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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숲으로 [24]

향토소설가 김담 연재 산문(散文)

2019년 06월 12일(수) 09:41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얼었던 땅이 풀리고 계절이 바뀌면서 사람은 가고 없어도 한해 농사는 시작되었다. 감자를 심고 볍씨를 파종했다. 난데없는 폭염이 이어지면서 못자리에 모종들이 상하고 망가졌으나 마을 논들은 대부분 모내기를 마쳤다. 하지만 골짜기 다락논들 가운데 아직 모내기를 하지 못한 곳이 더러 있었다. 봄가물이 길어지면서 텃밭에 심은 고추와 가지 등에 아침저녁 물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산 기스락 빈 터에 어린나무를 옮겨 심은 뒤 한동안 가보지 못하는 사이 나무 몇 그루는 새빨갛게 타 죽었다.
그렇더라도 5월 숲 기스락엔 찔레꽃 덩굴이 울멍줄멍 피어서 벌떼를 불러 모으고 있었으며 냇둑에는 붉은 해당화가 벌써 피어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눈 가는 곳마다 꽃밭 아닌 곳 없었으나 새해 벽두에 날벼락 치듯 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는 병상에 누워 눈물을 훔칠 뿐이었다. 떠난 이가 짓던 농사를 절반으로 줄였어도 어쨌든 농사는 지어야 했고, 아들과 함께 농사를 짓던 아비는 이제 혼잣손으로 고추를 심고, 논을 갈아엎었다. 때늦은 후회가 노상 발목을 잡는 법이었지만,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다.
올해 우리집은 텃밭엔 가지와 호박, 고추만 심었다. 오래도록 애정을 쏟던 토마토는 심지 않았다. 매해 작은 텃밭에 토마토 모종을 심었으나 무슨 이유인지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부실했기 때문이었다. 토마토 가지와 줄기가 거의 내 키 만하게 자랐다. 비료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러했다. 토마토는 가짓과 반덩굴성 식물로 남미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다시 아시아로 떠나는 그 긴 여정 가운데 우리에겐 17세기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전해진다. 요즘은 방울토마토라는 요상한 이름으로 불리는 매실만한 토마토뿐만 아니라 그보다는 좀 더 큰 검은 토마토 등 종류도 꽤 여러 가지였다. 그렇더라도 내겐 어릴 적 먹던 어른 주먹만 한 토마토가 여전히 귀했다.
우리집 노인이 밥상머리에서 흔히 하는 말로 옛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옛 맛이 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아주 당연했다.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작물의 종자가 다 바뀌었는데 맛이 같으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일 것이었다. 야생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인간의 품에 안겨 가축과 작물이 되는 순간, 동물은 물론이거니와 식물 또한 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인간의 처지에서는 또 인간의 처지에 맞게 동.식물을 길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식으로 하루 세끼 아니 하루 한끼 먹는 쌀도 어제 먹던 그 쌀은 아니었다. ‘생명 공학’이라는 그럴 듯한 말로 바뀐 ‘유전자 조작’은 쌀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작물이 단일화되면서 자주 언급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1845년에서 1850년에 있었던 아일랜드 기근이다. 남미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감자가 한동안 아일랜드 사람들을 먹여 살렸으나 감자 역병이 돌면서 백만 여명이 사망하고, 백만 여명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작물 하나가 세상을 바꾼 것이었다. 우리는 계절과 지역에 상관없이 필리핀에서 온 씨 없는 바나나, 칠레에서 온 포도, 미국에서 온 오렌지와 노르웨이에서 온 고등어와 세네갈에서 온 갈치 그리고 우리집 텃밭에서 자란 토마토 등을 매일같이 식탁에서 만났다.
또 하나 문제는 우리나라 토종 작물에 대한 권리가 대부분 다국적 기업이 있다는 것이다. 아이엠에프, 즉 구제금융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나라 상위 5대 종자회사 가운데 4개가 다국적 기업들 손에 넘어갔다. 이를테면 우리가 흔히 매운 고추라고 알고 먹는 청양고추는 우리나라 중앙종묘에서 개발했지만, 구제금융 당시 중앙종묘가 멕시코 다국적 종자회사인 세미니스에 팔렸고, 이후 이 세미니스를 몬산토에서 사들이면서 종자에 대한 권리는 다국적 농산기업인 몬산토에 있음으로서 우리는 매일 로열티를 지불하면서 고추를 먹고 있는 셈이다. 파프리카, 토마토 등도 말할 것 없다. 여러 다국적기업들이 인수 합병되면서 현재는 몬산토 종자 일부를 LG그룹의 팜한농이 소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가운데 토마토 종자 1g 당 12만원에 거래되기도 한다니, 흔한 말로 금값보다 비싸다.
