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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 앞바다 ‘금구도’가 정말 광개토왕릉이라면…

이선국의 '길에서 금강산을 만나다' [40] 화진포 앞 거북섬은 광개토왕릉
화진포의 수릉壽陵 공사현장을 둘러봤다… 석성의 외벽이 육지를 향하고 있어

2019년 11월 27일(수) 09:45 [강원고성신문]

 

↑↑ 화진포 앞바다의 금구도. 아직 관련유물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이곳이 광개토대왕릉이라는 것이 밝혀져 고성의 역사적 의의를 확인하고 또 하나의 명소가 되길 기대한다. 책 220 페이지.

ⓒ 강원고성신문

화진포 앞바다에 있는 금구도金龜島는 거북이 형상의 바위섬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면적은 약 천여 평 되는데 대나무가 무성하며 바람에 햇살을 받아 흔들리는 모습이 금빛으로 빛난다고 하여 금구도라 불렀다고도 한다. 조선조에는 초도草島라고 불렸다는데 섬에 대나무가 있어서 그리 불렀던 듯하다. 이 바위에 파도치는 풍경이 아름다워 고성팔경에 금귀농파金龜弄波라는 절경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어촌사람들은 거북이를 수호신으로 여겨 이 섬을 명당자리로 생각하고 마을에서 고기를 잡다가 죽은 사람이 있으면 이 섬에서 장례를 지내왔다. 그러므로 금구도가 고구려 광개토왕릉일 수도 있다는 주장은 이 마을사람들에게 큰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광개토왕과 이곳 화진포는 어떤 인연이 있었던 것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 우선 광개토왕이 우리 한국사에 어떤 업적을 남겼던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영토 확장의 진격, 광개토왕= 고구려의 19대 왕 광개토왕은 영토를 넓히는 데 지대한 업적을 남긴 왕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사를 통털어 광개토왕과 그 뜻을 이어받은 아들 장수왕 때가 최대로 국토가 확장된 시기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 광개토왕이 왕자 거련을 태자로 책봉하고, 환인 동쪽 집안에 독산성 등 6성을 쌓고 무덤축조 기술자를 집단 이주시켰으며, 화진포의 수릉壽陵 공사현장을 둘러봤다는 기록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삼국사기. 책 219 페이지.

ⓒ 강원고성신문

광개토왕은 즉위 직후 국양왕이 사망하고 주변국가들이 공격해올 조짐이 보이자 4만 군사를 이끌고 대방帶方을 탈환하는 것을 시작으로 백제의 여러 성을 함락 해갔다. 거란이 변방에 침략해와 백성 만 명을 잡아 가자 즉각 북진해 만 명을 고스란히 고향으로 되돌려보내고 거란인도 500명 잡아옴으로써 쉽게 넘볼 수 없는 힘을 보여주었고, 후에 거란, 후연後燕까지 정복해 북방까지 장악 했다.
신라와는 왜군을 물리쳐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내물왕 이사금이 실성을 보내와 화친조약을 맺는 관계가 되었다. 백제와는 한때 아신왕으로부터 영원한 신국맹세를 받기도 했으나 궁서서묘의 관계로 끊임없이 서로 침략하고 물리치는 전쟁을 치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증조부인 미천왕은 황해도를 백제에 빼앗겼고, 할아버지인 근초고왕은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했으니 큰 아버지인 소수림왕과 아버지 고국양왕은 백제를 향한 복수심이 뿌리깊었을 것이다. 광개토왕은 이러한 사명감 때문인지 끝내 백제의 전 영토를 거두어 들이게 되었다. 이렇듯 광개토왕은 39세의 나이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21년 간 남정북벌에 매진하여 남으로는 임진강까지 북으로는 만주 대부분을 장악한 것이다.
왕릉의 길지, 거북형상의 금구도= 영토 확장의 목적이 식량이 풍부한 남방을 정벌해 백성들의 기아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던 것과 같이 광개토왕은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해 내정정비에도 힘썼다. 장사長史·사마司馬, 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하고,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해서는 수묘인守墓人 제도를 제정했다.
수묘인 제도를 제정한 이유는 왕릉의 길지를 찾고 보호하는 것이 고구려왕의 중요한 역사役事라 인식하게 된 때문이다. 그러한 인식의 계기는 먼저 언급했듯이 아버지 고국양왕이 환도성에서 부왕인 미천왕의 시신과 어머니와 왕비를 북방 전연前燕의 모용황에 빼앗겼다가 다시 찾아오는 수모를 당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런 연유로 광개토왕은 백천百川과 신계新溪에 왕릉을 구축해 그곳에 부왕의 시신을 다시 모시고, 자신의 사후死後를 위해서도 즉위 3년, 수릉壽陵을 축조하게 된다.

