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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숲으로 [33]

향토소설가 김담 연재 산문(散文)

2019년 11월 27일(수) 09:53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은빛 초승달이 서쪽 하늘에 떠올랐다. 빈 들에 바람이 일었고, 낙엽은 정처 없이 날아 내렸다. 힘지게 울어대던 방울벌레 울음소리도 어딘가 기운이 없는 듯 들릴락 말락 가날퍼졌다. 채 한 달이 안 되어 논들에 가을걷이는 끝이 났고, 이제는 논바닥에 깔아 놓았던 짚을 뒤집고 묶는 일이 한창이었다. 한두 번 더 산에 들어가야지 했던 계획은 그대로 계획으로 끝났으므로 일없이 큰 산 까치봉을 올려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 사이에도 비는 오다말다 겨울을 재촉했으나 올해 단풍은 바람이 적었던 덕분인지 오래도록 지며리 남아 있었다.
해는 어느새 노루꼬리만큼 짧아져서 오후 4시쯤 산책을 나서도 6시쯤 되면 벌써 주변이 어둑어둑해서 도로로 접어들 때는 플래시를 켜지 않을 수 없었다. 냇둑으로 올라서면 뱁새라고 불리는 붉은머리오목눈이와 개개비들이 왁자글왁자글 분주탕인데, 봄과 여름에 만났던 원앙과 물총새, 꼬마물떼새 등은 흔적조차 없었다. 그러나 전봇대를 올려다보면 파랑새가 떠난 자리에 부엉이가, 까막까치가 앉아서 울고 있었다. 가고 없는 것이 확연한데 미련스럽게도 내년 봄이면, 내년 여름이면 또 만날 것이라는 알지 못할 희망을 애써 키웠다.
그나저나 나뭇잎이 물드는 모양은 나무마다 잎마다 제각각이었다. 한 그루에서도 어느 것은 이르게 또 어느 것은 지르되게 물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색마저 서로 달랐다. 이번에는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싸리나무 이파리가 물이 드는 과정을 오가며 살폈다. 연노랑이 있는가 하면 샛노란 이파리가 있었고, 또 어느 것은 검노랑에 가까웠으나 이 모든 이파리는 한 그루 나무에서 비롯되었다. 싸리 빗자루를 만들지 않으면서부터 들판에 싸리나무는 무성해지고 또 흔해졌다.
매해 가을이면 싸리 빗자루를 두어 자루씩 만들어 마당비로 쓰곤 하던 우리 집 노인은 이제 늙고 노쇠해져서 빗자루를 만들 여력이 없었고, 내게 전수하였으나 나 또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집에는 pp(폴리프로필렌)로 만든 빗자루가 싸리 빗자루를 대신하고 있었다. 플라스틱이 강물로 흘러들어 마침내 바다를 오염시키고, 삭고 부서진 미세 플라스틱은 또 물고기들은 물론이고 인간까지 위협하고 있었지만 편리함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냇둑에서 먼저 본 것은 새품이었지만 뒤늦게 내를 뒤덮은 것은 갈꽃이었다. 새하얗게 빛나는 억새꽃과 달리 어둑한 다갈색인 갈꽃은 억새꽃만큼 환영받지 못했지만 해 질 녘, 저녁 빛이 사선으로 비껴들 때만큼은 강물에 비치는 윤슬만큼 투명하게 빛났다. 자리와 때에 따라 빛과 어둠이 스미고 섞이는 것처럼 햇빛이 없을 때는 그저 거무튀튀하게만 보이는 갈꽃도 빛에 따라 시시때때로 달라졌다. 또한 갈대숲은 붉은머리오목눈이와 개개비처럼 작은 새들이 둥지를 트는 장소이기도 했으며 근처 둑에는 부엉이 새끼 털처럼 부얼부얼한 사위질빵 열매가 저녁 빛에 물들고 있었다.
매일같이 길섶에 있는 소나무를 치어다보면서 걸었다. 한여름에는 밑동 주변으로 풀들이 우거져서 서너 걸음 밖에서만 보았으며 나무 그늘 속으로 들어가서도 노상 우듬지만 치어다보느라고 아래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소나무를 둘러싼 주변에 있는 논은 벼베기가 끝났고, 밭은 들깨 마당질이 끝났던 터라 소나무 그늘 아래로 스며들었다. 버릇처럼 서성서성하다가 눈길이 머문 곳은 고묵은 소나무 둥치 동쪽이었다. 내 허리께까지 솔보굿이 벗겨진 것도 모자라서 안에는 말벌이 집을 지었는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 말벌집을 떼어낸 모양이었다. 구멍은 수리부엉이가 들앉아도 될 만큼 크고 넓었다. 매일매일 만나고 스쳤는데도 정작 나무 둥치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눈앞에 있었는데도 보지 못했다.
