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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숲으로 [18]

향토소설가 김담 연재 산문(散文)

2019년 02월 26일(화) 08:49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봄과 겨울이 서로 머뭇거리는 그 어름에 버들개지의 아퀴가 뾰족뾰족하게 트기 시작했으며, 간밤엔 도둑눈이 내렸으나 아침 햇살에 녹아 말 그대로 봄눈 녹듯 사라졌다. 겨우내 가뭄으로 바스라질 것 같았던 초목에 물이 오르면서 갓 세수한 아이 얼굴처럼 생기가 돌았다. 마을에서 올려다본 큰 산은 판화가 오윤의 <검은 새>처럼 골과 마루가 뚜렷하고 선명해서 마치 칼로 조각을 한 듯했다.
이른 아침 마실 것을 챙겨 집을 나섰다. 송강리에서 건봉사로 가는 길은 오래 전부터 민통선(민간인 출입 통제선)이어서 자동차로나 겨우 출입이 가능했다. 이때 군부대 앞 검문소를 지키는 초병에게 신분증을 보여주어야 했으며 때로는 승용차 트렁크를 열어야 하는 일도 있었다. 들어가는 곳과 나가는 곳의 검문소는 통제 주체가 달라서 나갈 때도 똑같은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랬던 이 길이 2018년 9월 민통선에서 해제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에도 여태 뭉그적거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엔 부처님 오신 날 하루, 민간인 출입 통제가 해제되어 할머니 손을 잡고 절엘 갔다. 그렇다고 할머니가 불교도였는가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으나 할머니께서는 탁발 나온 스님에게 시주도 했고, 또 무당이 굿을 하면 어린 내 손을 잡고 굿 구경을 다니기도 해서 할아버지의 지청구를 듣기도 했으나 아랑곳없었다. 할머니에게 절은 종교 이전에 문화였으며 습속이었다.
초등학생이었던 어린 우리들은 또 성탄절이면 마을에 있는 군부대 위문 공연을 갔다. 내무반이었을 곳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자주 위문편지를 쓰고, 위문품을 내고 그랬는지. 아니 반공글짓기와 반공포스터 그리기를 자주 했는지. 아무 영문을 모르는 채 위문 공연을 했으며 반공대회에 참석했으니 할머니나 나나 뭘 모르기는 도긴개긴이었다.
설렘과 두려움이 잔물결처럼 일렁거리는 가운데, 아무런 간섭도 없이 군부대 앞 초소를 지났다. CCTV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었지만 그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길은 가을날 허가를 받고 버섯을 따러 들어갔다 돌아오면서 걸을 수 있었지만(그렇더라도 그곳은 이미 군 관할이었다), 내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발걸음이 가든했으나 철조망 곳곳에 걸려 있는 경고판을 보는 일은 내내 편치 않았다.
‘묘적’이라든가, ‘여승터’라든가, 또 ‘머내골’이라든가 하는 지명들은 거의 잊히고 하물며 군부대를 지나면서 만나는 다리 이름조차 ‘무내교’로 표기되어 있었다. 이것은 당시 마을이장의 고백대로 자신이 ‘문이교’라고 말해야 했었는데, 잘못 말하는 바람에 무내교가 되었다고 했으나 그대로 무내교로 굳어지고 말았다. 문이골은 그 다리 아래를 흐르는 물길이 흘러오는 골짜기 이름이었다. ‘노루목교’가 그곳이 노루목이라고 불리어서 노루목교가 되었던 것처럼.
건봉산이라는 어엿한 지명이 있었지만 마을에서는 다만 ‘큰 산’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어떤 경외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산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큰 산에 바람이 꽉 찼다거나 큰 산 까치봉에 눈이 내렸다거나 하는 말로서 마치 임금의 이름을 휘(諱)하듯이 그렇게 에둘렀다.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겸허와 겸양의 태도였을 것이었다.
미세먼지 없이 새파란 하늘에는 맹금인 말똥가리 한마리가 제자리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그러나 수풀 속에서는 작고 어린 새들이 숨죽이며 사태를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위험신호를 알리느라고 분주탕이었다. 그 가운데 산까치라고 불리는 어치 울음소리가 유난스레 거칠고 사나웠다. 사냥하는 자나 사냥당하는 자나 서로에겐 굶주리느냐, 잡아먹히느냐 목숨을 건 전투일 것이었다. 고요와 소란으로 숲 골짜기가 그들먹했다.
송강저수지 둑 높임 공사를 하면서 산을 까뭉개고 길을 높이고, 직선에 가깝게 고치면서 구불구불했던 옛길은 흔적 없었다. 산천도 변하고, 사람도 바뀌었으니 그깟 옛길 좀 바뀌었다고 무엇이 그리 안타까울까마는 콘크리트 다리들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또한 진행 방향 오른쪽 도로 옆 길섶에는 철조망으로 된 장벽이 세워져 있었고, 출입은 물론 촬영 등은 여전히 금지된 금단의 구역이었다. 그러므로 한쪽은 전과 같이 닫힌 채였다.
