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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진 수필 / 우리 가족의 소풍

정안진 수필 /

2011년 05월 28일(토) 17:30 7호 [강원고성신문]

 

↑↑ 정안진 칼럼위원(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재학)

ⓒ 강원고성신문

얼마 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드라마 ‘시크릿 가든’이 끝나고 주말 저녁 헛헛하게 보내고 있을 즈음, 무심코 TV 채널을 돌리다 반가운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 얼굴은 바로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배우 유승호군이다. 앞서 반가운 얼굴이라 칭할 정도로 친근하게 말하고 보니 혹여나 내가 유승호 군과 친밀한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할 수도 있어 알려두건데 대답은 단연코 ‘아니올시다’다. 그저 유승호 군에게 느끼는 친밀함과 애틋함은 나홀로 느끼는 외사랑일 뿐이다. 유승호 군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다 보니 거의 글을 ‘승호예찬’으로 지어야 할 것 같아 얼른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글을 써야겠다.

눈시울 적셨던 영화 ‘집으로’

내가 유승호 군에게 홀로 따뜻함을 보내고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유승호군이 아역배우로서 진가를 보여준 영화 ‘집으로’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짐 없는 연기와 탁월한 감정표현으로 많은 관객들의 눈시울을 적셨던 영화 ‘집으로’.
‘집으로’가 개봉했던 2002년, 나는 서울 근교에서 재수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학원에서 휴가를 받아 자유시간을 만끽하던 중 ‘서울 사람 흉내내기 놀이’로 충무로의 한 극장에서 처음으로 혼자 영화를 보았는데 그 영화가 바로 ‘집으로’였다. 사전정보 없이 영화관을 찾았던지라 영화의 내용도 모른 채 그저 영화가 시작되기만을 바랐는데, 아니 이게 웬걸~ 글쎄 영화관을 빠져 나올 때는 글쎄 소매 자락, 바지 자락에 눈물 콧물 다 묻힌 것도 모자라 ‘엄마 젓 강제로 뗀 아이’ 마냥 어찌나 서럽게 울면서 나왔던지.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충무로 근처로 눈도 못 돌리겠다. 혹시 그때 나의 추한(?) 모습을 기억하는 누군가 있을까 부끄러워서 말이다. 영화로 감동을 받는 일이 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을 만큼 아직까지도 한국영화 최고 작품으로 ‘집으로’를 꼽고 있는 것은 아마도 나의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때문은 아닐까 한다. 바로 우리 오봉 할머니와의 추억.
우리 외할머니 댁은 오봉이다. 지금은 ‘왕곡마을’이라는 명칭아래에 도로도 재정비하고 기울어가던 옛날 집들도 초가집으로 새 단장해서 좋아졌지만 내가 어렸을 적, 오봉은 6.25때 다섯 봉우리로 둘러싸여있어서 전쟁이 났는지도 몰랐다고 하는 설(?)이 있을 만큼 버스에서 내려서도 고개를 건널 만큼 한 참을 걸어야 비로소 마을이 나왔다. 그 당시 내 기억에는 정말이지 한 시간도 넘게 걸어야 할 정도로 굽이굽이 고개를 넘고 또 넘어야만이 외할머니 집으로 갈 수 있었는데, 그도 그럴것이 외할머니 집은 마을에서도 제일 꼭대기 집으로 할머니 집에서 보면 오봉마을이 죄다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굽이굽이 굽어 친 외할머니 집을 매번 아빠 차로만 다니다가 딱 한번 걸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내 기억 처음으로 아빠와 엄마가 크게 싸운 다음 날이었다.(아무래도 엄마의 계획되지 않은 첫 친정나들이가 아닐까 싶다.)
새벽녘 예기치 못한 엄마의 친정나들이에 딸 다섯 둔 외할머니는 어느 정도 짐작을 하셨던 듯하다. 별 말 없이 뜨뜻하게 데워진 아랫목에 이불을 깔아주던 할머니는 금세 뚝딱뚝딱 한 상 가득 밥을 차려주셨다. 미역 줄기 무침에 멸치 된장 지짐 등 지금은 돈 주고도 못 사먹는 시골 밥상이 못 마땅해 나는 젓가락으로 반찬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 엄마는 무슨 걸신이라도 들린 사람처럼 금세 밥 한 공기를 비워냈다.
그때 내 젓가락 장난질로 한껏 표현한 반찬투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밥공기를 비워대던 엄마가 어찌나 미웠던지. 또, 내 속도 모르고 손으로 김치를 북북 찢어 내 밥그릇에 올려놓고는 다시 그 손가락을 입으로 쪽쪽 빨아 다른 반찬을 덥석 집어 내 밥그릇에 올려놓던 할머니는 어찌나 싫던지. 정말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는데 그 시간이 앞으로 다가올 재앙에 비하면 넘치는 행복이라는 걸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엄마의 친정나들이가 생각보다 길어진다 싶어질 무렵 아랫목에서 자던 엄마는 새벽녘 채비를 차리더니 나를 놔두고 속초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아빠와 담판(?)을 본 후 일이 잘 해결되면 다시 돌아와 짐과 나를 챙겨 가려는 속셈 아닌 속셈이었는데 시골의 아침에 잠이 늦어진 나는 엄마의 인기척도 못 느꼈다가 깨고 보니 본의 아닌 엄마의 배신(?)에 까무라칠 정도로 경기를 일으켰다.
그때까지 나는 외동으로 자란 터라 거의 엄마 치마 속에서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마와 떨어져 본 적이 없었는데 엄마가 나를 두고 그 십리 길을 혼자 떠났다는 생각에 어찌나 서럽던지. 또, 낯가림이 너무 심해 엄마 아빠 없이는 누구하고 말도 잘 못하던 내가 할머니와 단 둘이 남았다는 대형사고(?)가 어찌나 무섭던지 정말 나는 까무라쳤다. 그리곤 버스를 타러 그 오봉의 십리길을 혼자 걸어가겠다고 대청마루에 누워 쌩떼를 썼다. 정말 실제로 그렇게 했다. 나는 자지라지게 울며불며 뛰어가고 할머니는 산만한 몸으로 나를 뒤 쫓느라 헐레벌떡 뛰며 우리의 레이스는 그렇게 이어졌는데... 울다 지친 나는 십리 길의 반도 못 가보고 결국 포기 했다. 결국 나는 할머니의 등에 업혀서 다시 할머니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찌나 심통이 나던지 업혀있던 몸을 뒤로 나자빠트리며 할머니에게 고약을 부렸다. 집으로 도착해서도 계속 울며불며 난리를 치던 나는 결국 진이 빠져서 잠들었고 그렇게 하루가 흘렀다. 그런데 이게 웬걸. 다음날이 되어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간 가게를 비워둔 탓에 일이 밀려 나를 데리러 오지 못한 것이다. 아니 일요일에나 데리러 올 수 있겠다고 선전포고(!)를 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할머니와 며칠간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우느라 진이 빠진 나를 밥상 앞에 불러 들여 다시 쪽쪽 빤 손가락으로 북북 찢은 김치를 밥 위에 올려 주고 비듬이 내려앉은 것 마냥 허연 곶감을 광에서 자꾸만 내오는 외할머니 앞에 밥상을 패대기 치고 대자로 누워 우는 일이 계속 되다 보니 지칠 대로 지쳐 정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못된 성깔에 김치를 걷어내고 우걱우걱 밥만 먹다가 물에도 말아 먹어보고 찌개도 찍어 먹어 보고 하다 보니 어느 새 할머니의 김치를 받아먹을 만큼 나는 할머니의 집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해디야~ 하는 소리가 이제는 나를 부르는 소리임도 알게 되었고 할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필 때는 불쏘시개 역할을 곧잘 해냈다. 그렇게 할머니의 집에 나는 점점 익숙해져 있었고, 엄마는 점점 잊혀져만 갔다. 그런데 마침내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엄마가 약속 했던 일요일. 그렇게 손꼽아 기다렸던 일요일이건만 익숙함에 그날을 잊고 있을 무렵 아빠의 찻소리가 불현듯 귀를 간지렸다. 감을 까던 할머니의 곁에서 조각낸 감으로 장난질을 치고 있던 나는 마치 용수철처럼 마당으로 튕겨 나와 눈물바람으로 부녀 상봉을 하고 아빠 품에 안겨 떨어질 줄 몰랐다. 나는 “해디~야 가거라~.”하는 할머니의 배웅도 나몰라라 하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아빠 차에 올라탔다. 어린 마음에 영영 엄마 아빠랑 헤어질까 두려워 그런 거였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할머니가 얼마나 서운했을지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그래. 그렇게 나는 할머니와 헤어졌다.

