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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의 성[9]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9] / 삽화 윤광자 화가

2020년 08월 04일(화) 03:35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평양 감사는 외국인들을 집에 들이지 말라는 금령을 내렸다. 닥터 홀은 자신이 돈을 주고 산 집이기는 하지만 금령을 어기면서까지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 집 가까운 여인숙에 묵었다.
어느 날 닥터 홀이 여인숙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여관에 있던 조선 손님들은 그가 마시는 게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해 한번 마셔보자고 했다. 조선은 차를 잘 마시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데도 사람들은 차를 자주 마시지 않았다.
그는 조선 사람들과 친해질 기회라 생각해서 홍차에 설탕을 타서 주었더니 맛있다며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마셨다. 연유에도 설탕을 타서 주었더니 맛있다고 하며 무엇으로 만들었냐고 묻기에 소젖으로 만들었다고 하자 금방 역겨워하며 잔을 내동댕이쳤다.
“에이 더러워! 소젖을 어찌 사람이 먹는단 말인가? 우리는 그런 것은 마시지 않소!”
그들은 못 먹을 것을 먹은 것처럼 토하듯 왝왝거리며 침을 뱉고는 떠나갔다. 닥터 홀은 문화와 식습관까지 다른 현실을 극복하며 그들 곁에 다가가는 일이 쉽지 않음을 다시 느꼈다.
얼마 후 닥터 홀은 기생 학교를 폐쇄하고 집에 입주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조선말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조선어 선생으로 데리고 온 노 씨와 함께 입주하였다. 입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20여 명의 사람들이 노 씨를 찾아와 큰 소리로 말했다.
“평양의 풍속은 각자의 경제사정에 알맞게 ‘평양의 신’에게 공양을 해야 되는 법이오. 당신은 큰 도시 서울서 왔고 저 의사도 서양에서 왔으니 우리 신들에게 더 많은 돈을 공양할 수 있을 것이요. 그러면 우리의 신들이 당신들을 보살펴서 여행길도 순탄할 것이고 이곳에 사는 것이 평안할 것이요. 어서 저 서양에서 온 양반에게 통역해 주시오.”
노 씨는 처음에 통역을 거절하였으나 궁금해하는 닥터 홀을 더 이상 속일 수 없어 통역하였다. 그들의 말은 알아들은 닥터 홀은 온화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들의 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 돈을 내지 않겠소. 우리는 진정한 신, 곧 당신과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도 그분을 믿게 되길 바랍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대단히 화가 났다. 모두 밖으로 나갔으나 몇 분 지나지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소년 하나를 데리고 와서 닥터 홀이 보는 데서 소년의 옷을 찢고 때리고 노 씨까지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면서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너희를 때리는 게 아니라 우리 신이 주는 벌이다.”
노 씨는 훗날 「성인 하락전(聖人 賀樂傳)」이라는 글을 썼다. 하락은 ‘홀’을 중국식 발음으로 표기한 글자이며 한국식으로 읽으면 ‘하락’이 된다. 그는 믿음이 약했던 시절의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아래와 같은 닥터 홀은 회고하는 글을 썼다.

“그들은 나를 한동안 심하게 때린 후 놓아주었다. 닥터 홀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하였다. 나는 분을 참을 수가 없어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닥터 홀은 내 마음을 진정시키며 성 바울도 죄도 없이 수없이 매를 맞은 것을 성경에서 읽어보지 않았느냐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위로하려 했다.
“성 바울이 어찌했건 내가 알바가 아니요. 계속 예수를 믿는다고 당신을 따라다니다가는 내 몸이 성치 못할 거 같아요. 내가 죽은 후에 아무리 좋은 데로 간들 살아서 이런 고통을 당하니 무슨 소용이 있겠소.”
닥터 홀은 부드럽게 나를 감싸 안으며 기도를 하자고 했다. 나는 분이 풀리지 않아 기도할 수가 없다고 했다. 닥터 홀이 나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도 많이 속상했겠지만 사랑과 인내로 나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닥터 홀이 기도한 후 이상하게 분하던 내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잠시 후 함께 매를 맞았던 소년이 돌아왔다. 닥터 홀은 소년의 다친 다리를 치료해 주고 찢어진 옷값을 치러 주었다.
“형제여, 선한 일을 하다가 곤욕 당한 일을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나자 닥터 홀에게 화를 냈던 내 자신이 몹시 부끄러워졌다.”

