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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령 확장·모래밭 될뻔한 천석 두락 살려

김광섭의 고성이야기 <66> 간성군 수령의 삶과 업적① 택당 이식(1)

2014년 04월 22일(화) 14:13 120호 [강원고성신문]

 

↑↑ 김광섭 칼럼위원(향토사학자)

ⓒ 강원고성신문

간성군(杆城郡)은 1919년 5월 15일 부령(府令) 제88호(1919.5.9공포)에 의해 폐지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지고, 고성군에 편입된 이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대한민국 강원도 고성군은 6.25전쟁으로 분단된 북고성과 남고성 가운데 남고성을 말한다.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오늘날 고성군의 이전 이름인 간성군은 고려시대인 1018년(현종 9)에 간성현(杆城縣)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천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는 오랜 동안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돼 간성군은 강원도 영동(嶺東)에서도 작은 군(郡)이었으며,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기 어려운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95년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되면서 국방, 외교 등 국가적 사무를 제외한 지방사무는 지역 주민이 직접 선출한 자치기관이 책임과 권한을 갖고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처리하게 되었다.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은 과연 어떠한 사람이 적합한지 한번 쯤 고민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조선시대 고을 수령으로 많은 치적을 남긴 인물을 찾아 그들이 얼마나 백성을 사랑하였는지 반추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년~1647년)은 조선왕조 중기에 살다 간 문신이요 학자이며 문장 대가이다. 그는 특히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상촌(象村) 신흠(申欽), 계곡(谿谷) 장유(張維)와 함께 조선왕조 중기의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이식이 간성현감으로 근무한 때는 1631년(인조 9) 10월부터 2년 남짓한 기간이었다. 그는 나이 48세에 재임해 많은 치적을 남겼다. 간성군의 수령으로서 얼마나 간성군 백성을 사랑했는지 살펴보자.

2. 생애과 학문

택당 이식의 자(字)는 여고(汝固), 자호(自號)는 택당(澤堂)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본관(本貫)은 덕수(德水)이다. 택당은 중종과 명종때의 시인이요 정치가로서 좌의정과 대제학을 지낸 용재(容齋) 이행(李荇)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안기도 찰방으로 좌찬성에 증직된 이안성(李安性)이며, 어머니는 무송 윤씨(茂松尹氏)로 공조참판을 지낸 윤옥(尹玉)의 딸이다.
택당은 선조 갑신년(1584) 10월 11일 서울 남소문 본가에서 태어나 인조 정해년(1647) 6월 11일 경기도 지평(砥平) 백아곡(現 양평군 양동면 소재)에서 별세하니 향년 64세이다. 광해군 경술년(1610)에 문과에 급제, 동왕 계축년(1613)에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를 거쳐 북평사, 선전관 등을 지냈는데, 이 시기에 즈음하여 조정의 권력 내부에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게 되어, 택당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여주 강구 마을로 돌아갔다가 바로 선영(先塋)이 있는 경기도 지평의 백아곡에 옮겨 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인조반정 이후 다시 관계에 진출하여 이조 좌랑, 부수찬, 응교, 사간, 예조 참의, 좌부승지,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 대제학 등의 청직(淸職)을 두루 거쳤고, 인조 20년(1642)에 척화론자의 대표로 지목받아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청(淸)의 심양에 잡혀 갔다가 돌아와 다시 청환(淸宦)에 올라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 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문명(文名)이 높아서 전례 없이 정3품의 품계로써 문형(文衡)의 자리에 발탁되었으니, 이것은 그의 문장이 뛰어남을 반증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택당은 훈척계(勳戚系) 노론 가문의 출신으로 그의 학통은 율곡 이이, 사계 김장생(金長生), 우암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이며 우암이 그의 문하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존경하는 위치에 있었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상촌, 월사, 계곡, 택당의 사대문장가 중에서 특히 계곡과 택당의 문장에 찬사를 보내면서, 이 두 사람을 비교하여, “택당의 문장은 체단(體段) 면에 있어서는 계곡(谿谷)보다 못하나 결구(結構) 면에 있어서는 계곡보다 낫다.”(《農巖集》 卷34 雜識 外篇)하였다. 또 “계곡은 천성(天成)에 가깝고 택당은 인공(人工)에 깊으니, 옛사람에 비교하면 마치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에 방불하다.”(《農巖集》 卷22 息巖集序) 하였다.
사영(思穎) 남공철(南公轍)은 “택당의 문장은 고산심곡(高山深谷)의 기운이 맺혀서 종유석(鐘乳石)이 되고,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서 조수(鳥獸)의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같다.”(《金陵集》 卷1)고 격찬하였다.
중국 근대의 고문가(古文家)로 이름 높은 엄기도(嚴幾道)는 택당을 비롯한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문장을 평하여 택당의 학문 세계는 주자학이요, 그의 문장은 당·송의 고문처럼 격이 높아 우리나라 한문학(漢文學)에 있어서 고문의 전범(典範)이 될 뿐만 아니라 소위 ‘경국대업(經國大業)’의 문장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고 했다.

