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2026-04-29 오전 09:25:44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원격

발행인 칼럼칼럼/논단우리 사는 이야기독자투고김광섭의 고성이야기장공순 사진이야기법률상담
최종편집:2026-04-29 오전 09:25:44
검색

전체기사

발행인 칼럼

칼럼/논단

우리 사는 이야기

독자투고

김광섭의 고성이야기

장공순 사진이야기

법률상담

커뮤니티

공지사항

뉴스 > 오피니언 > 김광섭의 고성이야기

+크기 | -작게 | 이메일 | 프린트

간성 떠난 뒤 어제창 주축 ‘경택제’ 지어 공적 기려

김광섭의 고성이야기 <68>간성군 수령의 삶과 업적③ 택당 이식[3]

2014년 05월 27일(화) 08:54 122호 [강원고성신문]

 

↑↑ 간성향교 동편에 세워져 있는 택당 이식 거사비.

ⓒ 강원고성신문



5. 간성현감 택당의 사모하는 배움의 장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1631년(신미년)에 고을 군수로 왔을 때 학문을 장려하며 강학하던 곳을 군학당(郡學堂)으로서 속칭 ‘양사재(養士齋)’라고 한다. 당시에 여러 학생들이 배움을 가졌는데 간성현감 이식이 부제학에 부임되어 간 뒤에 미재(眉齋, 자는 竹軒) 어제창(魚濟昌)이 주측으로 만들어지게 되는 ‘경택재(景澤齋)’는 간성면 황포리(지금의 죽왕면 삼포리)에 있었다. 문인인 미재 어제창이 창건하고 ‘景澤‘이라고 편액을 하였다. 영상 임백경(任百經) 이 기문을 남겼으며, 택당의 후손들 또한 함께 동참하게 되었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이노병(李魯秉)의 경택재(景澤齋) 중수기(重修記)

경치 좋은 땅이나 이름난 시골에 정자와 누대, 암자, 서재를 지어놓고 혹 쉬는 자도 있고, 혹 걸어 다니는 자도 있으며, 혹 휴양을 하는 자도 있으니 모두 다 그런 사람들은 만나서 땅이 더욱 빛나는 것이니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집을 오래 전하는 데는 집을 짓는 제도가 훌륭한 것이 아니라 자손들이 대대로 중수를 해야만 오래 보전 할 수 있다고 하겠다.
내가 경택재(景澤齋)를 보았는데 슬프다! 우리 택당선생께서 간성현감으로 보임하여 시골 풍경이 無無함을 보시고 학문을 장려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정책을 펴시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서촉(西蜀,중국의 나라이름) 문옹(文翁)의 교화(敎化)를 우리 지방에서 다시 보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선생의 교화가 이렇게 보급되니 죽헌(竹軒) 어제창(魚濟昌)이 성적이 우수했고, 이때 선비 어제창(魚濟昌), 어진창(魚震昌), 어익창(魚益昌), 윤익, 윤현(尹鉉), 김태원(金兌源), 최간(崔簡), 이지병이 다 성적이 좋아서 우수한 선비의 모습을 보이더라.
슬프다! 선생이 작고하시니 죽헌공이 동지들과 함께 선생을 사모하는 정성으로 군(郡)의 남쪽 황포촌(黃浦村, 지금의 삼포)에 집 33칸을 지어놓고 학문을 토론하며 강습하는 것이 선생을 모신 것과 같이 하니 죽헌이 참된 학문을 전해 받은 것을 넉넉히 알지어다. 竹軒으로부터 지금까지 200년이나 오래 지났는데 슬프다! 그 동안 산천도 변하였는데 조그마한 집(정자)이 어찌 남아 있겠는가? 내가 고요한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예전에 선조님이 하신 일을 오랫동안 되새겨보니 감개가 무량할 지어다.
어씨(魚氏) 주영(周永), 철원(哲元)이 나를 강화관청(江華官廳)으로 찾아와서 경택재(景澤齋)를 중수한다는 말을 하고 나에게 중수기를 지어달라고 부탁하기에 내가 벌떡 일어나서 어씨(魚氏) 의 자손들이 선조의 뜻을 이어 받아 경택재를 다시 중수 한다는 것을 고맙게 여겨 택당선생의 유풍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을 것을 마음 깊이 느끼며 쾌히 승낙하였다. 그리고 또 족제 노재(魯宰, 간성군수)가 마침 이 고을 군수로서 중수 하는 역사를 감독하여 빠른 시일에 공사를 마쳤다고 하니 우리 이씨(李氏)와 어씨(魚氏)가 대대로 서로 인연이 있다고 하겠노라.
어씨의 자손이 또 계속해서 중수 하는 자가 나온다면 이 집이 썩지 않고 서로 서로 이어져서 한정 없이 오래도록 보전하리라.
갑인년(1854년) 6월 상순(上旬)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이노병(李魯秉)은 쓰다.

