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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숲으로 [26]

향토소설가 김담 연재 산문(散文)

2019년 08월 02일(금) 07:44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수성샘터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구불구불한 임도(임산도로林産道路의 준말)를 따라서 걸었다. 길은 탱크도 지나갈 만큼 넓고 잘 다져져 마치 옛날 신작로를 보는 듯했다. 임도이면서 군사도로처럼 보였는데 그것은 길가에 토치카, 즉 참호와 교통호 그리고 군 통신시설들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이곳 고성은 접경지역이므로 군사시설은 눈에 익었지만 참호를 곁에 두고 걷는 걸음에는 불가침 지역에 몰래 스며든 듯한 긴장감이 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 큰길에는 오전인데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길가에는 승용차만 두 대 서 있었을 뿐이었다.
메숲진 솔숲에는 솎아베기를 한 듯 가지들이 늘비했다. 나뭇잎들이 시뻘겋게 말랐는데도 자른 나무와 나뭇가지를 모아 놓지 않았다. 가지치기를 한 소나무들을 보면서 ‘아보리스트arborist’를 떠올렸다. 그동안 잘못된 가지치기로 인해 나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놀민놀민 걸으면서 길섶에 소나무들을 훑듯 보았는데도 제대로 가지를 친 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나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원인으로 지목된, 가지를 길게 남기거나 또는 지나치게 짧게 자른 모습들이 곳곳에서 갈신거렸다. 줄기와 가지 사이의 간격이 길거나 짧아서 부후균, 그러니까 균에게 먹이를 제공함으로써 줄기가 썩어 들어갔고, 마침내 나무를 제 수명대로 못살게 수명을 재촉했다.
인위적인 가지치기는 나무에겐 생살이 찢어지는 아픔일 테지만 나무는 또 나무대로 제 상처를 보듬고 삭이며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데 그 또한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나뭇가지를 자를 때 나무 스스로 상처를 얼싸안아서 치료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면 안 되는 것이었지만 인간은 나무의 상처에는 또 관심이 없었으므로 길게도 자르고 짧게도 잘랐던 것이다. 아니 ‘두절’이라고 하여 아예 나무줄기를 잘라내기까지 하였으니 나무가 제대로 자랄 리 없었지만 이 또한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가로수가 엉망진창인 까닭이었다.
숲 입새에선 흰 빛깔의 까치수염이 반기더니 길 중간에선 누런 고라니가 멈칫멈칫 길을 가로질렀다.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운 가운데 길섶 비탈진 곳엔 주황빛 중나리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며칠 전 건봉사에 다녀오는 길에서도 활짝 핀 중나리를 보았지만 꽃들은 언제든 반가웠다. 백합과의 여러 나리들 가운데 애기나리는 벌써 꽃이 졌고 참나리는 아직 일렀으며 말나리와 하늘나리들은 우리 동네에서는 만날 수 없었으므로 무엇보다 크지도 작지도 않으면서 숲속을 환히 밝히는 꽃등 같았으므로 만날 때마다 안녕! 안녕! 인사를 건넸다.
연보랏빛 노루오줌도 피었다. 산마루 부근에 이르러서야 산은 급하게 가팔라졌지만 길은 까다롭지 않아 동무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기에 알맞았다. 운봉산 등과 같이 화산체로 이루어진 고성산은 산꼭대기에 이르러서야 운봉산에서 보았던 검은 화산돌들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수타사터 방면으로 내려오다 보면 담쟁이덩굴에 뒤덮인 너덜지대를 만날 수 있었다. 인간의 역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어느 시절에 화산이 폭발했고, 그 화산의 흔적을 또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할 수 있었다.
산마루에는 주민들이 새로 만들어 놓은 봉수대며 감시탑과 전망대가 있어 산꼭대기라기보다는 마치 너른 운동장처럼 보였다. 낡고 썩어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 이층전망대에 섰다. 해발 삼백 미터가 되지 않았지만 사방이 훤해서 가까이는 차잠바위며 북쪽으로는 향로봉이 동쪽으로는 간성과 가진 그리고 동해가 바싹 다가들어 손에 잡힐 듯했다. 새소리마저 없는 적막한 전망대를 독차지하고 앉아서 주변에 나무들을 바라다봤다. 차잠바위를 좀 더 가까이 볼 수 있는 아래 전망대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샘물이 있는데, 가뭄을 타는지 물이 시원치 않았다.
고성산은 예나지금이나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하는 듯 차잠바위로 가는 등산로 근처에 화산돌로 쌓은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산꼭대기에 서면 사방천지가 거칠 것 없이 훤히 내다보였기 때문이었다.
