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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숲으로 [19]

향토소설가 김담 연재 산문(散文)

2019년 03월 13일(수) 11:28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거칠고 사나운 직박구리가 마을로 돌아오는 동안 까치는 전봇대 높은 곳에 집을 짓기 시작했으며 땅속 두더지는 땅 밑 가까이 굴을 내느라고 매바쁘게 움직이는 사이 복수초는 노란 꽃봉오리를 밀어 올렸다. 방생법회를 진행하는 스님의 염불 소리가 해안을 다독이는 가운데 트럭에 실려 와 대야에 부려 진 물고기들이 황소숨을 몰아쉬려는 찰나 파도 따라 출렁거리던 갈매기 울음소리가 드높게 솟구쳤다.
큰 산마루에는 눈발이 타래쳤으나 마을엔 비가 내렸으며 그 가운데 어디쯤엔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기온이 높을 때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겨우내 가뭄이 이어지고 있었던 까닭에 눈이든 비든 많은 양이 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으나 눈도 비도 오래 내리지는 않았다. 그렇더라도 바스라질 것 같았던 나무들 우듬지에 물이 오르면서 숲정이에 숨통이 조금은 트이는 듯했다. 그러나 바닥을 드러낸 개울은 여전히 가물었다.
깊고 푸르며 맑으면서도 깨끗한 호수를 상상하면서 선유담(仙遊潭)으로 향했다. 가까이 있었으나 숱하게 지나쳤으며 그러면서도 마음속 한 귀퉁이에 여투어 두었던 궁금증이 건봉사엘 다녀오면서 되살아났다. 원주지방환경청 홈페이지 ‘동해안의 자연호수 석호’( http://www.
lagoon.kr)에 따르면 강원도 동해안에는 18개 석호가 있으며 그 가운데 고성군에만 선유담을 포함 7개의 석호가 있다. 어쩌면 ‘있다’가 아니라 ‘있었다’라고 써야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집에서 가까운 화진포 호수는 내 집 텃밭 드나들듯 수시로 오갔다. 어느 해는 얼음이 꽝꽝 언 얼음장 위를 걷다 지청구를 듣기도 했으며 지금은 잊힌 영화 ‘파이란’을 들먹이며 지인들에게 인문지리와 국토지리는 어떻게 다른가를 짓떠들기도 했다. 여름이면 고묵은 소나무와 해당화를 겨울이면 고니를 비롯한 철새들을 봄이면 물안개 속에서 솟구치는 숭어 떼들의 숭어뜀을 가을이면 물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려고 그곳에서 슬몃거렸다. 내호와 외호로 나누기도 하는 너르디너른 화진포는 그러나 어른들이 기억하는 호수와는 또 사뭇 다른 풍광이었다.
이웃 어르신의 술회에 따르면 여름이면 호수에서 재첩을 잡고, 굴도 따고 그리고 겨울이면 얼음을 지치며 빙어낚시도 했다고 하나 지금은 다만 옛이야기일 뿐, 화진포 호수는 낚시 금지 구역으로 묶였다. 내게는 여전히 얼음판에 난 오리숨구멍과 고니 떼들로 기억되는 겨울 호수는 언제부턴가 부쩍 철새 떼를 구경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주변에 순환도로가 생기면서부터였을 것이었다. 인간에게 편리를 제공하는 도로가 새떼들에겐 소음의 진앙지가 된 때문인지도.
버스에서 내려 앞잡이 없이 밭을 가로질러서 갈대밭이 보이는 곳까지 다가갔다. 2013년에 원주지방환경청과 고성군에서 세운 안내판이 서 있었으나 호수 이름도 없이 그저 멸종위기 야생식물인 제비붓꽃, 조름나물, 각시수련 서식지라는 표기뿐이었다. 그 앞에서는 어른 키만큼 자란 묵은 갈대와 줄풀이 숲을 이뤄서 그대로 갈대와 줄풀밭이 되었으며 주변은 논과 밭 그리고 주택과 방치된 축사가 있었다. 강원고고문화연구원에서 2012년에 펴낸 학술연구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선유담 면적은 자그마치 31,765㎡ 즉 거의 만평에 이르는데, 보이는 것이라고 갈대뿐이었다.
논들 가장자리에 난 농로를 따라 걷다보니 개집에 붙박여 있는 개도 짖고, 목줄이 풀린 개들도 마주 다가오면서 짖었다. 다시 도섰다. 논과 맞닿은 산 뿌다구니에 떼무덤 같은 바위들이 보였다. 얼다 녹기를 반복하여 물컹물컹한 논바닥 골풀을 제겨디디며 다가갔다. 마치 수렁을 걷는 듯 신발은 논흙으로 엉겁이 되었다. 찔레덩굴, 퉁가리라고 부르는 청미래덩굴과 떨기나무들 사이로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노암들을 살폈다. 가학정(駕鶴亭) 터로 여겨지는 곳에서 만난 것은 뜻밖에 무덤이었다.
