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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숲으로 [44]

향토소설가 김담 연재 산문(散文)

2020년 08월 04일(화) 03:20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장끼가 날아올랐다. 감자밭에 감자꽃이 필 무렵부터 산 기스락 묵정논에 꿩과 멧비둘기가 떼를 지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멧비둘기들은 떼를 지어 날아올랐으므로 그다지 놀랍지 않았으나 꿩, 특히 수컷인 장끼는 느닷없이 호들갑스럽게 날아오르면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날아가면서도 꺽꺽거리는 울음소리는 요란하고 드높아서 저절로 얼굴이 째푸려졌다. 그러나 울음소리를 지운 장끼만 보면 금속광택의 그 화려하고 현란한 깃털 색깔에 눈이 휘둥그레지곤 했다. 적갈색의 몸 깃털과 청동색의 목, 붉은 빛깔의 머리를 보면서 일부다처제인 날짐승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암컷인 까투리는 수풀 속에 내려앉으면 있는 듯 없는 듯 수수해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꿩의 새끼는 ‘꺼병이’라고 불렀다. 어릴 때 보았던 길창덕 만화 제목은 ‘꺼벙이’였다. 눈이 깊이 내리는 한겨울이면 삼촌과 오빠들은 꿩 사냥 준비에 몰두했다. 날짐승이었으므로 올무 대신 콩에 타래송곳으로 구멍을 뚫고서는 ‘싸이나’라고 부르던 청산가리를 넣었다. 많이 넣어도 안 되었고, 적게 넣어도 안 되는, 적당량을 넣어야 했는데 그 까닭이 따로 있었다. 청산가리를 많이 넣으면 독이 퍼지는 속도가 오래 걸렸고, 적게 넣으면 독이 효과가 없었으므로 꿩이 콩을 먹고 곧바로 근처 어딘가에 떨어져야 뒤쫓아서 잡아챌 수 있었으므로 그리하여 청산가리의 양 조절이야말로 꿩 사냥의 사북이었다.
꿩 사냥으로 얻은 꿩은 느루먹기 위해 국을 끓였다. 닭으로 끓인 닭국과 함께 한겨울 어쩌다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별식이었다. 지금은 아무도 꿩 사냥을 하지 않아서 꿩들은 이 골짝 저 골짝에서 거칠게 울어대곤 했다. 해 질 녘 비둘기 울음소리가 멀고 아득하게 들리는 데 비해 발치에서 날아오르곤 하는 장끼의 울음소리는 몹시 귀거칠었지만, 투실투실한 몸으로 날개를 활짝 펼친 채 제 몸 숨길 곳을 향해 날아가면서도 꺅꺅꺅 거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수풀 사이로 내려앉은 뒤에는 또 부스럭거리면서 설설 바닥을 기어가는데, 이 또한 웃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샛노란 금계국과 달걀꽃이라고도 부르는 개망초가 함께 어우러져 꽃을 피우고 있는 둑길을 걸어나가면 모내기를 마친 논들에는 왜가리와 백로들이 논배미에 내려앉아 먹이 사냥을 하며 어정거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 새들은 어찌나 귀가 밝은지 인기척이 들리지 않을 만큼 먼 거리라고 어림짐작한 곳에서 걸음을 멈추어도 귀신같이 알아채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날갯짓이 굼뜬 듯 보였지만 새들은 순식간에 하늘 높이 떠올라 어느 쪽으로든 떼를 지어 날아갔다. 백로 떼 속에 왜가리는 섞여 있었으나 왜가리 속에 백로들 모습은 흔히 볼 수 없었다. 크고 작은 흰색의 백로들은 어디서든 눈에 잘 띄었다.
검은등뻐꾸기와 휘파람새가 돌림 노래를 하듯 울고 있는 동안 산 기스락에는 초롱꽃이 피었으며 줄딸기와 뽕오디가 익고 있었다. 물까치 떼가 따먹고 남은 줄딸기를 한 알 한 알 조심스럽게 따서 한입에 털어 넣고서는 다시 또 까치발을 하고서는 덩굴식물인 줄딸기의 줄기를 잡아당겼다. 줄딸기 줄기는 가시가 돋았으므로 자칫 잘못하면 가시에 상처를 입을 수 있었고, 또한 청미래덩굴과 마, 국수나무 등이 뒤엉켜 있었으므로 배암이라도 만날까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달면서도 시금한 딸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날짐승들 외에는 아무도 손대지 않았으므로 서너 움큼을 따서 먹고서는 자리를 뜨곤 했다. 걸으면서도 잇새에 낀 씨앗 때문에라도 딸기는 검질기게 나를 따라왔다.
아까시 꽃이 비바람에 시름시름하며 진 자리 아래에는 금은화라고도 부르는 인동초가 피어코끝을 간질였다. 꽃은 흰색으로 피어서 노랗게 바뀌면서 시나브로 지곤 했다. 아까시 꽃이 미처 다 만개하기도 전에 비바람으로 흩어지는 바람에 올해 아까시 꿀 수확이 신통치 않다는 소식이 바람결에 들려왔다. 마을엔 서너 농가가 벌을 쳤고, 벌통은 집 근처에도 있었고 산골짝에도 있었다. 내겐 어릴 적 할아버지가 밤나무 밭에 놓았던 벌통에서 얻었던 불그스름하던 밤꿀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꿀을 뜨고 남은 밀은 떡을 만들 때 썼다. 우리집에서는 미지라고 부르는 밀은 굳는 성질이 있어서 겨울에는 화롯불에 녹여서 떡에 바르곤 했다.