길은 여러 갈래였으나 수타사터 쪽으로 길을 잡았다. 처음부터 가파른 나무계단이 발목을 잡았다. 사람 발길 뜸한 사이 낡은 계단 틈에는 풀들이 자라 계단도 잘 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습기도 더해 날벌레들이 눈앞을 어지럽혀 조심스레 계단을 밟으며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임도와는 다르게 나무들이 거의 넓은잎나무였으므로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따금 아름드리 소나무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쪽동백나무며 서어나무, 산벚나무들이 숲정수리를 이뤘다. 암자터에서는 샘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고, 개다래 꽃을 기웃거리면서 개다래의 생존방식도 가만히 훔쳐보았다.
밭 가장자리에 서 있는 낡삭은 석탑을 보고 돌아서는 길이었다. 마당에 감자가루를 널어놓았고, 텃밭에서는 어르신이 김을 매고 있었다. 산을 등지고 앉은 집 앞에는 사래 긴 밭이 있었으며 밭둑 너머엔 시냇물이 흘렀다. 석탑은 시냇물과 제법 높은 밭둑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제초제를 친 주변은 매끈했지만 시냇가엔 갈대가 무성했다. 때를 알 수 없는 어느 시절에 세워졌을 석탑은 기단부에 조각이 남긴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있었으나 탑은 삼층인지, 오층인지도 모르는 채 상륜부도 없는 사층석탑으로 서 있었다. 그마저도 비바람에 낡고 삭아서 탑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고 곳곳에 흠이 생겼다.
시간 앞에서는 누구라도 작고 작아지는 것이었으나 변치 않을 것 같던 석탑마저 닳아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갖가지 상념이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찰나, 시내 건너편에서 개가 짖어대기 시작했다. 석탑을 둘러싼 밭에는 고추와 모종을 내기 위해 부은 들깨가 막 싹을 틔우고 있었다. 석탑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그물 울타리를 지나야 했으므로 김을 매고 있던 어르신께 허락을 얻었다. 산골짜기였고, 짐승들이 인간의 밭과 자연의 숲을 구별할 리 없었으므로 아무렇지 않게 여겼으나 외려 어르신께서는 짐승들 때문에 울타리를 쳤노라고 덧붙였다.
마당에 널어놓은 가루를 보는 순간 감자가루를 떠올렸지만 긴가민가하여 손으로 직접 만졌더니 요즘은 흔히 볼 수 없는 ‘감자갈기’, 감자가루였다. 노인께 감자가루네요, 했더니 김매던 어르신이 고개를 들었다. 나이가 몇인데, 감자가루를 아느냐고. 한여름 장마철이면 할머니는 감자가루를 익반죽하여 소로 강낭콩을 넣고 송편 모양으로 빚은 감자떡을 무쇠솥에 겅그레를 얹고서 쪘다. 쪄낸 다음 바로 들기름을 발라 입천장을 데는 줄도 모르면서 먹던, 거무튀튀한 감자떡은 눅진눅진해서 찌뿌드드하던 한여름에 만나는 별미였다.
감자가루는 손이 많이 가는 식재료였다. 하지감자를 캐고 나면 지스러기와 호미 날에 찍힌 감자 등을 항아리 넣고 여름내 썩혔다. 가을걷이를 끝낼 무렵이 되어서야 감자 항아리에 손이 미쳤다. 우물가에 줄느런히 있던 감자 항아리에선 여름내 썩은 내가 진동했지만 누구도 쉽게 불평하지 못했다. 썩힌 감자를 어레미로 걸러 껍질은 버리고, 앙금만 다시 대야에 넣고 물을 넉넉히 잡고서는 몇 날 며칠 아침저녁으로 물을 갈아주면서 쿠릿한 냄새를 우려냈다. 구린 냄새가 다 가셨다 싶으면 이번에는 이물질을 걸러내고 나서 물을 지운 뒤 보드라운 앙금만을 도래방석 등에 광목 보자기 등을 펴고서는 맑은 볕에 몇 날 며칠 말렸다.
어르신과 헤어져 덜레덜레 산을 등지고 걸었다. 걸으면서 자꾸 뒤를 돌아다봤다. ‘조상답’인 지금의 논밭을 일굴 때 기와는 물론이거니와 발방앗간터에서 돌확도 나왔으며 옆 골짜기에서는 ‘앉은 부처’님도 나왔다는데, 그리고 고성산 산마루 사이에 샘터와 암자터가 있었으니 석탑 아래 안내판 내용처럼 절터였을 터인데, ‘수타사터’ 전설이 전해져 오기는 했지만 그곳에 있었을 절의 생몰연대는 여전히 미궁이었으니. 탑동의 폐사지는 또 어떻고.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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