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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칼럼 / 독도는 민족수난사에서도 생활터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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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9월 21일(수) 17:44 30호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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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종식 객원논설위원(전 동우대 부학장) | ⓒ 강원고성신문 | 1592~1598년 2회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일본과 싸움은 뼈아픈 역사이다. 조선은 양반국가 훈구파 절의파 사림파 청담파 반목 갈등 대립은 참화이고, 당쟁으로 인한 분열은 씻을 수 없는 과오이다. 도요토미의 정명가도 저의를 알기 위하여 일본에 파견된 김성일은 정상이 없다고 시인 황윤길은 병화가 있다는 상반된 보고에 지지세력이 달라 국론이 분열되었다. 그러나 국가와 국익을 생각하지 않고 화를 불러들이는 싸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
식민지를 위한 피의 역사 재확인
선각자 이이의 십만양병설 주장은 임진왜란의 예언이었다. 연산군(1494~1506 재위)은 무오, 갑자, 기묘, 을사 등의 사화와 세조 이후 당쟁 360년간 노소남북 4색 편협 분열 편파 편당 붕당 요즈음 왕따 흐름이 있는 점으로 보아 그 기운이 느껴진다. 이 정쟁의 논제는 달랐고 대립된 파는 달랐으나 쫓아내고 쫓기어가고 다시 복수하고 다시 쫓겨나가는 같은 과정이 되풀이하는 것이다. 정쟁의 논제는 사회의 개선이나 국민의 생활향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선각자 이이는 당쟁의 조정을 꾀하다가 마침내 탄핵되어 퇴직되고, 양반계층의 반목은 국론분열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영조 정조의 탕평책은 정쟁당쟁을 완화하였으나 그때뿐이었다.
틈새 1904년 한일의정서의 결과 내정간섭과 군사기지 확보 동년 한일협약은 고문정치 독약의 결과이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 등 갖가지 명분 술책으로 보호정치와 통감부설치 등 약조이고, 1907년엔 한일신협약으로 차관정치로 인한 좌지우지하며 본격적 침략이었다.
마침내 1910년 8월 29일에 이완용은 윤덕영을 시켜 황제의 어새를 날인하여 구한말 27대 519년만에 한일합방됨으로써 외교권이 박탈되어 조선은 멸망되었으나 우국지사와 민중봉기는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또한 일본국 문화정책에 따른 독립자유민보는 “3.1운동의 진상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기사” 보도는 총독부 당국자를 놀라게 하였다. 주동인물인 유연화 최석인 박광필이 검거 기소되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실감케하였다.
임진왜란 1592년 의병활동, 1895년 이후 한말전후 의병활동을 하였고, 1919년 4월15일에는 왜 중위 1명 왜군 1대가 “유지명분으로 왔다면서” 수원 제암리 예수교 천주교인을 모아 입당하게 하고 시건장치 후 총으로 사격해 창문으로 나온 아이 창으로 죽이고 교회는 방화하여 교인을 안에서 22명 죽이고 밖에서 늦게 왔던 6명을 모두 사살했다. 이때에 민가 31호 8면 18부락 317호가 연소되고, 제암리와 용주리에선 39명이 참사를 당한 대 학살사건이다.
1920년 3월 이후 함북 온성지방에서 독립군 약 500명이 여러 부대로 나눠 일본경찰과 8회에 걸쳐 교전하였다고 경무국이 발표하였다. 발표에 의하면 독립군 복장과 모자는 중국식 다른 식도 있었고, 38구경 노국 소총 삼각형 노국식 칼을 휴대한 전투복장이었다.
잠자는 사자를 깨우지 마라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 1919년 4월 19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민주주의 국민주권주의를 채택하였다. 독립노인단은 전 국민이 민족의 단결력을 보여준 것이었다. 1940년 창씨개명은 1946년엔 조선인 성명 복구령에 의거 무효가 되었다.
제1차 대전 동맹국 독일 항복 후 미 윌슨 대통령 1918년 1월 14개조 제창한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주의 파리 평화회의에서 채택하였다. 카이로선언은 미 루즈벨트, 영 처칠, 중 장개석 등이 제2차대전 말엽인 1943년 11월 22일 제1차 대전 후 타국으로부터 약탈한 영토를 원 소속국가에 돌려줄 것과 “현재 한국인민이 노예상태에 있음에 유의하여 앞으로 자유 독립국가로 할 경의를 한다”고 명시함으로써 처음으로 한국독립이 국제적 보장을 받았다. 약탈탐욕 시대가 아니다. 이제는 넘보지 말아야 한다.
1945년 2월 4일 얄타협정, 1945년 7월 26일 포츠담선언 이후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은 8월 9일에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에서 군사활동을 펴자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 수락 항복하였다. 위 협정에선 무슨 밀약이 있었나 생각된다.
이제 정의로운 독립국가는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이 선포되었다. 역사적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어 국력신장은 세계 10위권이라지만, 분단된 점에 익보다 실이 끝없이 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2011년 현재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왜인 후손들이 정치적 헛말을 계속하고 있다. 신임 총리 노다의 독도는 불법점령이니 야스쿠니 신사엔 A급 전범이 없다느니, 조어도가 어떠니 광란폭언은 그만 할 것. 그리고 민족분단의 슬픔을 조장한 철천지원수들이 주변에 깊숙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사람이라면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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