↑↑ 이식이 직접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백아곡 택풍당(택당). 경기도 양평 양동면에 위치해 있다. 이식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던 곳이다.

ⓒ 강원고성신문



3. 문집으로 살펴 본 간성현감 이식(李植)

①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택당(澤堂) 이공(李公) 시장(諡狀)’

신미년(1631, 인조 9) 4월에 대사간에 임명되어 사헌부(司憲府)와 함께 추숭(追崇 원종 추존 문제를 말한다) 주청을 중지할 것을 계청하였는데, 공이 지은 계사(啓辭)가 8장이나 되었으나 엄지(嚴旨)를 받고 사체(辭遞)되었다.
가을에 전조(銓曹)에서 공의 모친 봉양을 위하여 간성 현감(杆城縣監)을 제수하였다. 공은 간성에 부임하여 교화를 급선무로 삼아 학교를 증축하고 교사(敎師)를 두어 아동교육을 권장하였으며, 매월 삭망(朔望)에는 성묘(聖廟)를 배알케 하고 학력을 시험하여 상벌을 주었다. 또 수재(秀才)를 선발하여 관(館)에 두고 몸소 가르쳤으며, 《심경(心經)》에 구결(口訣)을 달고 소서를 써서 심학(心學)을 가르쳤다. 현리(縣吏)로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얻지 못한 자가 있으면 조정에 추천하여 같은 도(道)의 수령을 하게 하므로, 사람들이 공숙 문자(公叔文子)가 그 가신 선과 함께 조반(朝班)에 올랐던 미사(美事)에 비교하였다.
또 수리 사업을 크게 개발하여 농업을 장구히 하였고 승려(僧侶)를 모집하여 진부령(陳富嶺)의 폐로(廢路)를 복구하였으며, 고개 밑에 원우(院宇)를 설치하여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였으므로 고을 백성이 비(碑)를 세워 공덕을 칭송한 것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공과 부인(夫人)의 상사(喪事)에 모두 재물을 가지고 와서 부조하였고, 충주 사람들도 그러하였다.
계유년(1633, 인조11) 봄에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으나 눈[雪]으로 길이 막혀 사직하자 임금이 “그대의 훌륭한 논사(論思)를 발탁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는데 고갯길이 눈에 막혔으므로 늙은 몸이 잠시 지체하게 된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그대는 천천히 올라오도록 하라”는 비답이 내리므로 3월에 비로소 서울에 올라와 사은(謝恩)하고 소를 올려 관동 지방의 피폐한 상황을 논하였다. 참고문헌『송자대전(宋子大全) 제203권』

↑↑ 택당 이식에게 대제학 벼슬을 내린다는 임금의 교지.