이 일이 있고 난 뒤에도 사람들은 가끔 벌떼처럼 몰려와 닥터 홀을 힘들게 하였고 밤이면 가끔 돌팔매가 빗발치듯 날아들어 문도 열어 놓지 못했다. 그래도 닥터 홀은 그들에게 대적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였다. 강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얼음조각 위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선교위원회에서 이 같은 수난을 알게 되었는지 닥터 스크랜턴은 봄이 되면 평양에 닥터 홀 가족이 거주할 수 있는 서양식 집을 지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서양식 건물을 짓는 일로 평양 주민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조선식 건물에서 살아야 평양 사람들과도 가까워질 수 있고, 서양 야만인이 침입해 온다는 인상을 덜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직도 수십 년 전에 겪은 양요 사건으로 척화비를 세우고 서양인들을 경계하며 서양인을 ‘서양 야만인’이라 불렀던 선입견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닥터 홀은 여행에 필요한 여권을 내려고 영국 공사관에 갔다. 이 같은 고충을 말했다. 영국 영사 웰킨스가 자신도 중국에서 이와 비슷한 일을 많이 경험하였다고 하며 그의 생각에 동조하였다. 영국이나 미국 공사관에서도 아무런 보호를 해 줄 수가 없고 현재로서는 서양식 건물을 짓는 일은 여건이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닥터 스크랜턴도 평양에 와서 상황을 보고는 건축을 미루자는 닥터 홀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우선 서울 사는 조선 기독교인들을 평양으로 보내서 유 씨 이름으로 구입한 집에 살게 하다가 기회가 되면 합류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인 것 같았다. 올링거의 요리사로 있는 김창식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였다. 김창식과 박유산을 먼저 평양에 보내기로 하였고 그들도 흔쾌히 이 결정에 따랐다.
두 사람은 닥터 홀과 평양에서 지내며 진실한 믿음으로 평양선교의 기반을 닦았다. 소년들이 공부하는 광성학교를 개교하였는데 처음엔 13명으로 시작하였다. 차츰 학교가 알려지자 학생 수가 점점 늘어났고 성실한 기독교인 교사도 자원하여 부임했다. 닥터 홀이 진료하는 병원도 환자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어느 날은 하루 16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먼 곳을 3군데나 왕진했다.
차츰 평양의 생활이 안정되어 가자 닥터 홀은 아내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서울에서 혼자 힘겹게 아기를 키우며 환자를 돌보는 아내가 늘 마음에 걸렸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육로로 가면 편도만 일주일이 걸렸다. 해상여행의 가능성을 조사해 보았다. 기선이 매우 불규칙하게 운행되었지만 시간은 절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가족들이 평양으로 올 때 배편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1894년 5월 4일 홀 가족은 제물포에서 평양으로 가는 작은 해안용 기선을 탔다. 닥터 홀 세 식구, 아기를 돌보는 실비아, 박유산과 에스더, 모두 6명의 가족이었다. 그들은 아름다운 해안의 경치를 즐겼다. 닥터 홀은 비로소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사랑하는 아내와 동행하는 에스더 부부와 실비아를 바라보며 따뜻한 미소를 보냈다. 로제타도 얼굴에 감개무량한 한 빛이 역력했다.
한나절을 운항했는데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바람이 심하게 불더니 배가 흔들렸다. 태풍이 심하게 몰아쳤다. 물에 뜬 나무 조각들이 해안선을 따라 밀려왔다.
동행한 김창식과 박유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봄철이라 아직 태풍이 불어올 계절은 아니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기가 멀미하는지 얼굴이 노랗게 되고 토하려 했다.
‘아! 하나님, 우리의 평양으로 가는 길을 지켜 주십시오!’
<다음호에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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