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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내 아버지, 그 남자 <49, 마지막 회>

한류작가 김하인 장편소설 / 삽화 정재남

2018년 05월 01일(화) 14:26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에필로그

산기슭에 진달래꽃과 철쭉꽃이 만발했다.
벚꽃나무도 가지마다 꽃을 흐드러지게 피운 화창한 봄날이었다. 2011년 4월 25일, 토요일 오후. 십여 명의 남녀 등산객들이 무리를 지어 건봉사 경내를 통과했다. 사찰 건물 뒤쪽으로 난 계곡길과 산기슭길을 타고 그들은 가파른 산을 부지런히 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고성 군청 문화과에 등재된 민간인들로 구성된 향토문화연구회 회원들이었다. 자기 사는 지역의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답사하는 모임. 그들은 건봉사 뒤쪽에서 출발해 두 시간 넘게 가파른 산길을 타고 올랐다.
금강산 자락인 산 정상부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부처가 나타나야지만 그들은 비로소 걸음을 멈출 것이다. 그들은 부처 양 옆으로 쓰여 있는 불경 몇 줄을 사진으로 찍고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 중 몇 명은 등산객들이 버린 폐기물을 담아오기 위해 쓰레기봉투도 허리에 꿰차고 있었다. 그들은 천오백 미터 높이의 봉우리 정상부에 다다랐다.
고성 지역의 문화유산인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부처 앞에 도열한 그들은 간소하게나마 예를 올렸다. 누군가 부처의 얼굴과 맨 오른쪽, ‘東方神(동방신)……’ 으로 시작하는 열여섯 줄의 한자 문구들을 탁본 뜨자는 주장을 했었다. 하지만 훼손될 우려가 있어 그 안건은 채택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렌즈 달린 커다란 카메라로 세세하게 사진을 찍고 또 누군가는 노트를 펴고 일일이 손으로 바위에 새겨진 경전 문구를 옮겨 담았다. 그리고 그 주변부를 말끔히 청소한 뒤 그들은 올라온 길과는 다르게 옆 봉우리로 건너가는 산길을 택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경사가 심한 산길을 오르고 다시 내려가고 기슭길은 휘어돌기를 반복했다.
부처바위와 맞은편 산봉우리에는 몇 그루의 노송과 학의 형상을 한 바위, 그리고 학의 알이라 일컫는 아주 둥근 바위가 산 정상에 신비스럽게 얹혀 있다. 그곳은 북쪽은 빼고 삼면이 환히 트인 곳으로 저 멀리 푸른 동해도 한눈에 보인다. 또한 산 정상부치곤 올라앉기 편한 자그마한 바위들과 평지가 있어서 절경을 감상하면서 도시락을 먹기 좋은 곳이다. 그들은 싸가지고 간 김밥을 그곳에서 먹었다. 그리고 잠시 봄빛으로 충만한 대자연과 바람을 온몸으로 쉬며 맛본 뒤 그 자리에 쓰레기 하나 남기지 않고 다시 하산을 시작했다.
그 산의 중턱, 계곡 위쪽으로 커다란 늪지가 형성돼 있다. 갈대가 우거져 있고 사람 키보다 훨씬 깊은 낙엽들이 켜켜이 쌓여 있어서 동물이든 사람이든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든 곳이다. 그대로 위에서 굴러떨어지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늪지는 우거진 마른 갈대풀로 위장하고 있다. 모두들 조심해야만 했다.
그들이 하산하고 있는 산 중턱 한 켠에는 두툼한 기와 잔해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다. 기와들은 이끼를 두르고 있어서 미끄럽다. 그래서 미끄러져 굴러 떨어지면 늪지에 처박혀야 하기 때문에 일행들은 조붓한 내리막길을 조심조심 내려간 뒤 다시 옆 산 쪽을 향해 가파른 외길을 기어오르다시피 올라갔다.
하산 길은 세 개의 산을 가로지르게 돼 있다. 산길은 다시 내리막길로 이어지고 갈참나무숲으로 우거진 산기슭을 휘어돌았다. 구비마다 산중턱이긴 하지만 전망 좋은 평지가 새로이 나왔다. 그곳에도 사람이 산 흔적들이 쌓였다. 단단하게 구운 벽돌도 그렇거니와 군데군데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는 주춧돌로 미뤄 짐작컨대…… 오랜 옛날 여기는 건봉사의 말사쯤 되는 절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런 깨진 기와 무더기는 산기슭을 돌면 또 나오는데 사라진 이 절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봐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일단 건봉사 기록들부터 찾아봐야겠지만 사찰에 소장돼 있던 모든 기록은 육이오 전쟁 때 전소된 건봉사와 함께 재로 변해버렸다. 지역에 남아있는 고서들을 발굴해 찾아서 뒤져보는 수밖에는 없다.
하산하는 길을 이끌던 오십대 초반의 날렵한 체구를 한 회원이 산기슭 길을 돌다가 동작을 멈추었다. 네댓 마리의 멧돼지가 골짜기 쪽에서 무리져 올라오다가 사람과 눈이 딱 마주친 거였다. 어미 멧돼지는 거짓말 조금 보태면 집채만 했고 나머지 세 마리의 몸무게도 제각기 족히 일백 킬로그램은 나가보였다. 멧돼지들은 산에서 먹이가 부족하자 민가 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골짜기를 타고 올라오던 중이었다.
