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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향토문화연구회 18개의 새로운 비문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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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의 고성이야기 <53>역사와 명소를 찾아서④ 고성지역의 금석문 1 간성 와우산(臥牛山) 영세선정불망비(永世善政不忘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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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6월 19일(화) 09:29 66호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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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간성읍 와우산 중턱에 있는 영세선정불망비. | ⓒ 강원고성신문 | | 예로부터 금석문의 정의를 보면 돌이나 쇠붙이에 새겨 넣은 글씨나 그림이라고 한다. 금석에 새긴 문자나 도형은 쉽사리 마모되지 않고 오랜 세월 견뎌내기 때문에 종이나 죽백 등에 기록된 문헌보다 내구성이 높고, 특정한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현장에 건립 배치되는 현장성 때문에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고증하는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금석문은 현장성, 예술성, 역사성을 가지기 때문에 각 지역의 문화사를 점검하고 서술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어 다루어져 왔다.
지역의 문화유적에 대한 보존대책의 일환으로 고성군 관내에 산재된 문화유적 지표조사는 강릉대학교 박물관에서 1994년 10월부터 1995년 9월말까지 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성지역의 유·불교 유적을 분류하여 91기의 금석문을 조사하여 그 소재와 형태 및 원문과 역문을 첨부하여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으로 간행한 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고성지역을 1997년 4월 24일부터 동년 5월말까지 군사보호구역 내 문화유적 학술지표조사를 실시하여 『군사보호구역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강원도편)』을 간행하였다. 여기에서 기존에 누락된 2기를 찾아서 조사정리 되었다. 2005년 들어와서는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사진촬영과 GPS측량 및 현지답사를 실시하여 『문화유적분포지도(고성군), 1:10,000』을 기존에 대상물을 보완하여 간행하였다.
이러한 여러 연구조사 과정 속에서 누락된 금석문이 적지 않았는데, 이에 「고성향토문화연구회」에서는 2010년부터 이듬해인 10월까지 세 개의 책자를 참고로 하여 고성지역에 산재해 있는 금석문의 소재와 현황을 파악하는 한편, 금석문을 탁본하는 등의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18개의 새로운 비문을 찾았다.
그런 과정에서 이미 발표된 금석문의 근거를 우선시 하였고 원문을 판독하는 작업에 이르렀다. 필자는 이번호를 시작으로 고성지역의 비문과 암석에 새긴 금석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며 특히 건봉사에 남아있는 고승들의 비문과 이미 신문에 발표된 적이 있는 비문이나 암각서는 중복되는 이유로 제외시켰다.
고성지역의 금석문편에서는 대체로 표석, 선정비, 불망비, 송덕비, 기념비, 유허비, 암각서, 묘비 등의 금석문을 조사 대상으로 삼았으며 유물은 원칙적으로 1945년 8월15일 해방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하였다. 이의 내용은 필자가 2011년 〈강원도향토문화연구발표회〉발표한 논문을 토대로 삼을까 한다.
지역 입구마다 선정불망비 존재
오늘날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그 지역 입구에는 선정불망비가 있다. 선정비명과 기원을 보면 이것을 만들기 위해 많은 백성들이 뜻과 힘을 모아 정성과 슬기를 아낌없이 짜내 조각해서 오래오래 돌보며 만인의 좌우명으로 삼게 하기 위해서 왕래가 많은 관문 앞 또는 다리목, 나루터, 향교 앞, 갈림길 등에 세웠고 이런 곳을 가리켜 비석거리, 또는 빗돌거리, 비석 골이라고 불려왔다. 되도록 제작연대 순으로 수립해 놓고 보는 이로 하여금 모두가 주인이 되어 돌보았으므로 4~5백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잘 보존되어 왔다.