② 이양신(李亮信)의 경택재(景澤齋) 중수기(重修記)

간성(杆城)은 우리 고향과 같은 시골이라 어군 주영(周永)과 철원(哲元)이 요즈음 경택재(景澤齋)를 중수하고 나에게 중수기(重修記)를 부탁하니 내가 사양하지 못하고 공손히 대답하되 이것을 먼저 처사(處士) 죽헌공(竹軒公, 魚濟昌)이 우리 선조 택당(澤堂) 선생을 사모해서 지은 집이라고 나에게 말을 아니 해도 내가 먼저 할 일이라. 오늘날 옛일을 생각하니 감격의 눈물이 자연히 흐를 뿐이다.
간성은 동해가에 있어서 문화가 보급되지 않았으니 궁벽한 시골이라 총명한 선비가 있은들 어디 가서 학문을 닦을 수 있겠는가?
죽헌공이 이것을 근심하더니 택당 문정(文靖) 선생이 현감으로 오셔서 학문을 권장하니 죽헌공이 수업을 받은 곳이 없는지라 집 앞에 두어 칸의 집을 지어놓고 현판을 부쳤으니 사모하는 뜻을 알겠도다! 이 집에서 날마다 총명한 선비들과 같이 선생의 서책을 토론하며, 또 시공 대부들과 같이 선생의 교화를 이야기하니 선생이 가신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그의 배우고자 하는 마음 천리 밖에서 이렇게 숭배하니 선생께서 남기신 덕을 넉넉히 알지로다.
세상 사람들이 돌에다 새기고 나무에다 새겨서 거사비(去思碑)를 세우는 것은 그분의 공덕을 사모하는 것이지 실지로 교육을 받은 마음에서 나오는 정성과 같겠는가? 전날 우암(尤菴) 선생이 택당공을 칭찬하였다. 택당공이 혼자 있어도 마음 가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옳은 이치를 논평하는 것이 선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하니 마음이 바른 군자가 아니면 누가 알겠는가? 참으로 어 죽헌공이 실지로 체험하였도다.
택당공의 옛집이 우리 시골에 있으니 동남(東南)은 늪이 화려하고 서남(西南)은 바람을 막아서 음양(陰陽)의 수가 창 밖에 완연히 보이니 그의 형상이 여도상(驪圖上) 대과를 지녔도다. 그대가 중수하는 경택 제도가 이러하니 나와 같이 우리 시골에 가서 택풍당(澤風堂) 옛 집을 자세히 돌아보고 그대로 지으면 한다. 다음날 혹시 공사로 그대 고향에 가게 되면 경택재에 들어가서 옛 이야기를 하지 않겠는가?
경택재 지은 것은 우리 문충공(文忠公) 할아버지의 시문을 보고 알았는데 그 다음 택당 자손들이 편지를 서로 주고받고 해서 여러 백 년을 소식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그대가 중수하고 내가 또 기문을 지으니 대대로 서로 좋아 지내는 것이 우리 두 집안 같음이 없다고 하겠다.
새로 쓴 현판을 석농(石農) 이시랑(李侍郞) 종우(鍾愚)가 썼고 내가 이렇게 특별히 위하여 글을 지어 주노라.
갑인년(1854년) 4월 초순에 택당 7세손 통훈대부 弘文館 부교리 이양신(李亮信)은 쓰노라

③ 이노영(李魯榮)의 경택재(景澤齋) 중수기(重修記)