리더가 들고 있던 막대기로 근처에 서있는 나무줄기를 세차게 소리 나게 치자 멧돼지들은 놀라 후닥닥 튀어 눈 깜짝할 사이 산 능선 너머 달아나버렸다. 최근 멧돼지 개체수가 급격하게 많이 증가했다. 특히나 작년엔 산과 접한 농가에 직접적인 피해를 많이 주었다. 아마도 산기슭 밭작물을 수확하는 올 가을쯤이면 이 지역도 전국의 엽사들에게 일정 기간 멧돼지 사냥을 허락하는 수렵기간이 설정될 거라는 얘기들을 나누며 그들은 하산을 재촉했다.
-어? 누가 이런 데 가방을 다 버렸지?
커다란 밤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밤나무숲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맨 선두에 섰던 하산길 인도자가 남색 옷가방을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갔다.
-낡고 더러운 걸 보니 올해 물건은 아니고 작년 물건 같구먼. 근데 어라? 지퍼가 멀쩡하네. 꽉 채워져 있고.
-봐봐, 뭔가 안에 들어 있구먼.
-그렇다면 혹시 돈다발 아냐?
-돈다발이면 이렇게 가벼울라고.
말라붙은 흙먼지로 인해 지퍼가 잘 열어지질 않자 누군가 갖고 있던 등산용 칼로 웬만한 크기의 옷가방 배를 푹 찔러 옆으로 북북 잘라냈다. 가방 안에는 흙물이 스며들어 완전히 찌든 남자의 속옷과 상의와 바지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녹슬어 못쓰게 된 필기구 몇 개가 나왔고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의 갈색표지가 있는 노트가 한 권이 들어 있었다. 그게 내용물의 전부였다.
-쓰인 글 내용이 뭐야?
-글쎄…… 뭔가 빼곡히 써 있긴 하지만 완전히 흙물에 종이와 껍질이 눌어붙어 있어서 도무지 잘 떨어지질 않는군. 안되겠어. 집에 가지고 가서 수증기를 쐬어서 종이를 한 장 한 장 따로 떼어서라도 읽어봐야겠어.
-이 사람아, 그딴 걸 읽긴 뭘 읽어? 내버리라구.
-글쎄 버리더라도 산 아래로 가지고 내려가서 버려야지.
남자는 쓰레기봉투에다가 가방과 옷가지들을 주워담고 노트는 자신이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배낭 안에 집어넣었다. 그 사람은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 지금껏 오십 평생을 고성에서만 살아온 토박이였다. 대학을 다니진 못했지만 어릴 때 한학을 배웠었다. 비닐하우스 농사를 지으면서도 틈틈이 붓글씨를 쓰거나 책읽기를 좋아하는 남자였다.
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스레인지를 켜고 주전자에 물을 담아 그 위에 올렸다. 주전자는 이내 물이 끓어 주둥이 쪽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궁금한 것은 못 참는 그는 흙물로 덕지덕지 눌어붙은 종이에다가 수증기를 마악 쐬고 있는 참이었다. 때마침 누군가 급히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주방 테이블에 흙물로 찌든 그 노트를 올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이웃집 남자였다. 밭을 갈다가 트랙터가 고장이 나 멈춰섰는데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다며 그에게 봐달라는 것이었다. 농기구 고치는 데 일가견이 있던 그는 이웃집 남자를 따라 산기슭의 밭으로 올라갔다.
그 사이 그의 아내가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밥을 전기솥에 안치기 위해 주방에 들어섰던 그녀는 불그죽죽한 흙물로 잔뜩 눌어붙은 노트를 발견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이딴 더러운 것을 누가 주방에다가 갖다놓았냐, 하고 볼멘소리를 하던 그녀는 부엌 창문을 열고 소여물을 쑤는 뒤채 마당 쪽으로 노트를 집어던졌다.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나온 그녀는 두 개의 손가락만을 이용해 그 노트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소여물을 쑤는 가마솥 아궁이 쪽으로 가져가서는 아궁이 속에다가 노트를 휙 던져넣었다. 마른 솔잎과 잔나무가지들을 아궁이 입구에 쌓은 아낙은 불을 지폈다. 불꽃이 금방 환하게 지펴졌다. 불길은 금방 아궁이 속에 있던 노트에 옮겨 붙었다.
뜨거운 불길이 눌어붙은 종이 사이를 가르며 불꽃을 푸르게 머금었다. 그런 와중에 아주 잠깐이지만 종이에 쓰여 있던 몇 개의 글씨들을 또렷하게 불러 일으켰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꽃을 머금고 재가 돼버리는 수십 장의 종이 안에서 ‘수범’ ‘승윤’ ‘아내’ ‘가족’ 이라는 글자들이 찰나로 떠올랐다 이내 스러져버렸다. ‘너무나 보고 싶다’ ‘너무나 사랑한다’는 문장도 삽시간에 불길이 삼켜버렸다.
그렇게…… 한 남자의 마음이 속절없이 타들어갔다.
한 남자의 삶이 그렇게 활활활 소리를 내며 타올라 한 줌도 안 되는 재로 사라지고 있었다. <끝>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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