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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나를 관통할 때

금강칼럼 / 김향숙 칼럼위원(시인)

2019년 11월 20일(수) 09:25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하루의 노을처럼 가을이 오고 노을 지난 밤처럼 겨울은 온다. 떠나는 것들의 절정은 모두 아름답고 그 스러져가는 뒷모습은 ‘모란이 지고 나면 그뿐 /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하고 울었다는 김영랑 시인의 지는 모란만큼이나 애절하다.
‘아! / 이렇게 웅장한 산도 / 이렇게 큰 눈물샘을 안고 있다는 것을 / 이제야 알았습니다.’ ‘백두산 천지에서’라는 부제가 달린 정채봉 시인의 시 <슬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전문이다.

또 하나의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의 이름 안에 부제로 붙은 이름들이 있다면 그것의 첫째는 아마도 슬픔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슬픔은 외로움의 맨 위에 떠 있는 검은 하늘의 조각달처럼 아픔을 동반한다. 2019년, 또 하나의 가을이 나를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결코 우울하지만은 않은 서늘하고 어쩌면 눈부신 아름다움일 수도 있는 슬픔. 최근에 쓴 나의 시에도 이런 슬픔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직선으로 바다에 다다른 강물은 없다 / 혼자서 바다로 가는 강물도 / 울지 않고 바다로 간 강물도 없다 // 밀어내면 먼 길 돌아 흐르고 / 이 골짝 저 골짝 낯선 물길들 끌어안고 / 쫓겨나면 끝 모를 절벽 / 비명으로 뛰어내렸다 // 모든 산들의 눈물은 그렇게 바다로 갔다 // 바다와 사람의 눈물이 짠 것은 / 두 생애의 본성이 닮았기 때문이다’ <모든 산의 눈물은 바다로 간다>
산꼭대기 작은 옹달샘으로 시작된 산의 눈물이 바다에 다다르기까지의 과정은 사람이 태어나고 살아내는 한 생애와도 같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때로는 거부당하고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며 나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바다가 가까워질수록 강의 폭은 완만해지고 친숙해지고 깊고 고요해진다. 그제야 내가 보이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성경 시편 기자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고백한다. 물론 현대사회의 인간 수명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긴 하나 수고와 슬픔의 배경 없이 100세 인생을 살아내는 일도 만만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예술이나 인문학은 과연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꼭 필수과목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음악이 없어도, 시詩가 없어도, 커피가 없어도, 월드컵 축구 시청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나름대로 즐거운 삶을 살아가는, 그러면서도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든지 많다.
이미 정규방송의 뉴스조차도 어린이나 청소년이 시청하기에 적절치 않은 지 오래다. 남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웃거나 즐기는 일을 부끄러운 일이거나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뿐 아니라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이기적 사고방식은 이미 그 도를 넘어서 나 좋자고 남에게 손해를 입히면서까지 서슴지 않는 거짓과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경쟁이나 하듯 서로 끔찍한 폭력과 살인을 다루는 비중이 커지고 게임이나 웹툰 등에서도 극도로 흉측한 표정과 제스처로 감정유입을 강요당하는 바람에 어린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순수한 인간미를 잃어가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울 때가 있다.
스트레스를 해결하려고, 또는 심심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한 수단으로 등등, 쉽게 이런 폭력 스크린에 노출되다 보니 무엇이 수준 높은 아름다운 감동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훌륭한 멘토나 스승을 만나지 못한 상태로 무작정 흘러가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가. 물론 올곧고 성실하게 자기 길을 가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는 그나마 울 일도 웃을 일도 만나며 그래저래 살아가는 것이다.

↑↑ 1961년 <결정적 순간>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정범태 사진작가의 작품.

ⓒ 강원고성신문


떠나가는 것들을 만져본다

아름다운 감동결핍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우리 안의 오래전 순수를 찾아내는 과정에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이 감정을 바깥에서 우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기르거나, 그도 아니면 내 스스로의 창작을 통해서라도 찾고 만나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오래전에 만났던 사진 한 장의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1961년 <결정적 순간>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정범태 사진작가의 유명한 작품이다. 그는 여러 신문사에서 40년 동안 사진기자로 수많은 특종 사진들을 남겼고 바로 얼마 전, 2019년 9월 15일에 91세로 고인이 되었다.
이 사진은 1961년 당시 경기고등군법재판소 법정에서의 공판 장면을 촬영한 것인데 5·16 군사정변 이후 경직된 사회에서 양산된 수많은 범죄자들 중 먹고살기 힘들다는 불평을 했다는 이유로, 혹은 누군가의 비위를 거슬렀다거나 유언비어 유포라는 애매한 혐의로 억울하게 군사재판에 회부된 사람들도 많았었다고 한다.
그중 차례가 된 푸른 죄수복을 입은 한 젊은 여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었고 판사가 막 판결문을 낭독하려는 순간, 작은 발자국 소리와 함께 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이모와 함께 왔다가 방청석에서 혼자 걸어 나와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서 있는 여인의 손을 꼭 잡고는 판사석을 바라보았다. 그때 어린아이의 눈에서 간절함을 읽었었는지 판사는 여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한다. 이 한 장의 흑백사진을 처음 만났을 때 흘렸던 눈물의 감동을 나는 아직 잊을 수 없다.
이 사진은 그해 10월 일본 아사히신문 국제사진전에 출품되어 10대 걸작으로 뽑혔으며 1967년 일본 평범사 발행 세계 사진연감에 수록되었다가 10주년 특집의 전 10권 중에서 뽑은 36장의 작품으로 선정되어 “기록 그 10년”에 재수록 되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잘된 사진 36장 가운데 들어있는 정범태 작가의 사진은 그야말로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감동을 줄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 예로 그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수없이 스쳐 지난 감동의 순간들, 그것이 한 장의 사진이었든 한 줄의 글이었든, 사람이었든 사건이었든, 그 기억을 추억하기 좋은 가을 끝 무렵. 아름다운 절정의 가을을 관통하면서 내 삶에서도 고운 것들이 차례로 하나둘씩 떠나가는 것들을 뜨거운 눈시울로 만져본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 시인의 떠나보내는 것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눈에 선하다.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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