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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의 성 [16]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16] / 삽화 윤광자 화가

2020년 10월 08일(목) 09:08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홀 부인은 1897년 11월 10일 또다시 조선으로 왔다. 첫 번째는 처녀의 몸으로 선교사의 부르심을 받고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이 땅을 밟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남편도 없는 조선 땅을 찾아온 것이다.
셔우드의 네 번째 생일이었다. 자기가 태어난 날에 자신이 태어난 땅을 다시 찾아온 셔우드, 그러나 지금은 그를 반겨줄 사랑하는 아빠도 없었다.
제물포에 도착하였는데 먼 여정이 힘들었는지 셔우드와 에디스가 기침을 하며 열이 높더니 백일해에 걸렸다. 동행한 분들은 마중 나온 분들과 서울로 먼저 가고 홀 부인은 제물포에서 머무르며 두 아이를 치료하였다.
에디스의 병세는 폐렴이 되었다. 바람이 심한 항구여서인지 아이들은 제물포를 경유할 때마다 열병을 알았다. 아픈 마음을 진정시키며 치료와 간호에 최선을 다했더니 열흘 정도 지나자 두 아이의 병세가 회복되었다. 서둘러 배를 구해 타고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올라갔다.
감리교 해외 여성 선교회는 홀 부인을 전에 진료하던 보구여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여성 병원, 현 이대부속병원의 전신 )에서 일하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두 아이와 함께 해외 여성 선교회의 독신 여성 숙소에 기숙할 수 있도록 특별한 배려를 받았다.
홀 부인은 가마를 구하여 타고 숙소를 향했다. 예전에 일하던 곳이라 낯설지 않아 다행이었다. 궁궐 앞을 지날 때 명주로 싼 등불이 늘어서 있었다. 왕비가 돌아가셔서 상을 알리는 등불이고 장례식은 다음날이라고 한다.
1890년 로제타가 처음 조선에 도착한 날도 왕비의 장례가 있어 똑같은 등불이 줄을 서서 매달려 있었다. 그때는 대비 조 씨의 상이었고 7년 후의 지금은 시체도 찾지 못한 명성왕후의 장례를 치르는 등불이었다.

신정왕후 조 대비는 이 희(고종황제)를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으로 세우고 이 희의 아버지에게 ‘대원군’이라는 칭호를 주어 나라 정치를 섭정하게 한 장본인이다. 섭정이 시작되자 시아버지 대원군과 며느리 명성왕후 사이에는 계속해 권력 쟁탈전이 있었다. 이 싸움은 1895년 10월 8일 며느리 명성왕후가 일본의 살인 청부업자들에게 무참히 살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살인자들을 명성왕후의 시체를 불태웠다. 어떻게 죽였는지 그 증거를 없애기 위한 짓이었다. 일본인들은 명성왕후를 격하시키기 위해 나쁜 소문을 내고 거짓 칙령을 왕이 내린 것처럼 조작하여 소문을 퍼뜨렸다.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 당시 서울 주재 일본의 고급 관리 ‘미우라 고로’가 대원군과 결탁하여 꾸민 사건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대원군은 명성왕후에 당한 수모를 앙갚음하려 했고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려는 목적에 명성왕후가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왕은 생명에 위협을 느껴 한동안 궁중에서 주는 음식은 모두 거절하고 선교사들의 집에서 준비한 음식만 먹었다. 왕과 세자는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열흘 정도를 지냈다. 일본이 국정을 장악하려 했는데 왕이 옥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국정은 아직 왕의 손에 있었다.
조선을 차지하려고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외세의 강압에 고종은 결단을 내렸다. 1897년 10월 17일, 조선은 ‘대한 제국’으로 나라의 공식 명칭이 바뀌었다. 국왕의 칭호는 황제로 불리었고 민비는 명성왕후로 추서되었다. 조선의 관습으로 왕비가 죽으면 백일이 지나야 국장이 있고 그 후 3년간은 전국이 상중에 있게 된다. 그러나 명성왕후의 시체를 찾을 수도 없었고 정치적인 격동 때문에 장례식이 연기되었다가 1897년 11월 21일에 비로소 거행된 것이었다.