선정불망비는 혜택을 베푼 인물의 은덕을 칭송하는 비석이다. 지방 관아가 있었던 곳에는 관내 주민이나 관청의 관리들이 지방장관의 선정을 칭송한 선정비가 다수에 이루며 또 지방관원이 아니더라도 특별히 선행을 하여 지역 주민에게 혜택을 끼친 인물이 있다. 그 선행을 칭송하여 모범으로 삼고자 비석을 건립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비석들은 대체로 관청으로 통하는 길목, 국가에서 관장하는 관도(官道) 곁에 줄지어 수립되었는데, 이것에 주력한 백성들은 면민(面民)·읍민(邑民)·군민(郡民) ·승도(僧徒), 등의 모두가 신분이 낮은 백성들이라고 수립연대 아래에 새겨져 있다. 비의 이름도 선정(善政)·거사(去思)·불망(不忘)·애민(愛民)·청덕(淸德)·휼민(恤民) ·흥학(興學) 등이 지배적으로 많은 것을 볼 때 모두가 진정을 표현시킨 이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정성어린 이 작품이 자손만대까지 오래 지나도 잊지 않기 위해 영세(永世)·몰세(沒世)·만세(萬世)·만고(萬古)와 같은 문구를 제액에 흔히 사용한 것도 모두가 정성어린 문구이다. 비문 앞에 서서 옛 조상들이 문자 그대로 비를 조각하면서 마음 속 깊이 파고들었던 선정의 은혜를 곰곰이 되새기며 감격의 눈물을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렸을 것을 상상 할 때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보통 상식으로는 신분이 높은 사람만이 하급자에게 표창이나 포상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선정불망비는 정반대로 하급자나 낮은 백성들이 은혜를 베풀어 준 상급자나 높은 백성에게 표창하는 일종의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고성지역에서의 선정을 베푼 현인(賢人)들을 살펴보면 지방에서 외직 근무하던 문무(文武)·수령방백(守令方伯)들이 가장 많고 임시적으로 파견되었던 암행어사(暗行御使)순으로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 지방에서 동반외직(東班外職)으로 근무하던 수령방백들을 살펴보면 강원도관찰사는 종2품관에 해당하며 4품관에 군수(郡守)가 임명되었다.
이들 선정비를 보면 해당 지역 주민의 삶에 있어서 절실한 당면 요구가 무엇이었던가를 알 수 있고, 또한 지역 여론을 담당하였던 신분 계층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다. 과거 행정중심지였던 간성 읍내 주변의 서문(西門, 西門里)과 동문(東門, 安心里)에 남아 있던 선정비는 대개 향청을 중심으로 한 향반(鄕班)들이 선정을 베푼 간성군수의 공덕을 찬양하여 세운 것으로, 공덕의 내역은 대개 학교의 재정을 보조하고 지역주민의 조세 부담을 경감하여 주었다는 내용들이다.
와우산(臥牛山) 영세선정불망비
고성에서 비석이 많은 ‘비석거리’를 꼽으라고 하면 우선 춘천지방법원 속초지원 고성등기소 좌측에 있는 18기의 비석을 소개할 수 있겠다. 이곳은 예로부터 누워 있는 소(牛)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와우산(臥牛山)으로 불려왔다.
여기에는 18기의 비석 외에도 ‘충혼탑’과 반공을 위해 투쟁한 인물들의 순국한 정신을 기리는 ‘반공의거 순국비’가 건립되어 있다. 18기의 비가 여기에 옮겨 온 까닭은 금강산건봉사 부근이나, 마을 길가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함병철(咸炳哲) 고성군 초대문화원장이 1986년 이후에 여러 차례 경운기와 인력으로 운반하였다고 한다.
비석이 와우산 중턱으로 옮겨 오기까지의 과정은 『고성군지(高城郡誌, 1996)』에 자세하게 수록돼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선정비 중 일부를 동네사람들이 개인적 용도로 사용하는 등의 유실될 우려가 있어 여기에 옮겨 놓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특히 38선 이북에 속했던 고성지역은 북한 정권에 의해서 봉건시대의 치자를 칭송하는 잔재로 여겨져 고의로 없애 버렸거나, 혹은 이 지역이 한국전쟁의 격전지였으므로 대부분의 문화유적들이 남·북한군의 치열한 공방전으로 파괴되거나 소실된 것도 더러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근래의 도로 확장과 개발 사업 그리고 택지 조성 등으로 묻힌 유물도 많을 것이다. 불과 이년(二年) 전 땅속에서 묻힌 채 두 개가 발견된 토성면장 김용집(金溶集)의 선정비와 청간정 중수에 기여한 공로가 있는 밀양박씨 복선(朴福先) 기념비 또한 같은 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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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광섭 칼럼위원(향토사학자) | ⓒ 강원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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