↑↑ 만주와 백제 땅 전체를 접수한 광개토왕이 축조한 수릉壽陵의 흔적. 책 219 페이지.

ⓒ 강원고성신문

앞서 말했듯이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에게 큰 강을 건너 생명을 구하고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 준 거북이에 착안해, 거북이 형상을 닮은 지형을 반도 내에서 찾아 수릉壽陵을 축조하고 한반도 부족국가들을 평정하여 왕릉을 안전하게 보호하도록 한 것이다. 그곳이 바로 화진포 거북섬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광개토왕, 화진포 거북섬 수릉에 안치= 광개토왕은 후연의 모용희 격퇴, 백제군과 대륙기지의 초토화, 후연 붕괴 등으로 변방이 안정되자, 409년 거련巨連, 巨璉을 태자로 삼고 평양의 백성 들을 동쪽의 독산 등 새로 쌓은 6개성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왕릉의 축조 기술자를 집단으로 불러 모아 화진포 거북섬에 수릉을 축조하라 이르고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격려하기도 했다. 413년 광개토왕이 죽고 장수왕은 이듬 해 9월, 화진포 거북섬에 축조한 수릉에 부왕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광개토왕은 사후에도 편하지 않았다. 아들 장수왕이 왕릉에 수비대를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왕릉마저 신라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받았던 것이다. 신라와의 접경지역에서 잦은 시비가 벌어져 고구려에서 신라를 응징하려 했으나, 신라 눌지왕은 사자를 보내 사죄하고, 소지왕은 화진포의 광개토왕릉 수비대를 방문해 군복을 하사하며 화친을 구해 무마되기도 하였다. 이후 이러한 수모를 겪은 신라가 고구려를 점령했을 때 광개토대왕릉을 해체하고 수군기지로 삼았을 것이라는 가설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광개토대왕릉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호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연구가 오종철은 자신의 저서에서 왕릉 또는 왕비릉이 있는 곳은 끝자가 ‘忽’로 끝나는 지명이라고 주장하고 따라서 고성지방의 고구려 때 지명인 ‘달홀達忽’과 ‘가라홀加羅忽, 加阿忽’에는 왕릉이 있을 것이며 그곳이 바로 지금의 현내면 초도리 산1번지 거북섬金龜島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 양호하게 남아있는-한때 신라의 수군기지의 흔적으로 알려졌던-석성의 잔해는 능의 보호벽城과 방파성防波城의 흔적이며, 산정부근의 와편과 주초석의 잔해는 능의 사당이라는 것이다.
또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서》에 화진포의 거북섬이 ‘고성금구도성지高城金龜島城址’라고 표시하고 있는 것도, 광개토대왕비문에 나타난 주몽朱蒙 건국기에 ‘시조 주몽이 거북이의 도움으로 큰 강을 건너 고구려를 세웠다’는 것을 비추어보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은 팽창 정책을 지향해 국토를 크게 확장하는 데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이종상(1977),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책 217 페이지

ⓒ 강원고성신문

화진포 금구도 관련 여타 문헌과 해석들을 살펴보면,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금구도가 ‘초도고성草島古城’으로 명기되어 있는데 이때 초도草島는 초분草墳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고, 일제 때 조사자료인『조선 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금구도가 초도리 마을 동방 약 200간(368m)의 해상에 있는데 남아있는 석성의 외벽이 육지를 향하고 있어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라기보다는 내륙 침입자로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석성으로 보는 것이 맞다는 연구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문헌들을 바탕으로 좀 더 연구가 진행되어 이곳이 광개토왕의 능으로 밝혀진다면 고성뿐만 아니라 한국사에 또 하나의 역사적 의의를 확인하게 됨과 동시에 국내외적인 명소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필자 이선국 약력

-1957년 고성 출생
-고성고, 방송대 법학과 졸업
-2012년 수필가 등단
-고성군청 공무원 생활 40년
-전 고성문학회 회장(현 고문)
-현재 ‘물소리 시낭송회’ 회장
-저서 <지명유래지>, <고성지방의 옛날이야기>, <길에서 금강산을 만나다>

강원고성신문 기자  
“행복한 고성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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