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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우리나라의 소주(蘇州)와 항주(抗州)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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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의 고성이야기 <52>역사와 명소를 찾아서③ 만경대(萬景臺) 마지막회 / 두 편의 청간정(淸澗亭) 중수기와 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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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6월 12일(화) 11:45 65호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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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유학자 최숙민(崔琡民, 1837~1891)은 1885년(고종 22)에 간성을 지나다가 청간정을 방문해 시문을 남겼다.
“청간정이 섰던 자리는 벌써 폐허가 되었는데 …중략… 바다가 고요하니 먼 곳의 수평선도 아득하게 바라보인다. 거기에 한참 않아 있으니 영욕귀천이 다 잊어진다. 이곳에다 정각을 세웠던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흉금이 활달하여 옹졸한 사람은 절대 아니라고 짐작된다. 어지러운 속세에 이와 같이 훌륭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러니 오늘날까지도 이 정자를 수리할 사람이 생기지 않는가 보다. 이런 생각 끝에 깊이 탄식하다가 시 한수를 읊노라.”
그동안 ‘역사와 명소를 찾아서’ 세번째로 순서로 만경대를 다뤘다. 이번호까지 13회를 거치면서 진경산수화 「청간정도」 등을 통해 만경대의 주변에 누정이 존재했다는 것을 밝혔으며, 시와 기행문 통해서는 만경대의 진면목을 감상해보았다.
만경대는 오늘날 군부대 안에 있는 관계로 숨겨져 있었다. 더욱이 청간정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면서 이름조차 거론되지 못하였다. 만경대 연재를 통해 이런 사실들을 역사적으로 조명한 것에 큰 보람을 느긴다. 부족하나마 지금까지 읽어 준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자 하며, 현재 남아 있는 청간정 중수기와 기문을 살펴보면서 아쉬운 마음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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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해주오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청간정 중수기(淸澗亭重修記)」 | ⓒ 강원고성신문 | |
1. 해주오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청간정 중수기(淸澗亭重修記)」= 청간정은 수성군 남쪽 45리쯤 되는 곳에 있다. 천후산을 등지고 만경대를 끼었으며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데 하늘과 땅이 맞닿아서 가없이 넓다. 옛날에는 만경루가 있었지만 지금은 벌써 폐허가 된지 오래다. 대(臺)의 남쪽으로 한 20리쯤 되는 시냇물 옆에다 역참을 하나 세워놓고 이름을 청간이라 했다. 후에 대 옆으로 옮기고 나서도 여전히 청간이라고 불렀다. …중략… 옛날 가정(嘉靖)연간 경신년(庚申年,1560년)에 최천이란 분이 정자를 세웠고 그 후 103년이 지난 임인년(壬寅年,1662년)에 정양(鄭瀁)이란 분이 또 다시 중수를 하면서 그 옆에 작은 누각까지 지어놓아 모습이 좀 더 늠름하고 장엄해 보였다. 두 분의 공적에 대해서는 고증할만한 기록도 있다.
임인년(壬寅年)이 지난 지도 벌써 백 여 년이 되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기어 칠도 벗겨졌고 누각도 기울어져 유람하는 사람들도 마음이 아팠고 그걸 지적하는 사람들도 탄식을 금하지 못했으니 하물며 이 땅을 지키는 사람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리오? 그래서 동네 사람들과 논의한 끝에 읍에다 정각을 다시 짓기로 결론이 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너도 나도 기꺼이 재물과 금품을 내고 모아서 공사를 벌리었다. …중략… 어허, 수성군에 정자가 있다고 한 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던 이 고장의 지방지에 기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정각에 새겨진 시에도 이름이 항상 전해지고 있다. 유람하다가 쉬었던 자리나 지팡이와 발길이 닿았던 곳에도 풍월객들의 먹 자취가 남아 있으니 보기만 해서는 정각이 몇 백 년이 지났는지를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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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홍경모(洪敬謨)의 「청간정기(淸澗亭記)」 | ⓒ 강원고성신문 | |