ⓒ 강원고성신문



② 미재(眉齋) 어제창(魚濟昌)의 ‘택당 이선생 간성 정치록’

신미년 가을에 선생이 우리고을에 부임하신지 며칠 후에 문묘에 참배하신 다음 문묘를 두루 돌아보니 제기 두는 창고가 허술한지라 선생이 명령하여 중수하되 제도를 고치시고 제기출납하기에 편리하도록 하라하시고 또 지방이 몹시 궁벽하며 선비들이 학문을 힘쓰지 않음을 보시고 청년자제를 향교에 모아 가르치되 정복흥(鄭復興)을 선생으로 명령하여 사서(四書) 소학(小學)을 가르치게 하시며 겨울이면 등유를 주어서 밤공부를 권하셨다.
초하루보름이면 향교에 나가서 분향한 다음 학생을 불러 강의를 받되 모르는 자는 벌을 주고 아는 자는 상을 주시며 학생을 경계하되 너희들이 시골하향에 초학 아동으로 갑자기 우둔한 성질을 고치기 어려우니 처음에 조금씩 배워 이치를 얻은 다음 나중에 큰 지식을 얻을 터이니 글을 배우는데 공연히 입만 나불거리지 말고 반드시 글 뜻을 잘 알아야만하며 행동하는 데는 반드시 구용구사(九容九思)로서 지켜나가면 자연이 총명해져서 나중에 큰 지식을 얻는다고 하셨다.
또 심경(心經) 두 권을 구해서 토를 달며 서문까지 지어 부쳐서 향교에 보관하게하고 마음 쓰는 법을 지도하니 이러므로 학생들이 학문에 열심히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해 겨울에 학생 최간(崔澗)·어진창(魚震昌)·제창(濟昌)·익창(益昌) 이외 여덟 사람이 글을 배우기를 요청하여 선생이 말씀 하시되 너희들이 배우려하는 것은 고마우나 글귀나 짓는 것으로 힘쓰면 이것은 학문이 아니다. 먼저 경서(經書)를 배워서 그 뜻을 안 다음에 글 짓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하셨다.
서문 밖에 학교를 세우고 처음에 중용(中庸)·대학(大學)을 가르쳐서 천명장(天命章)과 성의장(誠意章)의 뜻을 분명히 알게 하고 다음에 과거보는 글을 공부하는데 두보(杜甫)시 오칠언(五七言) 칠십 여수와 한유(韓愈)·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 칠언 몇 수와 줄글로는 초사 여문 등 수십 장을 뽑아서 그의 재주에 따라 가르치되 아침저녁에 강의를 받아 열심히 가르치며 며칠씩 건너 글짓기를 연습하며 퇴근한 다음에는 군 청사로 불러들여 글 짓는 모범을 가르쳐주시니 부드러운 풍채와 따뜻한 정의로 가르쳐서 거의 글 짓는 방법을 알았나이다. 임신년 겨울에 선생이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하시니 학생들이 크게 실망하였으며 군민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으니 선생의 은덕이 지금까지 남아있나이다.
임신년 봄에 진사(進士) 이진(李進)이 선생에게 학문을 토론한지 얼마 후에 어려운 문제를 분명히 알았다하고 인제군수 이씨가 아들 시성(時醒)을 보내 건봉사(乾鳳寺)에 유숙하며 오르내리며 공부하였다. 고을 북쪽 5리 대대방(大垈坊)에 저수지가 있었는데 비가 오면 자주 파괴되는지라 선생이 친히 인부를 소집하여 보수공사를 하니 그 아래 수만 평의 토지가 가물을 보지 않았고 고을 남쪽 20리 죽도방(竹島坊)에 수만 평의 토지가 홍수에 3분1이 매몰되니 선생이 인부를 동원하여 좁은 곳은 넓이고 낮은 곳은 높게 수축하니 아무리 홍수가 져도 피해를 보지 않았으니 백성들이 말하기를 그때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천석 두락이 모래밭이 될 뻔하다 하였으니 선생의 공덕을 잊지 못한다 하였다.
