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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규방 처자 불러 보여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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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의 고성이야기 <37> / 역사와 명소를 찾아서② 선유담(仙遊潭) Ⅵ-암각문(巖刻文)과 정자(亭子)의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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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1월 10일(화) 14:10 45호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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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고성신문 | | 예로부터 금석문의 정의를 보면 돌이나 쇠붙이에 새겨 놓은 글씨나 그림이라고 한다. 금석에 새긴 문자나 도형은 쉽사리 마모되지 않고 오랜 세월 견뎌내기 때문에 종이나 죽백 등에 기록된 문헌보다 내구성이 높고, 특정한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현장에 건립 배치되는 현장성 때문에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고증하는 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금석문은 현장성, 예술성, 역사성을 가지기 때문에 각 지역의 문화사를 점검하고 서술하는데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어 다루어져 왔다.
이렇듯이 오늘날 이름이 있는 명소(名所)에는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바위에 새긴 글씨이다. 여기에 소개하고 있는 선유담에는 현재 두 곳에 암각문(巖刻文)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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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고성신문 | | 1.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암각서(巖刻書)
필자는「선유담의 고찰, 2009년」논문을 통해 글씨의 주인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 전에는 글씨 주인이 봉래 양사언, 택당 이식, 우암 송시열 등의 여러 이설(異說)로 인하여 논문 일부 내용 중에 송시열이 1675년(숙종 원년)함경도 덕원에 유배되었다가 이해 6월 경상도 장기로 이배되는 노정(路程)에 여기 들러 쓴 글씨라고 추측하였다. 그러나 삼포(三浦) 유생인 미재(眉齋) 어제창(魚濟昌)이 쓴『미재집(眉齋集)』을 보면서 더 한층 확인할 수 있었다.
미재(眉齋)는 이식(李植)의 문인(門人)이며 그의 기문(記文)을 살펴보면 “우암 송시열선생이 80노령에 휴가를 얻어 가지고 금강산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내가 금강산 발연사에 가서 영접하여 삼일포, 사선정, 해산정, 고산대를 거쳐 남강에 배를 타고 칠성석과 군옥대를 지나 온천에 가서 목욕을 하고 또 구룡폭포에 가서 수석들을 구경하며 함께 거닐었으니 참으로 평생에 기쁜 일이다. 저녁에 돌아와서 내가 청하는 말이 우리 고을 군청과 향교가 예전부터 현판이 없으니 이것을 써 부쳤으며 좋겠다하니 선생이 승낙하시고 군청은 수성관(水城館), 향교는 삼성루(三省樓)라 써주시니 내 또 청하기를 청간정(淸澗亭)은 우리고을에 있고 관동팔경에 하나인데 아직까지 현판이 없는 것이 유감이요 선유담(仙遊潭) 영랑호(永郞湖)는 다 경치 좋은 승지이니 모두 다 써주시면 간판하여 부치고 오래오래 전하겠다하니 선생이 모두 써주시고 아모개가 썼다 낙관까지 하여주시니 이것이 또 평생에 좋은 일이다.” 오늘날 옛 청간정과 선유담의 글씨는 송시열이 쓴 것으로 정확하게 밝혀진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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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고성신문 | | 2. 선유담(仙遊潭)의 정자(亭子)
일찍이 선유담(仙遊潭) 주변에는 정자가 있었는데 어느 시대에 만들어졌는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문헌상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고려 말엽의 학자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의『동유기(東遊記)』작품에서 작자가 1349년(충정왕 1) 가을에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고 선유담에 이르러 주인(간성군수)이 선유담(仙遊潭) 위에서 작은 술자리를 베풀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관아에서 운영하던 장소이니 만큼 정자하나 있었다고 추측하게 된다.
조선중기에 와서는 팔곡(八谷) 구사맹(具思孟, 1531~1604)이 쓴 선유담(仙遊潭)의 칠언절구(七言絶句) 2구에는 ‘정자 두른 솔숲엔 푸르름이 더하네(護亭松蓋碧團團)’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정자의 존재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선유담의 정자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름도 달리하였다. 사찬지리지『간성군읍지(杆城郡邑誌)』를 살펴보면, 1631년 간성현감 이식(李植)이 연못 위에 다시 관정(官亭)을 지어 이름을 가학정(駕鶴亭)이라고 했는데, 어떤 사람이 군수일 때 어느 시기인지 알 수 없는데 갑오년(甲午年, 1714)에 군수 조두빈(趙斗彬)이 지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 뒤로 가학정(駕鶴亭)은 다시 무너져 없어졌다가 지금의 정묘년(丁卯年, 1747)에 김광우(金光遇)가 군수로 있을 때 옛 터에서 물가로 조금 내려서 1칸의 정자를 옮겨짓고 이름을 유한정(幽閑亭)으로 고쳤다고 한다. 정자 안에는 구사맹(具思孟)과 최립(1539~ 1612)의 시판을 걸어 두었다. 시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1589년(선조 22)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구사맹의 선유담(仙遊潭)의 시(詩)에는,
水有蓴絲渚有蘭 못 위엔 순채 줄기 못 가엔 난초 돋고
護亭松蓋碧團團 정자 두른 솔숲엔 푸르름이 더하네
須知暗合幽閑意 은근히 맺은 그윽한 뜻 알아야 하기에
喚作深閨處子看 깊은 규방 처자 불러 보여 주리라
② 1603년(선조 36) 간성군수를 지낸 최립의 선유담(仙遊潭)에서 노닐며 2수(二首)에는,
海色潭光隔一陂 비탈 하나 사이에 바다와 연못 함께하니
無風兩段碧琉璃 바람 잔 두 물빛 푸른 유리 같아라
安能直似仙遊日 어찌하면 신선들 노닐던 그 옛날 같이
來往재同大小池 크고 작은 연못을 왕래할 수 있을까
또 한편의 시에,
仙遊潭上獨遊時 선유담 위에서 지금은 나 홀로 노니는 때
鳥度雲移把酒치 새와 구름 벗 삼아 잔을 든다네
一兩白鷗如識我 두어 마리 백구가 나를 알아보는 듯
沈浮來去故依遲 떴다 잠겼다 오가며 곁을 지킨다오
『수성읍지(?城邑誌, 1897년)』,「산천(山川)」교정(較正)에 의하면, 가학정(駕鶴亭)은 군수 김광우(金光遇, 1707∼1781)가 이건 한 후 또 다시 무너져 1825년(순조 25) 군수 김용(金鎔)이 다시 중수(重修)하여 옛날 이름 그대로 선유(仙遊)라고 하였다. 그 후 21년이 넘어 1845년(헌종 11)에 또 다시 무너지게 되었는데 아직도 세우지 못하다가 결국 완전히 무너져 없어졌다. 지금에 와서 연못(潭) 역시 점차 파묻혀서 초색(草色)만이 무성하게 보일 뿐이라고 적고 있다.
김 광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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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고성신문 | - 향토사학자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 위원
- 고성향토문화연구회 사무국장
- 논문 : 〈선유담의 고찰〉, <간성의
만경대와 누정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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