2. 홍경모(洪敬謨)의 「청간정기(淸澗亭記)」= 청간정은 간성군 남쪽 45리에 있다. 천후산(天吼山)의 한 자락이 비스듬하게 뻗어 내려와 바닷물에 잠겨 있다. 작은 언덕 앞에는 돌 봉우리가 있는데 층(層)으로 솟아올라 대(臺)를 이루었는데‘만경대’라고 부른다. 높이는 능히 수십 길이 됨직하여, 위에는 어지러운 소나무가 서로 휘어져 있고, 삼면이 바닷물에 둘러 싸여 있고, 예전에는 누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대(臺)가 남쪽 2리쯤에 있으며, 간수(澗水; 바위 사이를 흐르는 물)에 임해 있어 역(驛)의 정자로 지어 청간정이라 하였다. 만경루가 허물어지자 역의 정자를 대 곁으로 옮겨옴에 만경루 편액을 걸어 청간에 의해 승지(勝地)가 되었다. 정자가 바닷물과 떨어진 것이 겨우 수십 보(步)이나 만경대 모퉁이를 삼고 물속의 험준한 섬이 먼저 물결과 싸우는 까닭에 예부터 수해를 입지 않았다. 정우(亭宇)는 구부리고 탁 트여 큰 바다를 누르고 해와 달은 나왔다 들어가니 물새들은 날아와 모였다가 한다. …중략… 정자는 일리에 채 이르지 못하고 바닷가에는 자마석이 있다. 자마석이라고 하는 것이 어지럽게 돌 가운데 쌓여 있는데, 한 개의 커다란 돌은 소와 같고, 또 한 개의 커다란 돌을 밟으면 사이가 얼굴이나 주먹만 하다. 위 아래로 돌들이 가운데 위치하여 갈아낸 자국이 함께 있다고 한다. 토착민들은 기이한 일이라고 하는데. 지나가는 나그네 모두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하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아래는 네모져서 세 개의 모서리가 모두가 그러하다. 파도만 바위틈으로 왔다 갔다 하며, 바람과 물결이 심하게 치는 때에는 돌이 크게 그 곳에서 씻기고 파도와 함께 서로 삼켰다 토했다 한다. 예로부터 때리고 부딪치는 일은 늘 그러하였다. 그 이치로 보아 괴이쩍을 것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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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용집(金溶集)의 「중건청간정기(重建淸澗亭記)」 | ⓒ 강원고성신문 | |
3. 김용집(金溶集)의 「중건청간정기(重建淸澗亭記)」= 물의 근원이 신선봉 아래에서 나와 굽이쳐 흐르다가 정자 위쪽에서 나뉘어 흘러 남쪽으로는 천진교(天津橋)가 되고, 북쪽으로는 청간교(淸澗橋)가 된다. 정자 아래쪽에서 다시 하나의 시내로 합쳐져 정자를 감고 굽이돌아 바다로 들어가는데, 그 정자의 이름은 청간정(淸澗亭)이다. 산의 여러 봉우리가 울창한 모습으로 솟아 있는데 가까운 듯 먼 듯도 하며, 병풍(屛風) 같고 장막(帳幕)을 친 것처럼 막힌 듯도 한데, 아침의 구름과 저녁노을, 꽃피는 봄과 가을 단풍 등 천태만상(千態萬象)으로 변화하는 것은 정자 서쪽 설악(雪岳)의 모습이다. 만경창파가 펼쳐지고 지척의 해 뜨는 곳에서 금덩이 같은 해가 힘차게 솟아오르고, 은물결에 흰 달빛이 출렁이며, 배의 깃발은 바람에 휘날리는데, 흰 갈매기는 물에 떠 있으며, 하늘과 물이 맞닿은 듯 넘실대고 출렁이는 것은 정자의 동쪽 바다의 모습이다.
…중략… 그 동안에 많은 세월이 흘러 비바람에 씻기고 마모된 데다 화재까지 만나 소실되어, 겨우 10여개의 돌기둥만 우뚝 서 있을 뿐이어서 수백 년간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했었다. 무진년 봄에 내가 본 면의 직책(職任)을 맡고 있으면서 큰 행사를 기념하여 옛 자취를 추억하는 때에 군수 김극일(金極一)이 잊어버린 역사를 깨우쳐 주는 계기가 있어서 선비들에게 의견을 묻고는 여러 사람이 계를 모으고 정자의 터를 살펴 옛 터의 남쪽 곶(岬)에 청간정을 옮겨 세우기로 하였다. 한 군의 유지들이 힘을 합쳐 재물을 모아 이듬해 봄에 공사를 마치고 이해 칠 월 달 모일에 낙성식을 거행 하였다. 아, 천년의 역사에서 정자는 반드시 그때그때의 모든 흥취를 기약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삶의 궤적이란 인생살이에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이니, 어쩌면 이렇게 한결 같은 것이리오! 후대의 사람들이 이어가며 수리한다면 이 정자의 수명은 저 주춧돌과 함께 영원할 것이리라. 1929년(己巳年) 8월 경신일 회재(回齋) 김용집(金溶集)은 서(序)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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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광섭 칼럼위원(향토사학자) | ⓒ 강원고성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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