공자의 말씀이 착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지초와 난초 밭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향기는 맡지는 못해도 착한 사람의 덕행을 본받는다 하니 친구 사귀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초목 가꾼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것이라 하였으니, 우리 선조 택당공(澤堂公)께서 신미년(1631년)에 간성 현감으로 부임하시니 그 지역이 바닷가 지역이라 조정의 문화가 아직 미치지 못함을 한탄 하시며 먼저 문묘의 퇴락된 것을 중수하시고 선비 정복흥(鄭復興)을 선생으로 하고 생도를 모집하여 초하루 보름에 문묘에 나가서 분향한 다음 친히 학문을 가르치시니 얼마 안 되어 문명의 기풍이 떨치어졌다.
이때 선비 어제창(魚濟昌), 어진창(魚震昌), 어익창(魚益昌), 윤익, 윤현(尹鉉), 김태원(金兌源), 최간(崔簡), 이지병 칠팔 인이 중용(中庸)ㆍ대학(大學)을 배워서 인심과 도심을 분석하며 경전을 학습하며 시(詩)와 문(文)을 모범으로 배우니 공(公)이 후생에게 학문을 권장하는 것이 어찌 이들뿐이겠는가?
슬프다! 공께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전근이 되시니 죽헌(竹軒) 어제창(魚濟昌)이 공의 덕화를 생각하여 여러 동지들과 함께 경택재(景澤齋)를 지었으니 이것은 택당 선생을 사모하는 뜻이로다.
그리하여 우리 이씨(李氏)와 대대로 서로 사이좋게 지내며 집안 선인들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가 상자에 가득하니 참으로 옛정을 있지 않는 군자로다.
중년에 경택재가 퇴락되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탄식 한지가 오래더니 금년 봄에 죽헌공(竹軒公)의 후손 주영(周永), 철원(哲元)이 택당공의 남은 덕화를 생각하며 선조님의 장한 모범을 이어 받아 이 집을 다시 중수 하니 주영(周永), 철원(哲元)은 그의 선조의 유업을 잘 지키는 분이로다.
간성(杆城)은 바닷가 인지라 어린 학도들이 글을 배울 뿐만 아니라 죽헌공과 여러분들이 착실하게 공부를 하여 성리학(性理學)까지 연구하는 것이 누구의 힘 인줄 알겠는가? 그 친구를 보고 그 초목을 보아서 감화 한다는 것을 성인(聖人)이 어찌 우리를 속이겠는가?
내 나이 지금 칠십사세라 다행이 주영, 철원을 서울 관사에서 만나 선조의 정의를 수백 년 뒤에 다시 계속하니 옛일을 슬퍼하며 지금 일을 생각하니 참으로 영광이로다. 재종제(再從弟) 노재(魯宰)가 마침 간성 고을에 부임하여 경택제를 중수(重修) 하는 역사를 감독하니 더욱이 다행한 일이로다. 어생(魚生)이 돌아가는 편에 이 글을 지어 보내노라.
갑인년(1854년) 6월 상한(上澣)에 택당 6대손 전 나주목사 덕수 이노영(李魯榮)쓰다

④ 김만근(金萬根)의 경택재(景澤齋) 중수기(重修記)

택당공(澤堂公)께서 글과 행동과 충성과 신의로서 세상에 높이 칭송을 받는 것이 지금 수백 년이 되도록 높은 명성이 남아 있으니 말이나 잘하고, 글이나 잘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니요, 모든 점으로 보아서 넉넉히 알지로다.
공이 이 고을을 다스리는데 교육을 먼저 힘쓰시니 총명한 인재들이 교육을 열심히 받은 지 몇 해 동안에 간성의 선비들이 지금에 와서 천민 성명의 학문을 아는 것은 공이 지도해준 힘이로다. 이러한 은덕으로 보아 집(景澤齋)이라도 지어 놓고 오래도록 높이 사모하지 않으리오. 그 뒤에 사실은 우리 외사촌 기문에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으니 내가 다시 말할 것이 없고 재와 기는 겉치장이니 진심으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선생의 행적을 배우는 것이 사모하는 실상이 되리로다. 참으로 이렇게 되면 간성의 선비가 장차 좋은 인재가 많이 날 것이니 이것이 어찌 택당공께서 부지런히 가르친 뜻이 아니라 하겠는가? 내가 이렇게 바라노니 지금 어생(魚生)이 돌아가는 편에 이렇게 써 주어서 경택재 벽에 붙이라고 하느니라.
을묘년(1855년) 8월 8일 전(前) 예조참판(禮曹參判) 안동 김만근(金萬根)이 쓰다.