인간이 편하자고 작물의 유전자를 바꾸고, 자연에서 얻은 권리를 소유 독점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우리 속담에 농부는 죽어도 씨오쟁이는 베고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제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과일 즉, 열매에 씨앗이 없는데 어디서 씨앗을 구할 수 있겠는가. 우리 마을은 삼월 중순이면 논밭갈이가 시작되는데 밭은 대부분 감자를 심기 위해서였다. 강원도하면 감자로 통했지만, 요즘은 제주도 감자가 강원도 감자보다 먼저 시장에 나왔다. 그런데 이 씨감자 또한 농협을 통해 공동 구매했다. 늙은 농부들이 집에서 먹을 감자를 얻기 위해 종자를 건사하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극히 드물었다. 수확한 감자 또한 재래시장보다는 농협에서 한꺼번에 수매를 했으므로 농협에 먼저 내다팔았다.
식물의 90%는 종자식물이다. 주식인 쌀을 생산하기 위한 볍씨 종자는 농협을 통해 구매했고, 고추며 토마토 상추와 같이 흔히 텃밭에 심는 작물들은 모두 시장에서 모종 형태로 팔고 샀다. 그러니까 이제 집에 씨앗, 즉 종자를 보관하는 농부는 없었으며 농작물 씨앗은 죄다 종자회사에 있었고, 우리는 이것을 종자 형태든, 모종 형태든 필요에 따라 구매를 해야 했다. 경작지가 커지고, 농기계 또한 대형화되면서 무엇이든 크게, 크게 하다 보니 작은 것들은 뒤로 밀렸고, 경작지는 단일종으로 도배됐다. 다양성이 힘이라는 걸 곧잘 잊었다.
요즘 중국과 미국의 무역 분쟁 한가운데 있는 농산물이 바로 콩이다. 콩은 우리나라와 만주 등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콩을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다. 돼지 먹이용으로. 그런데 중미 무역 분쟁이 심각해지면서 중국은 미국에서 사들이기로 한 콩에 높은 관세를 물리는 것은 물론이거나 아예 수입을 중단하기에 이른 것이다. 콩이 무역 분쟁에 무기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식탁에서도 두부와 식용유로 아침저녁으로 만나고 있지만 이 또한 대부분 수입 콩에 의존하고 있다. 이 수입 콩 대부분이 유해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유전자 조작(GMO) 콩이다. 음악을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해서 음악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우리 아버지가 농사를 짓던 젊은 시절엔 모든 곡류의 종자를 집에 보관했고, 봄철이면 이것으로 싹을 틔웠다. 고구마 감자, 콩 등은 말할 것도 없었고, 볍씨는 새와 쥐들을 피해 헛간 깊은 곳에 고이 보관했다. 농사에서 육종과 화학비료가 인류를 굶주림에서 구했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육종이 아니라 식물과 동물 유전자를 재결합시켜 새로운 식물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세상에 없던 토마토를, 감자를 먹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 야생에 있던 종자를 그러모으고 있다. 씨가 있던 야생 바나나를 씨가 없는 바나나로 만들면서 이 바나나들은 바이러스에 취약해졌다. 전염병이 돌면 한꺼번에 전멸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또 인간은 기후 변화와 핵전쟁, 천재지변 등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종자 저장고를 만들었다. ‘최후의 날 저장고’ 라고도 불리는 노르웨이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가 그 예인데, 이 저장고는 영구 동토층에 세워졌으며 2018년 현재 100만여 점에 이르는 작물 씨앗을 보관 중이고, 그 가운데 벼, 기장 등 우리나라 종자도 1만 3천여 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엔 경상북도 봉화군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도 ‘시드볼트’라는 저장소가 있다. ‘시드볼트는 세계 각국의 종자를 영구적으로 저장하기 위하여 조성되었으며, 지하 46m 터널형 구조로 영하 20℃, 상대습도 40%를 유지하며, 종자 200만점을 저장할 수 있는 시설’로 한반도 주요 야생 식물 종자 288점을 비롯 46만개의 종자를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앞으로 200년 동안 지구의 모든 천재지변을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가 세워진 영구 통토층이 급격한 기후 변화로 녹아내리면서 2017년에는 저장고 입구가 침수되는 일이 벌어졌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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