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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숲으로 [25]

향토소설가 김담 연재 산문(散文)

2019년 07월 03일(수) 09:01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외진 곳 길섶에 서서 오디를 딴다. 손바닥이 시퍼레지고 끈적거려도 가지를 잡아 늘어뜨려서는 한편으로는 벌레를 쫓아내면서 또 한편으로는 농익은 열매를 찾아 이리저리 가지를 훑어보면서 한 줌이 될 때까지 모아서 한입에 털어 넣는다. 뭐랄까, 마치 귀한 무엇을 먹는 듯, 아껴 먹으려는 생각을 앞질러 입을 움직여서는 열매 맛을 느낄 새도 없이 삼키고선 또다시 까치발을 하고서 나뭇가지를 당기어 휘어잡고서는 한 알 한 알 정성스레 따서 손바닥에 모은 뒤 또다시 단숨에 넣고 후물거리고서는 익지 않은 열매를 아쉬운 듯 올려다본다.
앵두도 따서 먹는다. 한 줌이거나 한두 알이거나 한입에 털어 넣고 우물우물 단맛과 신맛 등이 뇌 속을 관통하는 동안 발걸음은 이미 나무들을 등지고 저만치 앞서 나간다. 이웃집 앵두는 논두렁에 있어 제초제 걱정을 하면서도 맛을 안 볼 수 없어 기꺼이 두어 알 따서는 맛을 보지만 아직은 덜 익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덜 익은 것을 몰랐던 것은 또 아니면서도 끝내 열매를 따서 맛을 보고서는 퇴, 퇴 인상을 째푸리는 것이다. 농익은 앵두 빛깔은 먈가면서도 환해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데도 굳이 덜 익은 열매를 딴다. 씨앗을 뱉어내는 재미를 포기하지 못해서이다.
꽃이 핀 채로 자라면서 모양이 바뀌는 노랑제비꽃은 말할 것도 없고 고깔제비꽃과 남산제비꽃들을 찾아 앞산을 헤덤벼치던 때가 엊그제인데, 논들은 벌써 모내기를 끝냈다. 노루귀도 꽃은 지고 이파리만 뒤로 돋아서 꽃만 알고 잎은 모르는 이가 보면 그저 이름 모르는 풀에 지나지 않을 만큼 눈 깜짝할 새 환영처럼 계절이 지나갔다. 어쩌면 이제는 봄날이 무르익었다고 말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봄과 여름이 뒤섞이면서 예전과 다르게 오뉴월에 피던 꽃들이 사월에도 피고 오월에도 피었으니 철을 이야기하고 때를 들먹거리는 일이 점점 고루해지고 있는 듯했다.
그렇더라도 복사꽃이 피면 황어가 돌아오듯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감각은 여전히 유효했으므로 요강나물 검은 꽃을 찾아가고, 삼지구엽초의 돛처럼 생긴 연노란 빛깔의 꽃을 찾아서 숲정이를 이리저리 덤벼쳤다. 오월에 피던 꽃들이었으나 이제는 사월에 죄다 피었으므로 걸음이 바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숲 기스락에서 피고 지던 요강나물은 간 곳이 없었다. 요강나물은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며 천여 미터 높이의 고지대에서 자라는 것으로 알려진 한반도 고유종이다. 종 모양의 꽃은 마치 보풀이 인 융 같은 털이 있으며 꽃 빛깔 또한 흔하지 않은 검은 색으로 여러 포기가 이웃해서 떼판을 이루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없던 길이 숲 기스락에 생긴 까닭은 숲 깊숙한 안쪽에 태양광발전소를 건설하려고 길을 냈기 때문이었다. 마을 숲정이에 태양광발전소가 생기면서 그곳에 깃들었던 삼지구엽초, 천마 를 비롯 나무와 그리고 짐승들은 이미 사라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곳에 태양광발전소를 지으려고 터닦기를 하고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숲정이가 태양광발전소로 바뀌면서 도롯가에는 높디높은 전봇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정치가 세상을 바꾼다고 치면 정치는 또 사람의 일일 텐데, 숲이 사라진 세상은 사람이 살만한 세상일까.