본군에 세금이 620결 밖에 되지 않으니 땅은 척박하고 백성들은 가난하며 호수는 천호 밖에 되지 않은데 모든 부역이 세금을 따라 나오니 백성들이 세곡은 적고 부역이 많음을 호소하니 선생이 34결을 보태여 민간 사용에 쓰게 하고 쌀 한말과 콩닷되를 분배하여 세곡에 충당하게 하니 백성들이 그 공덕을 치하하였다. 고을구역 둘레 서쪽에는 창고를 지었지마는 동쪽에는 문과 담장이 없으므로 선생이 이것을 결점으로 여겨서 학업을 권장하는 여가에 동쪽에 문을 세우고 사방으로 담장을 증축하는데 농민의 힘을 쓰지 않고 한가한 백성의 힘을 모아 공사를 하였다. 연정(蓮亭)을 지을 뜻을 두었는데 재료는 다 준비되고 전직하였으므로 다음 군수 송희업(宋熙業)이 범위를 고쳐지었다.
고을 서쪽 진부령(陳富嶺)이 길이 몹시 험악하여 진상(進上)가는 사람이나 장사꾼들이 왕래하기 불편하다하여 능숙한 인부를 모집하여 길을 확장하고 고개(嶺)밑에 원집을 지으니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 살고 행인의 교통이 편하였다. 죽도방(竹島坊) 큰길에 하천이 있는데 반석이 물밑에 깔려있는지라 늘 다리를 놓았다가 장마가 져서 바닷물이 치밀렷다 내려가면 다리가 떠내려가서 교통이 불편하므로 사람들이 돌다리를 원하는지라 선생이 들러 공사비를 많이 주고 돌다리를 놓으니 거리가 수십 보라 사람들이 ‘죽도석교(竹島石橋)’라 하였다.
고을 북쪽 열산(烈山)에 사는 향인(鄕人) 최대신(崔大信)이 모친상을 당하였으나 묘지를 구하지 못하여 애통하는지라 선생이 공사일로 열산현(烈山縣)에 가셨다가 길가에 묏자리를 지정해주며 장사케 하고 또 신주까지 만들어주시더니 그 다음 최씨 자손들이 번승하며 글씨 잘 쓰는 사람이 많이 나오니 남들이 이산을 ‘응기(應基)’라 하였으며 첨지(僉知) 어사호(魚士豪)가 신병으로 고생하나 증세에 맞는 약이 없어 치료를 못하다는 말을 듣고 서울에 약재를 주문하여 치료케 하고 가끔 문병을 찾아주시니 9일 만에 완치되었으니 사호(士豪)는 제창에 증조부이다. 선생의 후생사업이 이처럼 놀라우니 제창(濟昌) 혼자만이 칭찬할 뿐이 아니라 인근고을 사람들이 듣고 칭송치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선생의 정치적 아량은 일일이 말할 수 없으며 농사를 장려하며 교육을 권장하니 촌락이 태평하며 관청이 무사하니 학문으로 나날을 보내며 수성지(水城志)를 편찬하셨다. 덕망 높은 정치는 이뿐만 아니라 그때 늙은이들은 다 사망하고 지금 젊은이들은 알지 못할 것이요. 이 늙은 것이 아직 살아있으나 그때 글 배우는 시절이라 하나하나 적어 둔 것이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해보니 부끄럽기 한이 없고 빠짐없이 기록하는 것은 대감께서 자세히 보시라는 뜻으로 순서 없이 기록하였사오니 짐작하시옵소서! 신유(1681년, 숙종 7) 12월 26일 문인 어제창(魚濟昌)이 적어 올리다. 참고문헌『미재집(眉齋集)』

김광섭

- 향토사학자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 위원
- 고성향토문화연구회 사무국장
- 논문 : 〈선유담의 고찰〉, <간성
의 만경대와 누정 고찰〉

강원고성신문 기자  
“행복한 고성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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