↑↑ 택당 이식이 간성군수를 마치고 진부령을 넘어 한양으로 향하던 중 인제군까지 따라온 7~8명의 문인들에게 남긴 <진부령 유별시>. 지금도 돌에 새긴 시비가 진부령 정상에 세워져 있다.

ⓒ 강원고성신문


6. 거사비(去思碑) 및 유별시(留別詩)

① 어해훈(魚海勳)의 택당(澤堂) 이선생 거사비(去思碑)개수서(改竪序)

나라에 어진 정승과 용감한 장수와 이름 높은 사람과 이치에 밝은 사람이 연이어 나서 충성으로 임금을 보필하여 공로가 백성에게 고루 미치게 하는 자가 많아서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라야 될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씨왕조에 과연 택당공 같은 분이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택당 선생은 나라의 巨物이요 유림의 큰 선비로서 要職에서 奉仕하다가 간성현감으로 부임하시니 간성은 해변에 있는 벽읍(僻邑)이라 정치가 미치지 못하였는데 선생이 정치를 맡아 보면서 백 가지가 잘되어짐은 물론 그 중에도 교육에 힘을 쓰니 서촉(西蜀) 문옹의 교화를 우리나라에서 다시 보겠고 농업을 권장하니 백성이 배부르고 도로를 수선하니 교통이 편리하고 역부를 조금시키고 세금을 적게 거두니 백성들이 잘 살고 불량자가 양민으로 바뀌니 관청에는 일이 적고 백성들이 잘 살게 되더니 의외로 전임하여 내직으로 전직하니 떠나는 날 백성들이 길을 막고 눈물을 흘리니 옛날 어양(漁陽) 백성들이 장 군수(張郡守)를 보내는 눈물이 여기에 더 할 소냐!
문인 7~8인이 백여 리를 모시고 가다가 남계역(藍溪驛 , 인제군)에 가서 눈물을 머금고 배별(拜別)하니 선생이 이별시(離別詩) 2수를 지어 주는지라 경건히 받아 거사비를 향교 앞 대로변에 세웠으니 이것이 비록 적은 돌이지만은 옛날 현산(峴山)에 타루비(墮淚碑)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 뒤 삼백여 년 사이에 천지(天地)가 혁신되니 강산도 변하거늘 한 조각 빗돌이 어찌 보존되겠는가. 간성문묘 전교 김경명(金敬命)이 편지로 간성고사(杆城古事)를 나에게 물으니 내 십대조(十代祖) 미재공(眉齋公, 魚濟昌 호) 삼형제가 선생의 문하에서 학업을 받았고 구대조(九代祖)께서 택당 선생의 아드님 외재(畏齋)선생에게 학문을 받아서 많은 지식을 배워 세의(世誼)를 이루었다. 예나 지금이나 쳐다보고 내려다보니 감개무량하다. 간성고사는 조상들이 적어서 보관 되었다가 불행하게 난리에 타버렸다. 그 사이 수백 년이 흘렀으니 지나간 일을 어찌 쉽게 기억하겠는가? 내가 나이 九十 당연이라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 문득 택당 선생의 거사비를 생각하고 찾아서 다시 세울 생각으로 경명(敬命)에게 회답을 보냈더니 수고를 아끼지 않고 널리 탐문하여 찾아 기에 다시 세울 계획을 했더니 고성군수 이찬규씨가 소문을 듣고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였고 유림들이 합력하여 다시 1982년 임술 4월 26일(당시 전교 이백규) 향교 앞에 세웠으니 선생에 유풍여운이 백세가 넘도록 없어지지 않음을 여기서 보겠도다.
슬프다!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 물건은 남아 있어도 사람은 간 곳이 없으니 죽고 사는 이치를 뉘가 알겠는가? 지금 사람들은 거사비 다시 세우는 수고만 알고 선생이 많은 지식으로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하고 국가를 지성으로 받들었던 덕택은 알지를 못하는 도다. 이 碑石이 오래가고 오래가지를 못하는 것은 간성 유림(杆城儒林)이 잘되고 못 되는데 있고 간성 유림이 잘되고 못 되는 것은 인재(人材)를 많이 양성하고 양성치 못하는데 있으니 여러분들은 더욱더 힘써서 한정 없는 세월에 서로 전하기를 바라노라.