이 장례식을 보면서 자신이 다시 조선 땅에 온 것과 남편 닥터 홀의 죽음이 더욱 뚜렷하게 회상되었다. 셔우드와 에디스는 병세가 좋아져서 별로 기침을 하지 않게 되었다. 홀 부인은 아이들과 함께 가마를 타고 양화진으로 남편 산소를 찾아갔다. 남편이 이곳에 묻힌 지 꼭 3년이 되는 날이었다.
남편의 장례식이 있던 그날을 회상하며 홀 부인은 언덕에 앉아서 흘러가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셔우드와 에디스는 엄마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잔디밭을 뛰어다니며 곱게 물든 나뭇잎을 주워서 하늘로 날리며 즐거워하였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돌아왔다. 담장 너머로 복숭아, 살구, 앵두꽃이 만발하고 산에는 분홍빛 진달래가 활짝 피었다. 북쪽 지방으로 가기에 좋은 계절이다.
홀 부인은 남편이 일하던 평양으로 가겠다고 희망하였고 오랫동안 갈망해온 평양 의료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서울의 일을 정리하고 출발하여 1898년 5월 1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가족들이 기거할 집을 돌아보았다. 조금만 손질하면 될 정도로 집은 아담하고 깨끗하였다. 집이 수리될 때 까지 노블 선교사 댁에서 함께 있기로 하였다. 에디스는 마당가에 핀 하얀 민들레꽃을 한줌 꺾어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셔우드는 그런 에디스를 따라다니며 즐거워하였다. 홀 부인은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듯 편안한 행복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행복은 잠깐이었다. 위생 상태가 좋지 않은 곳을 여행하여 적응력이 약해져서 세 식구 모두 이질에 걸렸다. 어린 에디스가 증상이 가장 심했다. 3주일이 지나도록 에디스는 설사와 구토를 하고 열이 40도가 넘었다. 좋은 치료 약은 다 쓰고 극약처방까지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홀 부인은 안절부절 했다.
“에디스, 에디스, 정신 차려! 어서 병이 나아야 해!”
“엄마, 안, 아, 주, 세, 요!”
홀 부인은 에디스를 팔에 안고 낮잠을 재울 때처럼 살살 흔들어 주며 자장가 같은 조용한 찬송을 불러 주었다. 고통스러워하던 작은 얼굴이 조금 편안해졌다. 몰아쉬던 숨소리도 부드러워지고 호흡의 간격도 길어졌다.
얼굴에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크게 뜬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며 네 살짜리 이 작은 천사는 그렇게 하늘나라로 갔다. 평양에 도착한 지 한 달도 안 된 5월 23일 아침이었다.
‘아, 하나님은 내게 왜 이런 심한 어려움을 겪게 하시는지…….’
또 한 번의 엄청난 슬픔이 닥친 것이다. 남편 닥터 홀이 떠나고 위로가 되었던 보석같이 귀하고 예쁜 에디스, 그 아이를 낳아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던가? 아빠가 하던 일을 하며 새롭게 살아갈 평양의 새 집에 정착하기도 전에 에디스는 엄마와 오빠의 곁은 떠나갔다.
흐느껴 울며 실의에 차 있는 엄마를 보며 6살이 된 셔우드가 말했다.
“엄마, 울지 마세요. 엄마 말대로 아빠가 에디스를 너무 보고 싶어 하셔서, 에디스가 아빠한테 갔나 봐요.”
홀 부인은 셔우드를 안고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에디스를 양화진의 아빠 닥터 홀 옆에 묻어 달라고 목사님께 부탁을 하였다. 그레이엄 리 목사님은 그 부탁을 들어 주었다. 홀 부인은 너무 지쳐서 서울의 양화진까지 갈 수가 없었다.
언제나 충실하고 힘이 되어주는 김창식 형제가 에디스의 시신을 서울로 운반해 주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나 지금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도록 고마운 가족 같은 그다.
에디스의 장례식을 마치고 아펜젤러 목사가 홀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홀 부인, 당신이 에디스를 아빠 산소 옆에 묻길 원한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오전 내내 에디스와 김창식 형제가 도착하길 기다렸습니다. 아내가 하얀 장미로 화환과 십자가를 만들었습니다. 피어스가 사온 한 다발의 붉은 모란과 장미 화환을 에디스가 누워 있는 관위에 올려놓고 나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주님의 품에 잠들라, 축복의 잠을 들라.”
그리고 주님과 당신의 가족을 그토록 사랑한 김창식 형제에게 기도를 인도하게 했습니다. 매장 예식을 마치고 작은 봉분을 만든 다음 그 위에 꽃을 올려놓았습니다. 모든 의식은 경건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당신의 딸 에디스는 지금 아빠의 품에 안겨 편안하게 잠들고 있을 것입니다.”
에디스를 잃은 슬픔과 아픔으로 허탈감에 잠겨있던 홀 부인은 아펜젤러 목사의 편지를 읽고 몸을 추스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우리 네 식구 중, 절반은 이미 하늘나라에 갔네. 남편은 발진티푸스, 딸은 이질 병으로. 나도 언젠가는 그 나라에 가야 하는데 병이나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은 이 조선 땅에서 진정 내가 남편 대신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홀 부인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마음을 가다듬었다. <다음호에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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