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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비바람 속에서 60년만에 핀 대나무꽃

윤승근 고성군수 당선인은 누구인가

지조·인내·절개 꽃말… 30년 정치 ‘오직 한길’
가난 딛고 자수성가… 서민적이며 진솔한 사람

2014년 06월 10일(화) 14:51 123호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이번 6.4지방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고성군수에 당선된 윤승근 당선인은 ‘지조·인내·절개’라는 꽃말을 갖고 있는 대나무 같은 사람으로 평가된다. 대나무는 60년만에 꽃을 피운다는 점에서 올해 우리나이로 60세인 당선인에게 마침내 ‘관운(官運)’이 트였다는 풀이도 가능하다.
윤 당선인은 또한 원칙을 지키면서도 의리를 중시하고, 정이 깊어 겉으로는 냉정하면서도 남몰래 아파하고 눈물 흘리는 인간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고생을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자신을 치장하거나 포장하는 재주도 없다. 식사를 할 때도 까다롭게 따지지 않으며, 매일 똑같은 된장국에 밥을 말아 먹어도 행복해할 줄 아는 서민적이며 진솔한 사람이라는 게 주위의 평가다.

가난한 어린 시절… 어머니
고향 지키며 자수성가

이러한 심성은 그가 나고 자라온 과정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된다. 윤승근은 1955년 3월 7일 아버지 윤득순과 어머니 정명월의 슬하에서 4남2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부모가 혼인을 하고 일가를 이룬 곳은 거진읍 송포리였으나, 6.25전쟁 막바지 동부전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자 가족들이 잠시 간성읍 봉호리의 외가로 이주해 살고 있었는데, 그 시절에 태어났다.
그 후 전쟁이 끝나고 민정이 시작되면서 다시 거진읍 송포리로 이주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가끔 목수일도 하던 부친은 윤승근이 8세 되던 해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는 우리나라의 많은 어머니들처럼 갖은 고생을 하며 억척스럽게 6남매를 키우고 천수를 누리다 세상을 떠났다.
윤승근은 당시 대부분의 농어촌 가정이 그랬던 것처럼 어려서부터 소를 먹이고 꼴을 베고, 볏단을 나르는 등 집안일을 해야 했다. 학창시절엔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개구쟁이였다. 한때 축구에 심취해 학교 축구선수로 활동하다 꿈을 접었으며, 고등학교 때는 학생회장을 맡기도 했다.
거진초교와 고성중고를 졸업한 뒤 군복무까지 마친 그는 고향에 정착해 농약가게, 지물포, 보험회사, 광산회사, 자동차학원, 의류판매점 등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며 실물경제를 익혔다. 학창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김순매 여사와 결혼까지 했으나,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모든 것을 자수성가해야 했다. 그의 신혼시절의 일화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거진읍에 살림을 차렸는데, 방 구할 돈이 부족해 옥탑방을 빌렸다. 말이 방이지, 옥상에 있는 창고를 방 비슷하게 개조한 것이었다. 스티로풀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전기장판을 깔아 난방을 대신했다. 자리끼로 물을 떠다 놓은 게 아침이면 꽝꽝 얼었다. 우리 부부는 이불 속에서 체온으로 서로를 녹여주며 잠을 청하곤 했다.’ <윤승근 저서 ‘동해바다에 희망을 띄우고’ 91쪽>

이처럼 가난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결혼 생활을 통해 그는 1남1녀의 자녀를 두고 화목한 가정을 꾸려갔으며, 고향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사업을 하던 중 마지막으로 뛰어든 화장품 대리점을 인수하면서 마침내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기반을 잡게 됐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현실화되는 순간이었다.

↑↑ 윤승근 당선인이 정치인으로 첫 발을 내디딘 것은 제4대 강원도의원에 당선되면서부터다. 사진은 도의회 본회의장에서 발언하는 모습.

ⓒ 강원고성신문



JC활동·원전 반대투쟁
정재철 전 장관과 인연

윤승근의 개인적인 삶은 가난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한 이야기로 정리되는데, 그의 사회활동과 정치인으로서의 삶은 지조와 인내가 점철된 파란만장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가 처음 사회활동을 한 것은 JC활동을 통해서였다. 1991년 고성JC회장을 맡으면서, 당시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던 원자력발전소 사업이 우리지역에서 추진되자 결사반대 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반대활동에 앞장섰다. 윤승근이 지역사회의 일꾼으로 깊이 각인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이어 1996년에는 원전과 핵폐기장을 결합한 대규모 원전단지 건설이 추진되자 도의원 신분으로 삭발까지 감행했으며, 도의회 임시회에서 신상발언을 통해 고성 원전단지 설치의 부당함을 알리기도 했다.
그가 정치에 입문한 것은 27세 되던 해인 1981년 실시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때였다. 당시 정재철 전 장관이 처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를 했는데, 이때 인연을 맺은 뒤 환갑을 앞 둔 지금까지 30여년간 당적을 바꾸지 않고 오직 한 길을 걸어왔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정치판에서 이처럼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대한 한결같은 지조와 절개를 보여준 정치인은 고성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무척 드문 경우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상대 정당 지지자들로부터는 ‘꼴통’이라는 말도 듣곤 하지만, 오직 하나의 정당에 대해 보여준 변치 않는 충성심은 많은 주민들에게 신뢰와 믿음을 주었다.