파랑새가 깃들곤 하던 상수리나무 숲도 단풍이 들기 시작했는데 동쪽에 있는 나무들이 먼저 노란 물이 들었고, 서쪽에 있는 나무들은 여태도 새파랬다. 아름드리나무들이 길게 늘어선 사이에 오동나무와 밤나무, 심지어 고욤나무가 함께 있었다. 고욤나무 가지는 길섶에서도 손이 닿았으므로 이즘엔 잘 익은 고욤을 따먹는 일로 고심하고 있었다. 팔이 닿는 곳에 있는 열매를 서너 알 따서 먹곤 했는데 때때로 산책이 끝날 때까지 고욤의 떫은맛이 입속에 서 가시지 않았다.
우리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았는데, 그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것 하나가 늦가을이면 고욤을 따서 항아리에 담아 재워두는 것이었다. 한겨울 눈이 푹푹 내려 쌓이면 어린 나는 대접에다 이것을 떠서 아랫목에 배 깔고 엎드려서 숟가락으로 퍼먹곤 했다. 씨가 많은 것이 성가시긴 했어도 그 달곰한 맛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반면 우리 할아버지는 고욤나무를 감나무 접을 붙일 때 쓰곤 했다. 마을에는 열매를 맺는 고욤나무가 서너 그루 있었지만 누구의 눈길도 받지 않아서 새떼들은 자주 이 나무로 몰려들곤 했다.
마을 서쪽에 있는 논둑은 봄부터 줄곧 산책길로 이용하고 있었다. 논둑은 제초제 세례를 듬뿍 받을 때로 있었고, 예초기에 바싹 깎일 때도 있었지만 다른 길로 돌아가지 않고 부득부득 이 논둑으로만 갔다. 그랬던 덕분에 보풀도 만났고, 물달개비풀도 만날 수 있었다. 요즘엔 도깨비바늘과 별꽃아재비, 강아지풀, 방동사니들을 볼 수 있었는데 문제는 도깨비바늘이었다. 이 도깨비바늘은 하루도 빠짐없이 바지에 들러붙었다. 바늘처럼 생긴 열매 끝에 창 모양의 까끄라기는 힘도 세서 손으로 잡아떼도 잘 떨어지지 않았고 미세한 가시가 남아 있기 일쑤였다. 걷다가 어딘가 따끔거려 살펴보면 틀림없이 도깨비바늘이었다.
들판에는 산국마저 벌써 이울었는데 무슨 까닭인지 개망초가 무리지어 피어났고, 간간이 노란 민들레도 볼 수 있었다. 서리가 내린 뒤여서 고추밭에 고춧대들도 시커멓게 변했는데. 여름이면 떼판을 이루던 개망초를 바라보는 마음은 여러 갈래였다. 이제는 누구도 쉽게 개망초의 기원 따위를 읊조리지 않았지만, 늦가을에 다시 핀 꽃을 보고 있노라면 어딘가 애잔한 구석이 있었다. 개망초는 북미 원산인 귀화식물이었으며 ‘왜풀’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었고, 북한에서는 ‘돌잔꽃’이라고 불린다고 알려졌다. 누군가는 달걀꽃이라고도 불렀고.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같은 귀화식물인 망초는 개망초보다 한 달가량 늦게 피었는데, 늦가을에 다시 꽃을 피우는 망초는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둘 다 국화과였다.
뭉근히 타오르기 시작한 단풍이었지만 큰 산 까치봉은 까치가 아니라 민머리독수리라도 된 듯 나뭇잎은 다 져서 무채색이 되었다. 산골짜기에서 시작한 단풍은 이제 산마루에서 내려와 마을 둘레에만 남았다. 벚나무 가로수들은 봄에는 꽃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삭막했던 길을 물들여서 전에 없이 볼만한 풍경이 되었다. 올해는 또 지난해와 달리 큰 바람이 불지 않았던 덕에 단풍이 제풀에 떨어질 때까지 오래 머물렀다.
저녁거미가 내린 뒤 주변이 어둑어둑해서 간신히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즈음 앞산 솔수펑이에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앞산과 북쪽 숲정이 사이를 오가는 수리부엉이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어느 날은 부엉이가 울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부엉이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므로 부엉이 울음소리가 이끄는 대로 앞산 가까운 데로 걸음을 옮겼다. 앞산과 나 사이에는 냇물이 흘렀지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쓰는 사이 부엉이가 먼저 내 쪽에 있는 전봇대 꼭대기로 날아들었다. 그런 뒤에는 꼼짝도 않고 가만히 앉았다.
어느 날은 아주 가까운 냇둑에 있는 것을 모르게 엄벙덤벙 걷다가 눈앞에서 날아오르는 부엉이를 만났고, 또 어느 날은 숲 정수리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부엉이를 먼발치에서 지켜볼 때도 있었지만, 점점 어두워가는 주변 때문에 간신히 형체만 알아볼 수 있었던 부엉이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나 또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앞산 츠렁바위 부근에서 낮잠을 자는 수리부엉이를 본 뒤로 수리부엉이가 텃새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은 보였고, 또 어느 날은 깜깜소식었다. 그런데 수리부엉이는 왜 울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던 것일까.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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