단원이 그린 해산첩이라고도 불리는 금강산화첩에 나오는 가학정을 떠올려 보면 짐작건대 그곳이 정자터라고 해도 어색할 것이 없을 듯하여 잠시 바장이다가 아무리 봐도 무덤은 생뚱맞아서 곧 돌아섰다. 다시 찾았을 때 먼저 그곳을 다녀간 이에게 전화를 했다. 바위에 새긴 글씨, 그러니까 석각(石刻)한 바위의 위치를 알고 싶어서였다. 두 곳을 알려주었고 드디어 찾았다. 아무런 길 안내판도 없었고 하물며 남의 집 마당을 가로질러야 했으며 암석 바로 옆 도랑에는 구정물이 흘렀다. 1995년 고성군수 장상국 씨가 세운 표지석엔 이끼가 끼어 글자 형태가 희미했다.
산 기스락에 붙박인 암석은 모르면 그대로 바윗돌이었고, 알고 봐도 비바람에 씻긴 글자는 손으로 매만지듯 가만가만 살펴야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세로로 새긴 글자 가운데 첫 글자인 仙자는 그런대로 쉽게 알아볼 수 있었지만 작은 표지석이 아니라면 그대로 암석이었다. 기스락을 따라 난 좁고 그늘진 길에는 얼마 전에 내린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고, 누구인지 모르는 먼저 걸어간 이의 발자국이 고스란했다. 그 길을 따라 정자터로 여겨지는 곳으로 향했다. 날씨는 미세먼지로 인해 뿌옜고, 갈대밭으로 변한 호수도 누리끼리했으며 산과 들은 그대로 갈빛이었다.
산 뿌다구니 무덤 뒤에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선유담 글자를 발견하고서야 찌푸렸던 인상을 폈다. 알고서 보는 것과 모르고서 보는 것이 차이가 이토록 컸다. 그 바위는 처음 찾았을 때도 보았으나 글자가 새겨져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뭇 무덤이 못마땅하여 더는 둘러볼 생각조차 못하고 근처 바윗돌 - 이 가운데 빗돌을 세웠던 흔적이 그대로 남은 바윗돌도 있었지만 아무려나 겅중겅중 건너뛰며 호수가 또는 연못이 멸종위기 종이라던 각시수련으로 뒤덮여 있었더라면 아니 보랏빛 제비붓꽃으로 한창이었더라면, 아쉬워했다.
국립생물자원관에 따르면 개수련, 애기수련 등으로도 불리는 각시수련은 멸종위기 야생생물2급으로 강원도 고성과 황해도 장산곶 등에 분포하는 한반도 고유종이었다. 그림으로만 봐도 꽃잎은 흰빛으로 차마 순정해서 어쩌지 못할 만큼 담백하고 끼끗해 보였다. 보랏빛 제비붓꽃은 어느 해 송지호에서도 만났고, 우리 동네 숲정이에서도 보았으나 이 꽃이 멸종위기 종인 줄은 몰랐다. 찔레꽃머리쯤 숲정이에 들어가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으므로 내내 붓꽃이려니 했던 꽃이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니 새삼스러웠다.
무덤 뒤 바윗돌에 새겨진 글자들 또한 닳고 닳아서 맨눈으로는 겨우 仙자만 알아볼 수 있었다. 좌우로 길둥글면서도 홀로 우뚝한 바윗돌에 새겨진 글자는 민가 근처에 있는 것과 달리 가로로 글자를 새겼으며 선이 굵고 깊었으나 이 또한 세월의 풍상을 비껴가지는 못했다. 답답한 마음으로 가만가만 더듬었다. 仙자를 빼면 나머지 글자는 글자인 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아슴푸레했다. 조선시대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고 하면서도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건천에 방치되었기 때문이었다. 우암이라고 하면 주자학을 집대성한 주희를 좇아 조선의 주자(朱子)가 되고 싶어 했으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계를 지배했던 인물로서 전국에 걸쳐 그이의 석각이 아무리 흔하다고 하더라도 고성에 있는 것은 또 고성에만 있는 것으로서 유일한 것일 텐데.
갈대와 줄풀이 뒤덮고 있는 선유담 바윗돌에 앉아 봄이면 순채나물을 안주로 여름이면 제비붓꽃과 각시수련 흰 꽃이 만발한 가을이면 달빛이 내려앉은 그리고 겨울이면 얼음판 위로 희디흰 눈밭이 펼쳐진 선유담을 꿈꾸듯 그리며 못 둘레를 걸터듬었다. 농경지가 넓어지면서 호수는 점점 졸아들었고 갈대뿐만 아니라 버드나무도 눈에 띄었다. 조선시대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선유담을 읊고 그린 시와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의 현실은 퍽 아쉬웠다. 문화유산을, 관광자원을, 자연환경을 이야기하면서도 곁에 있는 자원은 곧잘 잊었다.
무거운 걸음으로 돌아서는 순간, 그늘진 비탈에서 난데없이 여러해살이 식물인 ‘처녀치마’를 만났다. 벌써 재바른 누군가 다녀갔지만 처녀치마는 봄빛이 무르익어야 연보랏빛 꽃을 피울 것이므로 가만가만 새싹에게 봄 인사를 건네며 비로소 가슴을 펴며 조심스레 뒷걸음질했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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