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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숲으로 [22]

향토소설가 김담 연재 산문(散文)

2019년 05월 08일(수) 11:14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불을 품은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하늘색이 수묵화의 발묵처럼 번졌고, 숲 기스락 생강나무는 활짝 피었다 이울고 있었으나 노루귀는 여태 감감무소식이었다. 매화가 마을에서 제일 먼저 봄소식을 알린다면 숲속에서는 복수초가 단연 으뜸이겠으나 내겐 노루귀가 피어야 비로소 봄이 왔노라고 기지개를 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래야 바람결도 한결 달리 느껴지고 시냇물 소리도 쾌활해지는 듯했으며 무엇보다 우리 마을에서는 복수초보다는 노루귀 떼판을 더 자주 만날 수 있었으므로 그러했다.
복수초를 만나려고 멀리 양양 낙산사까지 다녀왔으나 그날은 눈 대신 때맞춰 비가 내리고 있었으며 꽃봉오리는 더디게 꽃대를 밀어올리고 있었으니 활짝 핀 복수초는 언감생심이었다. 경내를 두어 번 돌다 그대로 정문으로 향했다. 우리 동네 산 기스락 습지에서 해마다 다른 꽃들보다 먼저 잎을 피워 올리던 앉은부채가 감쪽같이 사라져서 어리둥절했던 터라 아쉬움은 더욱 컸으나 그 또한 불가항력이었다. 발을 구르는 것으로도 아쉬움이 가시지 않아서 이제는 세상에 없는 스님이 심은 소나무를 골똘히 들여다보았다.큰 눈 없이 흐리마리하게 겨울이 지나고 난 뒤 꽃들은 예전과 달리 일찍 피었으나 그렇다고 한꺼번에 출발선에서 달려나가는 육상선수 같지는 않은 것이어서 한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들도 저마다 이르거나 지르되기 일쑤였다. 한파가 닥칠 것이라는 지난겨울 예보는 그대로 예보였을 뿐, 기름보일러로 난방을 하는 우리집은 어머니 말씀대로 기름이 적게 들어서 좋기는 하였으나 어쩐지 자꾸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같은 일이 반복되면 그 일에 무뎌지는 것처럼 기후가 변하고 있다는 실감에 예민해지고 긴장하는 게 아니라 언제부턴가 그러려니 무심해지고 있었다.
숲이 울창해지면 숲 바닥에 살던 키 작은 초목들이 사라졌다. 이를테면 산불이 지나가면서 초목이 불타고 산이 검게 그을리고 나면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인 것처럼 숲 바닥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고사리들이 떼판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한 시절뿐이었다. 떨기나무들과 큰키나무들이 와싹와싹 잘 자라서 그늘을 만들면 고사리와 같은 민꽃식물은 다시 보기 어려웠다.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어느 한 시절 함께 공기와 햇볕, 바람과 비를 나눈 사이라면 아쉽지 않을 수 없었다. 가고 없는 것이 그리운 것처럼.
생강나무 꽃으로 차도 만들었고, 만개한 목련도 보았으니 마을 안 이 골짜기 저 골짜기로 꽃을 찾아 쏘다녔다. 목련은 보통 사월이나 되어야 피었는데, 올해는 무슨 일인지 삼월 초순에 꽃이 피었다. 큰 산 기스락 외딴 곳 주인이 떠난 집에 저 홀로 자라고 있는 목련나무였다. 저물녘에 만난 흰 꽃봉오리들은 마치 나무에 전등을 매단 것처럼 흰 꽃을 드레드레 피우고 있었다. 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교정에 핀 목련을 몹시도 싫어했다. 꽃봉오리는 꼭 솜방망이처럼 보였고, 교내 방송을 통해 울려 퍼지는‘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운운하는 가곡은 듣그러웠다. 그랬던 꽃이 이제는 봄소식을 전하는 전령으로 당도했다.
앞산 골짜기에는 오래 전부터 봄이면 찾곤 하는 노루귀 떼판이 있었다. 큰 계류와 작은 지류가 만나는 곳으로 노루귀가 지고나면 족두리풀과 화살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생강나무들 또한 떼판을 이루는 곳으로 이른 봄 제일 먼저 노루귀 꽃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숲 입새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골짜기 안쪽 다락논이 줄지은 곳에 시멘트로 농로가 포장된 것은 그렇다 치고, 아름드리나무들이 베어져 아무렇게 나뒹굴고 있었으며 트랙터도 오갈 수 있는 넓은 길이 생겼다. 땔감을 하던 옛날엔 발구가 다니던 발구길이 그 위쪽에 있었지만 계곡 옆은 겨우 지게나 지고 다닐 수 있는 좁은 길뿐이었다.
멧돼지가 파헤치고 어지럽힌 곳들을 발을 제겨디디면서 덩굴 사이로 머리를 숙이고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갔다. 참나무 둥치 옆에는 달래가 뾰족뾰족하게 싹을 내밀고 있었으며 생강나무들은 그야말로 꽃판을 이루었으나 이 또한 이르게 핀 꽃들은 벌써 만개하였으나 여태도 겨울눈이 그대로인 생강나무들도 즐비했다. 계류를 가로질렀다. 그런데 물살이 개개면서 계곡의 기슭이 넓어졌고 벼랑 또한 더 높아졌다. 계곡과 맞닿은 숲 바닥 흙들이 무너지고 떨어져 내려서 발 디디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누군가 버린 소주병에는 낙엽으로 속이 꽉 찼다.
노루귀는 듬성드뭇했다. 엄지손톱만한 꽃 이파리는 보기 어려웠으며 이제 겨우 봉오리를 내민 채 여기저기 피고 있는 꽃들이나마 몇 떨기 되지 않았다. 자리를 옮겨 둘레를 살폈으나 답쌓인 낙엽뿐이었다. 행여 꽃들을 밟을 새라 조심조심하면서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폈으나 못 보고 지나친 꽃은 없어 보였다. 풍란처럼 희귀해서 누군가 몰래 캐지도 않았을 것이니 궁금답답했지만 길래 있을 수도 없어서 계곡 위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흙더미가 무너져 내린 벼랑 끝에 고묵은 생강나무가 꽃은 피웠으나 아슬아슬했다. 반쯤은 뿌리가 드러났고, 또 반쯤은 가지들이 바닥으로 기울어져 언제 쓰러져도 이상스럽지 않을 듯했다. 물살이 휘돌면서 치고 나가는 자리가 넓어지면서 생강나무가 서 있는 자리는 점점 더 옹색해지고 있었다.
며칠 뒤 건봉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미친 듯이 바람이 휘불고 있었으나 모처럼 하늘이 파랬으니 꽃을 보겠다는 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큰길이었지만 자동차도 거의 다니지 않는 길을 걷는 것은 횡재나 다름없었다. 바람을 안고 걸으면서도 눈길이 닿는 곳마다 싱그러워서 발걸음이 가든했다. 그러다 산비탈 벼랑 끝에 핀 진달래꽃을 보았다. 그 며칠 전 마을 숲정이에서도 진달래꽃을 보았지만 벼랑 끝에 매달린 진달래꽃은 굳이 수로부인을 떠올리지 않아도 어딘지 모르게 퍽 애틋한 데가 있었다. 천 길 벼랑 때문이었는지 암소를 몰고 가던 늙은이 때문이었는지 아무려나 꽃은 피었고,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건봉사 부도전은 아무 때나 일없이 찾아도 좋았으므로 다른 곳은 가끔 건너뛰기도 하지만 부도전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꽃이 피는 봄이면 꽃이 피는 대로 비가 오는 여름이면 비가 오는 대로, 낙엽이 지고 눈이 오면 또 그대로 넉넉했으므로 때로는 삼가는 마음으로 또 때로는 제멋대로 풀어진 채로 앉아 있거나 서성서성했다. 전생이나 내생엔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저 그날 운수에 따라 가닿기도 하고 못가기도 하는 곳이 이제는 걸어서 갈 수 있었으므로 조금 더 발걸음이 잦아졌지만 전처럼 편치 않았다. 매번 공사 중이기 때문이었다. 이판이 있고 사판이 있는 것처럼 불사(佛事)는 물론 중요하고 필요한 일일 테고, 그리하여 그곳이 절집으로서 존재하는 것일 테지만. 꼭 금전벽우(金殿碧宇)가 아니어도 좋을 텐데.

