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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숨결

우리 사는 이야기 / 장정희 수필가(고성문학회 회원)

2018년 07월 11일(수) 13:38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유난히 밝은 새벽 보름달이 서쪽 하늘에서 들녘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비가 온 후라 길이 미끄러워서인지 아직 아무도 약수터에 오지 않았다.
새벽 별들의 영롱함과 바람결에 스치는 공기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름 아침이다. 산듯한 공기에 가슴을 열고 크게 심호흡 한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별다른 일이 없으면 나는 새벽 산책을 나선다. 규칙적인 새벽 약수터 산책길은 상쾌한 하루의 시작이다. 꾸준히 운동하며 하루를 계획하는 이 시간이 내게는 행복한 하루의 첫 시간이 된다.
매일 조금씩 변화하는 달의 모습을 바라보며 걷는다. 초저녁에 뜨는 초승달은 새벽에는 볼 수가 없다. 빛을 더해가는 상현달과 보름달은 청춘같이 밝고 힘차 보인다. 작아지는 하현달과 그믐달은 어딘가 모르게 외로워 보인다. 나이 들어가는 내 모습 같아 왠지 내 자신도 달처럼 작아지는 것 같다.
탁한 공기에서 벗어나 밤새 잠자던 육신의 세포를 하나하나 깨우고 맑은 공기를 가슴에 채우며 새벽하늘을 다시 올려다본다.
내가 이렇게 15년 동안 꾸준히 새벽 산책을 하는 이유는 체력을 단련하기 위함도 있지만 이 시간만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혼자 맘껏 사유할 수 있고 또 이슬에 몸을 씻은 대자연의 싱그러운 숨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산책과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산책길의 사계절은 아름답다.
이른 봄이면 나뭇가지에 파릇파릇 새싹들이 앞 다퉈 싹을 틔우는 모습이 신비롭고 봄을 알리는 산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유난히 청아하다.
여름이면 시원한 매미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다. 발등에 툭툭 채이며 떨어지는 투명한 이슬방울이 처연하도록 맑다. 소나무 사이사이로 파지는 아침햇살에 안개가 걷히는 숲속의 신선함은 일상의 작은 걱정까지 다 지워준다.
가을 날 곱게 물든 단풍을 보면 마음속까지 고운 물이 드는 것 같고 향기로운 들국화가 만발한 들녘과 오곡이 익어가는 계절의 풍성함을 느낄 수 있어 여유로움이 가득하다.
겨울에는 길이 미끄러워 불편하긴 해도 나뭇가지에 핀 설화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 어느 꽃에 비유 할까! 맑은 날이면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겨울 새벽하늘의 환상적인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지금은 직장을 그만두어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데도 새벽 운동을 고집하는 이유는 이른 새벽 운동을 끝내 놓으면 하루의 해야 할 숙제를 다 해 놓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춥거나 비가 온다고 운동을 미루면 다시 시작 할 때 차일피일 미루게 되고 빠지는 날이 생기기에 별다른 일이 없는 한 거의 매일 약수터를 찾는다.
내가 새벽 운동습관이 몸에 배인 것은 부모님께 받은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예전에 친정 부모님은 두부공장을 하셨다. 아버지는 새벽 2시면 일어 나셔서 두부를 만드셨다. 콩을 갈아 체에 거르고 콩물을 끊여서 바닷물로 염수를 줄 때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증기 속에 몽글몽글 콩물이 엉키며 순두부가 만들어 지는 과정은 정말 신기했다.
어둡던 새벽하늘이 보랏빛으로 열리고 이때쯤이면 운동을 하거나 새벽일을 나가기 전 해장을 하는 사람들이 순두부를 사먹으러 온다.
아버지는 자고 있는 나를 깨워 양념간장을 만들어 오라고 하셨다. 맏딸인 나에게 작은 도움을 받고 싶으셨을까, 아니면 부지런한 습관을 어릴 때부터 몸에 베이게 해 주고 싶으셨을까?
자다가 일어나 양념간장을 만들어 종지에 담아 가지고 나갈 때는 잠이 덜 깨어 짜증이 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린 아이에도 새벽에 순두부를 맛있게 드시는 분들의 얼굴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활력과 기쁨 같은 것을 느끼곤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새벽 가마솥에서 모락모락 올라가는 김을 얼굴에 받으며 두부를 만드시던 아버지의 모습, 뜨거운 순두부를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 드시던 그리운 모습들도 잠자던 일상을 깨우는 싱그러운 새벽의 숨결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행복이란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며 희망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일이다. 오늘은 내 생애 가장 희망적인 날이다. 별을 보며 우주와 교감을 나누고 안개 낀 계곡에서 뿜어져 나오는 싱그러운 숨결이 그리워 나는 오늘도 새벽산책을 나선다.
약수터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는 언제나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반긴다. 몸속에 가득 찬 피톤치드를 내어주며 함께 호흡 하자고 한다. 오랜 세월 한자리에 정착하여 산을 지켜준 소나무를 품에 안으며 기둥에 가만히 귀를 대어 본다. 깊은 뿌리에서 올라오는 수맥 소리가 나무 기둥을 타고 들려오는 것 같다. 소나무들끼리 군락을 이뤄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서로를 지탱하며 꿋꿋하게 자라 곧은 기품을 간직하고 있다. 땅속 깊숙이 강인한 뿌리를 내리고 사계절 푸른 잎을 지닌 가지를 너풀거리며 산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소나무 뿌리와 줄기, 숲과 어우러진 풍광은 오랜 세월 공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도 같다. 성취를 위해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바쁜 일상을 보며 이렇게 여유 있는 시간 가질 수 있어 행복하다.
해빙기가 지나니 이른 봄날 대지의 향긋한 흙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멀리 산마루에 새벽 골안개가 환상처럼 피어오른다. 나는 오늘도 그 숨결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이 글은 월간 ‘수필문학’ 등단 작품으로 지난 5월호 ‘수필문학’에 실렸습니다.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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