노루목교를 건너 비탈진 곳 마루에 오르니 호수 같은 저수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잔설이 희끗희끗한 골짜기에서는 솔바람이 불어오고 있었고, 이제 막 패름이 돌기 시작한 저수지에는 성큼 봄이 들이닥친 듯했다. 금이 간 얼음장은 유목민들 양탄자 같은 기하무늬로 눈길을 끌었으며 얼음장 밑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영화 〈아쿠아맨〉을 떠올리기에 넉넉했다.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라면, 바닷속 용왕이라면 꼭 그렇게 울었을 것이었다. 겨울가뭄으로 저수지 수위는 퍽 낮았다.
묘적으로 들어가는 머내골 입구, 다리에 서서 아무리 고개를 빼고 숲 기스락을 내다보아도 비석이 보이지 않았다. 그 비석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비석으로 소화 16년,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인 1941년(신사년辛巳年) 가을에 세운 비였다. 이 해에 조선불교 조계종이 출범했다. 그리고 박설산 스님에 따르면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금암 스님께서 1941년 ‘냉천리 묘적동천에 극락교와 동 염불비를 건립하시’[『금강산 건봉사적』(이영선 편저. 도서출판 동산법문. 2003, 200p )]었다고 했으니 어쩌면 이 비가 설산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염불비일지도 모르겠다. 2005년 필자가 찍은 사진과 위의 책 119쪽을 대조한 결과, 염불비가 맞다. 그러나 과문한 탓인지 저수지 둑 높인 공사 뒤 이 비의 행방에 대해 듣지 못했다.
다리에 머물며 준비한 차를 마셨다. 아쉬움을 달래느라고 성급했는지 입천장을 뎄다. 오직 산마루를 넘고, 골짜기를 내달려온 바람소리 뿐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아 차마 아마득했다. 걸을 때조차 먼 데서 온 바람은 귓등으로 넘어갔다. 자동차도 없었고, 사람도 없었다. 이따금 얼음장 아래서 거친 숨을 토해내듯 저수지가 울었다. 어디론가 사라진 것들, 묻힌 것들 그리고 잊힌 것들이 오로지 그 바람소리와 울음소리에 모두 녹아든 듯했다.
철조망이 장벽처럼 세워지지 전 어느 해 가을, 머내골 그 안쪽 어른들이 ‘여승터’라고 부르던 곳에 닿았다. 지붕이 그대로 주저앉았고, 주변에 수풀이 우거졌지만 암자 터였음직한 흔적은 고스란했다. 위아래로 오르내리면서 구경하며 살폈다. 괜히 그러고 싶어서 오래 머물렀다. 건봉사 큰 절에 딸린 아마도 비구님 스님들 거처였을 그곳엔 전쟁의 상처는 잊힌 채 오로지 이끼 낀 기와장과 메숲진 수풀뿐이었다. 토끼길 같은 좁다란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다보았다.
이쪽 산비탈도 한 번 치어다보고, 저 쪽 산비탈도 한 번 둘러보고 그러다가 어쩌다 지나가는 자동차도 짐짓 모르는 체 하면서 오래 전 버섯을 따라 다녔던 곳을 떠올렸다. 어느 골짜기에는 능이가 어느 솔숲에는 송이가 그리고 먹을 수 있지만 먹지 않는 껄껄이 그물 버섯과 달걀 버섯, 꾀꼬리 버섯 등이 눈앞에 삼삼했다. 숲은 가을이면 버섯이 지천이어서 달팽이도 먹고, 사람도 먹을 수 있었다. 멧돼지가 솔가리를 파헤쳐도 눈감아주었다. 그곳은 사람보다 동. 식물들 영역이었으므로.
건봉사 입구까지 한 시간 남짓 놀민 놀민, 해찰하면서 걸었다. 그늘진 곳에는 여전히 눈더미가 깊었으나 볕바른 곳에는 눈 자취마저 없었다. 송강리에서 건봉사까지 어슬렁거리며 걸어도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이었으나 오로지 내 걸음으로 걸어서 다다르기는 처음이었다. 이제는 옛날 일이 되어버린 건봉사 입구 앞 검문소를 걸어 나오면서 슬쩍 뒤를 돌아다보았다. 여전히 꿈속처럼 어리어리했다. 눈 쌓인 건봉사 부도전에 들어서서야 겨우 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가고 오는 일이 아무리 덧없다고 여겨도 딱따구리는 나무 둥치를 쪼았으며 까마귀는 또 까마귀대로 제 울음을 울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렇듯 영영 그리움의 출처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노상 한 쪽만 보고 있는 것인지도.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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