밤새 이야기꽃 피운 ‘오봉의 추억’

이런 기억 탓에 영화 ‘집으로’가 더욱 와 닿았던 것인데, 특히나 마지막에 버스를 타고 할머니 댁을 떠나는 유승호가 울음을 참다가 결국 뒤돌아보며 할머니를 향해 인사를 하는 장면에서의 눈물은 그때의 나를 자책하느라 내뱉은 오열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다시 그 언덕을 오르고 있을 그때의 할머니가 자꾸만 눈에 밟혀서 일지도.... 그리고 그 소풍같던 날을 다시 할 수 없는 지금이 서러워서 였을지도... 몰랐다.
몇 해전, 서울에 살고 있는 친척들끼리 가족모임으로 거나하게 술들을 마시고 술도 깰 겸 친척오빠네 집에 가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는데 영화 ‘집으로’를 보다가 외할머니 생각에 눈물 콧물 다 빼면서 울던 얘기를 했더니 글쎄 친척오빠랑 언니도 자기들도 그랬다면서 눈물바람 한 얘기를 마치 자랑마냥 이야기 해댔다. 그렇게 오봉 할머니 집 얘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으니 우리 가족의 ‘오봉의 추억’은 이루 말할 수도 없으리라. 이처럼 우리의 유년을 따뜻하게 품어준 오봉 할머니 댁은 몇 가지 사정으로 이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 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소풍’이 되어 주고 있음은 더 말해 무엇하랴.
3월 중턱, 눈 나린 서울 하늘에서 이렇게도 오랜만에 오봉을 추억하니 아직도 병석에서 창밖만 바라보며 오봉으로 돌아가는 그 날을 그리는 우리 외할머니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부디 우리가 추억하고 있는 그때의 그날들처럼 단 한 번 만이라도 기적같이 할머니의 언덕에서 우리를 마중하고 있기를, 그렇게 단 하루, 우리 가족의 ‘소풍’을 바라본다.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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