② 택당(澤堂) 이선생의 진부령유별시(陳富嶺留別詩)

한양으로 승차되어 가는 길 북풍이 불고,
눈덮힌 음산한 영마루 새도 넘기 험한 길.
이제 인정은 상하나 아쉬운 이별일세,
그대들 배 주리며 나를 따라 왔으나 나는 시를 남기노다.


7. 맺음말

지금까지 택당(澤堂) 이식(李植)선생의 출생과 간성고을 행적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2년 남짓 한 고을의 수령으로서 남긴 업적은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선생이 떠나가신지 어느덧 삼백팔십 년이 되어간다. 예나 지금이나 한 고을의 수령으로서 남긴 업적은 후세 사람들이 평가함에 따라 차이점이 있다고 하겠지만, 여러 문헌을 통해서 보더라도 선생의 간성고을 선정은 보기 드문 한 분의 고을원님이었다.
필자는 이 글을 접하면서 더욱이 머리가 숙여진다. 특히 지난 2013년 7월 무렵 청간정 중수할 때 택당 후손들(택풍당유적보존회)과 고성방문을 가지면서 만남이 지속적으로 이루고 있다. 그때 50여분들이 과거 조상의 발자취를 찾았던 시간은 지금도 돌이켜보면 너무나 기쁜 일이었고, 가슴 벅찬 일들이었다.

↑↑ 김광섭 칼럼위원(향토사학자)

ⓒ 강원고성신문


김 광 섭

- 향토사학자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 위원
- 고성향토문화연구회 사무국장
- 노리소리 강원두레 역사연구위원
- 논문 : 〈선유담의 고찰〉, <간성
의 만경대와 누정 고찰〉

강원고성신문 기자  
“행복한 고성 만들기”
- Copyrights ⓒ강원고성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강원고성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강원고성신문

 

이전 페이지로

실시간 많이본 뉴스

 

버스 무료 이용 속초까지 가능..

인구 감소·경제 침체 등 구조적..

외국인 계절근로자 활성화 상생협..

고성군 인구 3년 만에 27,0..

하천·계곡 불법행위 대대적 정비..

2026년 ‘고성 DMZ 평화의..

고성군수 선거 함명준·박효동 맞..

토성농협 조합원 자녀 장학금 전..

금강농협 다문화가정 위한 장학금..

2026년도 정부 보급종 콩 개..

최신뉴스

체류형 관광 기반 구축·기업..  

죽왕면과 고성군의 실질적 변..  

지역구 고성군의원선거 총 1..  

함명준 군수 예비후보 선거사..  

김진 군의원 예비후보 선거사..  

강원선관위 장애인단체 업무협..  

농가에 외국인 계절근로자 1..  

금강농협 조합원 자녀 장학금..  

농관원 6월 30일까지 하계..  

치매, 함께 보듬어야 할 이..  

자원봉사센터 취약계층 장애인..  

고성소방서 현장대응능력 강화..  

토성면 의약분업 예외지역 취..  

기하의 언어로 풀어낸 감정의..  

‘2026 콩닥콩닥 탐사단’..  



인사말 - 연혁 - 찾아오시는 길 - 광고문의 - 제휴문의 - PDF 지면보기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구독신청

제호: 강원고성신문 / 사업자등록번호: 227-81-17288 / 주소: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간성로 29 2층 / 발행인.편집인: 주식회사 고성신문 최광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광호
mail: goseongnews@daum.net / Tel: 033-681-1666 / Fax : 033-681-1668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강원 아00187 / 등록일 : 2015년 2월 3일 /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최광호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