책길에서 만난 마을 이장은 실탄을 장전한 총을 든 사냥꾼들이 올 것이라고, 거듭 주의를 주었다. 멧돼지는 헤엄도 잘 치고, 내 키만 한 울타리도 거뜬하게 뛰어넘고, 울타리 밑으로도 파고들 정도로 영리하고 무엇보다 발이 빨랐다. 산은 협곡과 암벽, 높은 고바우으로 이루어졌으며 지금은 예전과 같은, 항일 의병 최전선에 섰던 사시사철 사냥이 업인 포수가 사라진 지 오래인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을에 소를 기르는 축사는 여러 곳이 있었지만 돼지를 기르는 축사는 없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멧/돼지는 백신도 없는 아프리카 돼지열병으로 떼죽임을 당하고, 잊을만하면 소는 구제역으로 닭은 또 조류독감으로 살처분되곤 했다. 전염병이 돌때마다 속수무책으로 생매장을 당해야 하는 가축은 과연 인간에게 무엇일까.
멧토끼를 만난 뒤 괜히 마음이 들썽거려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산마루를 향해 올라갔다. 정오는 멀었고, 날씨는 맑았다. 솎아베기를 한 숲정이를 넘나드는 일은 힘들었지만, 이따금 고묵은 소나무, 거북이 등딱지 같은 솔보굿을 만나면 가만히 솔바람 소리에 귀를 맡기고서 나무 아래 섰다. 솔바람 소리에는 전생도, 이생도 건넌 알지 못할 깊은 심연이 있을 법도 했지만, 그저 가을에 들을 법한 첼로나 바순 음색쯤으로 여겨 들썽대던 마음 한 자락 소나무 우듬지에 걸어 놓고서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계류를 건너다 만난 쑥부쟁이와 꽃향유 떼판에 날아드는 벌떼와 나비떼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버섯은 까맣게 잊고 말았다.
솎아베기를 한 숲 입새, 내 송이밭이라고 짐짓 이름 지었던 소나무를 찾았다. 두 그루 소나무가 나란히 서 있었고, 그 주변에 자전거 바퀴처럼 둥글게 송이가 돋던 곳이었는데, 나무 한 그루가 그만 싹둑 잘려 넘어져 있었다. 불쑥 뼛성이 났다. 소나무를 벤 이들이야 그곳이 송이가 나는지 몰랐을 테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송이밭을 잃은 셈이 되었다. 송이는 살아 있는 소나무 주변에서는 돋았으므로. 화를 가라앉히고 이리저리 주변을 살폈지만 헛일이었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도 없었다. 그곳은 숲 입새였고, 또 송이가 날만한 곳이라고 여기기에는 매우 엉성한 곳이었다.
그런데, 며칠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곳은 내 송이밭이 아니었다. 아무리 들추고 떠들어 봐도 숲은 영영 알 수 없는 미지였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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