↑↑ 윤승근 당선인이 정재철 전 장관과 맺은 정치인연은 그의 아들인 정문헌 국회의원과 이어지고 있다. 윤 당선인의 자서전 출판기념회에서 정의원과 대화하는 모습.

ⓒ 강원고성신문

윤승근은 그 후 평범한 당원 신분으로 10여년간 지방선거와 총선 및 대선에서 당 소속 출마자의 당선을 위해 노력하다, 40세 젊은 나이에 직접 정치에 뛰어 들어, 1995년 6월 제4대 강원도의원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정치인 윤승근의 앞날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곧이어 치러진 제5대 도의원선거에서 27표차로 아깝게 패한 그는 이후 잠시 정치에 손을 떼고 사업에만 집중했다. 그러던 중 당에서 연락소장직을 맡김에 따라 또다시 10여년간 정당 지역책임자로 ‘남의 선거’를 위해 성심을 다해 뛰었다. 이 부분은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윤승근이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 정치를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윤승근이 다시 정치에 직접 뛰어든 것은 제5대 도의원선거 낙선 후 10여년만인 2008년 함형구 전 군수가 구속돼 보궐선거를 앞 둔 시점이었다. 당시 윤승근은 연락소장을 맡으면서 지방선거와 총선, 대선 승리를 위해 활동했을 뿐 자신이 직접 선거에 출마할 생각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더욱이 당에서는 공천받은 사람이 불미스럽게 중도하차했다는 이유로 보궐선거 공천을 배제하기로 결정한 상황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한 주민은 “역대 2명의 군수가 모두 불미스러운 일로 중도하차하자, 돈 문제에 얽매이지 않을 사람이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리고 유력한 몇몇 정치인들이 출마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자연스럽게 연락소장을 맡았던 윤승근의 출마를 권유하는 형국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해서 2008년 고성군수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윤승근은 전국적으로 화제가 됐던 ‘1표차 낙선’을 기록했으며, 곧이어 2010년 실시된 6.2지선에서도 208표차로 석패하고 말았다. 2010년 지방선거는 당 공천의 영향도 있어서 여론조사 결과 15%이상 크게 앞섰으나, 선거일을 닷새 남겨 놓고 소위 ‘돈봉투’ 사건이 발생한 것이 패배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경찰조사 결과 아무런 혐의가 없는 것으로 결론났으나, 이미 선거가 끝난 뒤였다. ‘운이 없었다’는 말로 넘기기에는 너무도 억울하고 가혹한 시련이었다.

만 40세에 도의원 당선
억울한 낙선 … 원칙 중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제 윤승근은 끝났다’고 했다. 두 번이나 연거푸 군수선거에서 떨어졌으니 주민들의 마음이 이미 떠났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윤승근은 ‘시련은 있으나 포기는 없다’는 심정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의 사업체를 재정비하고 지역사회에서 봉사활동도 꾸준하게 이어갔다. 고성중고총동문회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강원고성신문을 창간하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우고 주민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지속적으로 가졌다. 그리고 마침내 이번 6.4지선에서 세 번째 도전 끝에 주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군수에 당선됐다.
윤승근은 성격상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음해하는 일을 하지 못하다보니 정치인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정치를 권모술수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윤승근을 ‘바보’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그는 지난 두 번의 군수선거에서 자신을 찾아와 요구조건을 내걸고 들어주면 지지하겠다고 한 여러 단체들에게 번번이 거부의사를 보여 표를 잃기도 했다.
2010년 선거캠프에 참여했던 한 주민은 “단체에서 찾아오면 일단 알겠다. 노력하겠다 정도라도 반응을 보여 달라고 신신당부했으나, 법적으로 될 수가 없는 일인데 어떻게 해주겠다고 하느냐, 나보고 표를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냐며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다”고 회상했다.

↑↑ 고성군 여성회관에서 진행된 김장나누기 행사장에서 배추를 절이는 작업을 돕고 있는 윤승근 당선인.

ⓒ 강원고성신문

이상 살펴본 것처럼 윤승근 당선인은 주위의 곡해와 오해 속에서 억울함을 참고 인내하며 자신의 소신을 꿋꿋하게 지켜온 불굴의 정치인이다. 원칙과 의리를 중시하고, 대쪽같은 성격인 그가 공무원들을 통솔하며 ‘잘 사는 고성, 행복한 고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극복해야할 과제도 있다.
우선 공무원 및 주민들과 보다 소통하고 화합하는 정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군수라는 자리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키면서도, 고성지역 주민 모두를 위해 일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동안 주위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윤 당선인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보내온 주민들은 윤 당선인이 성공한 군수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도록 행정에 부담을 주는 개별민원은 자제하고 시스템을 통해 풀어나가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최광호 기자

강원고성신문 기자  
“행복한 고성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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