아쉬움 끝에 누구도 찾지 않는 외진 곳에서 겨우 한 포기 요강나물을 찾아냈다. 고비와 참나물, 더덕들 사이에서 핀 요강나물은 막 꽃봉오리가 열리기 직전이었다. 마을 숲정이 여러 골짜기 가운데서도 유독 그곳에서만 피고 지는 꽃이었으므로 아쉬움이 없을 수 없었다. 모든 동식물이 생멸을 반복한다고 하더라도, 자연스레 소멸한다고 하더라도 내 생에서 사람의 손길에 의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해야 하는 일은 슬프지 않을 수 없다. 커트 월리스 존슨이 쓴 『깃털 도둑』을 읽다 보면 인간의 탐욕과 욕망이 어떻게 자연을 파괴하고, 세상을 일그러뜨리는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4.27 판문점 선언과 9.19 평양 공동 선언 이후 비무장지대는 더욱더 들썩거린다. 아니 이곳 고성은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1998년 이전부터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될 때마다 땅값이 뛰어오르기를 반복했다. 비무장이어야 했지만 중무장지대가 된 비무장지대 즉 DMZ가 있고, 그 한 가운데 군사분계선이자 휴전선이 지난다. 군사분계선 바깥 2km 지점을 남방한계선이라고 부르며 그 아래 지역을 민간인 출입 통제 구역 그리고 접경지역으로 나눠 민간인들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나 휴전 이후 칠십 여년 가까이 주민 생활 편의라는 명목으로 민통선이 남방한계선에 가깝도록 그 폭이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생태와 평화는 공존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오월이 되어야 돌아오던 뻐꾸기와 꾀꼬리와 같은 여름새들이 사월에 벌써 귀환했다. 밤이면 귀신새라고도 불리는 호랑지빠귀와 소쩍새가 서로를 호명하듯 울었다. 봄이 짧아지면서 여름새들이 일찍 도착했다. 음력 삼월 삼짇날 돌아온다고 하던 제비 또한 양력 삼월에 이미 등장했다. 기후가 바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른봄에 잡히는 청어가 초여름에도 잡히고, 오월이면 어판장에 등장하던 꽁치는 또 볼 수가 없으며 제주도에 잡히던 방어가 이제는 동해안 주요 어종이 되면서 이를 기회로 강원도 고성에서는 방어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아버지가 어부였던 이웃마을 여든이 넘으신 어르신은 청어가 난다고 알려드렸더니 어릴 적 드셨던 ‘소청어’와 ‘늘청어’ 얘기를 하신다. 회로는 늘청어만한 것이 없는데, 지금은 볼 수가 없다고, 고등어회는 회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그러면서 요즘 자반고등어와 젊은 시절 드셨던 자반고등어 차이도 말씀을 하시는데, 자반고등어를 지금처럼 금방 절여서 먹는 것이 아니라 고등어를 소금으로 ‘대를 질러서’(소금과 고등어를 일대일로) 해를 넘긴 다음, 한여름에 호박을 넣고 지지면 지금과 같은 고등어 비린내 없이 먹을 수 있다고. 큼지막한 방어 또한 소금으로 대를 질러 두었다가 쪄서 먹으면 짭짤한 감칠맛이 도는데 그만한 맛이 없었다고.
오징어와 명태로 대표되던 동해안에 명태는 그만두고 이제는 오징어조차 흔히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후 변화로만 에끼기에는 어딘지 아쉬운 구석이 있다. 지난봄에도 어른 가운데손가락만한 오징어가 어시장에 나왔다. 물론 먹는 사람 입장에서는 통째로 삶아서 한입에 넣을 수 있으니 좋을 테지만, 새끼 아닌가. 새끼는 알을 낳지 못하니 키워서 잡아먹는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그 옛날 명태와 노가리를 굳이 구분해서 노가리는 명태 새끼가 아니라고 면죄부를 주어 남획을 부추겼다. 그 뒤로 어획량이 제로에 이르렀고, 그제야 부랴사랴 명태 살리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어른들은 채 익지 않은 개/돌복숭아 열매를 딴다. 발효액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그런데 열매는 다 익어야만 열매로서 역할을 할 텐데, 미처 익지 않은 열매로 담근 발효액이 제 기능을 할지 자못 궁금하다. 마을 밖 사람들도 자동차를 타고 마을에 들어와서 눈에 띄는 대로 가지를 훑듯 열매를 땄다. 매스미디어에서 무엇이 좋다고 언급되는 순간 언급된 식물은 그때부터 수난이 시작되었다. 칡이 번성하는 걸 보면서 칡이 어디어디에 특효라고 하면 들판이든 숲 기스락이든 칡들이 순식간에 사라질 텐데, 잠시 딴 생각을 했다.
한 치 앞이 어둠이라는 속담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 미래를 저당 잡히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래는 그만두고 내일조차 염두에 없는, 하루만 살고 말 것처럼 서둘러서 가진 것을 탕진하고 있다. 나만, 내 가족만, 우리 식구만 괜찮다고 해서 세상이 망가져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오랜 봄가물 끝에 비가 내린 뒤 논두렁 앵두 열매는 새빨갛게 영글어 맛이 들었고, 외진 곳 길섶에 뽕나무 오디는 거진 반 다 따먹고서는 얼마 남지 않았다. 길가에 벚나무 열매인 버찌 또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닥다닥했다. 봄가물이 길어지면서 초여름에 익어가는 열매들은 맛이 달고 깊었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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