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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기행문과 문하생들의 수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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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의 고성이야기 <29> 역사와 명소를 찾아서① 능파대(凌波臺)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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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18일(화) 09:58 34호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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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광섭 칼럼위원(향토사학자) | ⓒ 강원고성신문 | 능파대가 지역의 명소로 가치성은 예나 지금이나 많이 다르다. 선인들은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여행을 떠나 이곳을 찾아 헤아릴 수 없이 노래를 하였으며 많은 작품이 지금도 남아있다. 요즘은 주변에 볼거리가 많아서인지 아이들을 데리고 답사해 보면 여러 개의 모여 있는 단순한 바위들뿐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아이들 보기에는 부족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천혜의 아름다움에 도취된 간성지역의 경택재 문하생들 또한 늘 심신수양의 장소로서 자주 찾아오곤 하였다.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바다를 향해 이어진 바위 끝으로 있는 곳에 ‘대동시사(大東詩社)’라고 적힌 바위가 있다.
관동록(關東錄)= 홍인우((洪仁祐, 1515~1554)의 관동록(關東錄)을 보면 1553년 4월 9일 서울을 출발하여 금강산을 구경하고 5월 2일 아침 김사문(金沔, 간성군수)이 초청하여 우리 세 사람(허국선, 남시보, 홍인우)이 가서 잠깐 만났다. 11리를 가서 선유담에 이르렀다. 어지러운 산록들이 두루 둘러 골짜기를 이루고 있었다. 골짜기 안에 연못(담)이 있는데 호수의 남쪽에 작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어 호수에 반쯤 잠겨있다. 큰 소나무가 구불구불 휘어 그늘을 만들고 있어 그 아래에서 쉬었다. 순채(蓴菜)가 호수에 가득하다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또 7,8리쯤 가니 하얀 모래가 눈과 같다. 사람과 말이 지나가니 쟁쟁 소리가 난다. 이것이 명사(명사)이다. 영동 지방의 바닷길은 모두 그러한데, 고성에서부터 여기까지가 더욱 그렇다. 해당화가 있어 어떤것은 어지러이 피어있고 어떤 것은 이미 열매를 맺기도 했다. 역시 기이하고 아름답다. 또 가서 능파도(凌波島)에 올랐다. 섬의 서쪽은 모래 길과 연결되어 있다. 빼어난 봉우리가 바다 어귀까지 우뚝 솟아 있는데, 기괴한 바위들과 괴상한 돌들이 종횡으로 섞여 우뚝 서 있다. 우리 세 사람은 각기 한 봉우리씩을 차지하고 앉아서 경치를 즐겼다. 바다와 맞닿은 하늘은 맑고 아름다운데 만 리나 되는 푸른 바다는 탁 트인 채 그 모습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잠시 후 갑자기 동풍이 불자 성난 파도가 해안을 들이치는데 마치 천군만마가 마구 달려오는 듯하다. 여기서 능파대가 섬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금강록(金剛錄)= 정엽(鄭曄, 1563~1625)의 금강록(金剛錄) 작품은 양양 부사로 내려 와 있던 1618년 4월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지은 기행문이다. 작가는 서울에서 온 두 사위 나만갑(羅萬甲)과 이상질(李尙質) 그리고 손자 원(援) 낙산사 주지승 원우(元祐)를 데리고 양양을 떠나 금강산을 가는 길에 남긴 기행문을 보면 ‘청간정에 가서 자고 2일 아침을 먹고 10리쯤 가니 산 한 자락이 물 가운데 들어가 있는데 이름하여 능허대(凌虛臺)라고 하였다. 능허대 앞에 여러 개의 바윗돌이 쌓여 작은 섬을 이룬 곳이 있는데 나군과 이군 두 사위는 서둘러 그곳에 올라가 구경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능파대의 이름을 또 다른 표현으로 능허대라고 부르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경택재(景澤齋)= 과거의 지방학교로는 서원과 향교, 서당에서 이루어져 학문의 길을 닦았다. 지금의 초등학교와 같은 서당에서 천자문, 명심보감, 격몽요결 등의 기초적인 학문을 익히고 향교로 진학하는 과정이었다. 간성지역에서는 서원은 없었고 향교만이 있었다. 간성향교의 연혁을 살펴보면 간성 용연동(지금은 상리)에서 대대리, 해상리을 거쳐 현재의 교동리까지 여러 차례 이건을 거듭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옮기게 된 연유에는 대다수가 터가 좁아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간성향교와 별개로 경택재는 죽도면 황포리(지금의 죽왕면 삼포리)에 있다고 한다. 택당 이식이 고을 현감으로 왔을 때 학문을 장려하여 강학하던 곳으로. 택당 이식의 문인인 미재(眉齋) 어제창이 중수하고 ‘경택(景澤)’이라고 편액을 하였으며, 영상 임백경이 기문을 남겼다고 한다. 『미재집(眉齋集)』에서는 간성지역의 문하생들이 택당 이식선생을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으로 작은 재실(齋室)을 짓고 경택재(景澤齋)라고 불렀다고 적고 있다. 문하생들은 주로 사서삼경과 한시를 공부하였는데 야외에서는 줄곧 능파대를 찾아서 한시를 창작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경택재를 중수한 어제창이 주도한 ‘대동시사(大東詩社)’ 유생들이 능파대에서 풍류를 즐긴 흔적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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