손길이 굼뜬 젊은 농부의 논둑은 풀을 베지 않아서 온통 토끼풀과 지칭개, 개망초 세상이 되었다. 제초제를 치지 않아서 모내기가 끝난 뒤에도 논둑은 꽃밭 천지가 되었으나 늙은 농부들의 빤빤하게 풀을 벤 논둑에 익숙한 나는 쪼그리고 앉아서 꽃들을 구경하면서도 어딘지 편치가 않아서 자꾸 고개를 갸웃거렸다. 때때로 안타까운 것은 논둑에 제초제를 지나치게 쳐서 논둑의 풀들이 시뻘겋게 타들어 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제초제를 친다고 풀이 돋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 풀을 깎는다고 풀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랬으므로 임시방편일 뿐이라는 생각은 끈질겼고, 그런 만큼 ‘풀약’은 조금 덜 쳤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 않았다.
풀약 친 논둑을 제겨디디며 건너가면 봇도랑길에 떼판을 이룬 미나리아재비를 볼 수 있었다. 흔히 볼 수 없게 된 식물 가운데 하나로 노란 빛깔의 꽃잎은 마치 광택제를 바른 것처럼 윤이 났다. 마을 어르신에 따르면 이 미나리아재비는 새싹일 때 나물로 먹는다는데, 책으로 미나리아재비를 배운 내게는 유독 식물일 뿐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싸리버섯과 닮은꼴인지도 몰랐다. 버섯을 채취하는 이들이 하나로 뭉뚱그리기도 하는 싸리버섯도 각각이 고유하며 각각이 달랐다. 그런 까닭에 특히 싸리버섯은 삶아서 하루쯤 물에 우린 뒤 먹으라고 권했다. 삶아서 곧바로 먹은 뒤 배탈을 경험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곡선이 직선을 내재하는 것처럼 식물에도 독은 필연일 것이었다.
뻐꾸기가 나른하게 우는 동안 샛노란 꾀꼬리가 눈앞에서 날아올랐다. 마을 윗녘에서 보았던 새였는지 알 수 없었으나 꾀꼬리는 아랫녘 숲정이로 사라졌다. 저녁 빛을 받으며 날아가는 꾀꼬리는 그 샛노란 황금빛으로 인해 더욱 눈에 띄었다. 울음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마치 저기요, 저기요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해서 쉽게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고구려 유리왕이 지었다는 ‘황조가’를 떠올리는 것은 그래서인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꾀꼬리는 그 몸통 깃털만으로도 보기 좋았으나 꾀꼬리는 여름새였으므로 한철만 마을에 머물다 떠날 것이었다. 어쩌면 떼로 몰려다니지 않아서 반가운 새인지도 몰랐다.
줄딸기를 먹었으니 뽕오디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아랫녘 논들까지 바람을 안고 걸었다. 날씨는 한여름 뙤약볕을 방불케 뜨거웠으나 뽕오디를 먹을 수 있다는 기대에 발걸음은 사뿐 가벼웠다. 약초를 캐시던 마을 어른들이 거의 작고하신 까닭에 인동초가 피어도, 익모초가 자라도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이른 봄 고비를 팔러 시장에 나가신 어머니께서 젊은이들은 고비보다는 고사리를 선호한다고, 고비를 먹던 늙은이들이 다 죽은 까닭이라고 아쉬워하시던 말씀을 떠올렸다. 고비와 고사리는 봄철에 나는 산나물로 주로 묵나물로 먹었다. 제사상에 올렸고, 우리 지역에서는 고사리보다는 고비를 더 값을 쳐주었다. 올고비는 어른 새끼손가락만큼 통통하니 맛도 부드러워서 입이 달았다. 입맛이 바뀌는 것이야 돌이킬 수 없다고 해도 사방에 널린 약초들이 그대로 스러지는 것은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까치 떼가 눈앞을 어지럽혔다. 봇도랑과 산 기스락 사이에는 줄딸기가 새빨갛게 익었고, 보라색 석잠풀이 꽃을 피웠으며 고사리는 벌써 쇠서 이파리가 너풀거렸다. 참나리가 키를 키우고 있었으며 돌복상이 익어가고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서너 발자국 옮긴 자리에 뽕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물까치 떼는 제풀에 놀라 혼비백산하여 순식간에 숲정이로 사라졌다. 뽕나무에는 뽕오디가 익어가고 있었으나 선녀벌레로 알려진 좁쌀만 한 벌레들이 하얗게 진을 쳤다. 해충이었지만 익은 뽕오디만을 골라서 땄다. 입은 냠냠거렸고, 손바닥은 시뻘겋게 물들었다. 하마 봄이 다 갔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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