눈이 내린 어느 날엔 바람만이 다녀간 부도전을 돌며 기찻길을 만들었다. 어릴 때 눈이 내려 쌓이기 시작하면 마당에 나가 두 발로 발자국을 냈다. 입으로는 칙칙폭폭 기적을 울리며 두 발을 모아 붙인 채 구불구불 길게 만드는 게 사북이었으므로 되도록 촘촘하게 걸었다. 그렇게 눈밭을 어지럽혔다. 그랬던 자리에 이젠 파랗게 새싹이 돋았으나 꽃들은 아직 일렀고 바람소리만 거세찼다. 아무도 없었다. 잠깐 둘러보면서 자리를 뜰까 하다가 바람소리에 이끌려 볕바른 곳에 가만히 앉았다.
바람소리에 정신이 팔리는 사이 산등성이 솔수펑이가 눈에 들어왔다. 갈대가 눕는 일은 차라리 사소해 보였으며 바람결에 실려 오는 매화 향내마저 뒷전이었다. 거대한 파도가 밀어닥치는 듯 물멀미가 났다. 귓전으로 들리는 소리만으로 벌써 다른 세계였으나 눈앞에서 솔숲이 누웠다 일어서는 풍경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였으나 그렇다고 또 빈틈이 없지는 않은 것이어서 어느 해 조계산 송광사에서 만났던 그 바람을 다시 떠올렸다.
얼레지, 애기중의무릇, 노루귀, 양지꽃, 돌단풍, 현호색, 산괴불주머니를 올해 처음 숲 기스락 이곳저곳에서 보았다. 불전에 나가지 않아도 이미 부처님을 뵌 듯.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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