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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부터 군사기능 상실하고 행정 위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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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의 고성이야기<82> 조선시대 간성의 읍치경관 연구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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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08일(화) 14:48 153호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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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간성읍 복원도. | ⓒ 강원고성신문 | |
2. 성곽(城郭)
1) 간성읍성의 배경
어느 집단, 혹은 국가이든지 처음에 쌓은 성은 개인의 재산이나 목숨을 지려는 목적보다는 신성한 국역이나 지배자의 거주지를 지키기 위해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여러 종류의 방비시설을 구축하였다. 특히 목재, 흙, 돌 등을 이용한 城의 축조는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부족국가시대에 이르러서야 시작했을 것이다. 성읍국가라는 말도 이 시대의 城과 국가의 관계를 잘 보여 준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주변국으로부터 많은 침략을 받아왔고,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많은 성곽들이 조성되었다. 특히 국경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음을 이를 반증해주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까지 관방시설로서 기능을 가지고 있던 성곽은 일제강점기 이후 근·현대에 이르러 급변하는 군사적·사회적 환경변화에 따라 그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1909년에서 1915년까지 전국적인 고적조사를 실시하여 우리 전통건축 및 유적·유물의 소재와 가치 파악은 물론 조선의 국가통치의 상징적 시설이었던 관아 철거를 위한 근거를 만들고자 하였으며, 이를 통해 많은 수의 관아시설들이 이 시기에 군청, 경찰서, 학교 등으로 변용되었다.
당시 많은 읍성들이 철거되어 도로가 개설되거나, 성벽 돌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져 제방의 축대 또는 신작로 개설에 사용되는 등 급격하게 훼손되어갔다. 이러한 훼손일로의 성곽문화재는 1990년 이후 지표조사를 통해 각 지역에 분포한 성곽과 문헌기록상의 성곽을 확인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2000년대 이후 각 지역별 성곽 발굴 조사를 통해 점차 심층적인 연구가 진행되게 되었다. 이후 각 지역별 성곽에 대한 정밀지표 조사와 발굴조사들이 꾸준히 진행됨에 따라 새로운 자료와 연구 성과들이 축적되고 있으며, 이러한 조사를 바탕으로 성곽의 보존 및 정비 복원 방안에 관한 연구들도 계속적으로 발표되고 있다.
2) 간성읍성 위치 및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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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간성읍 푯말. | ⓒ 강원고성신문 | | 간성읍성은 낮은 야산이나 구릉지의 능선을 따라서 1,165m 둘레의 축조한 평산성에 해당한다. 평지성과 산성을 합친 개념의 평산성은 우리나라 읍성의 일반적인 형태였다. 이것은 읍성이 군사적 기능과 행정적 기능을 함께 한 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기한 바와 같이 간성읍성은 조선 후기에는 군사적 기능을 상실하고 행정적 기능 위주로 운영되었던 듯하다. 이것은 강원도 관방 시설의 일반적인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임진왜란과 2차례의 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관방 정책은 도성 수비와 북방 방어 위주로 시행되었으며, 또 동해안에 왜구의 출몰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간성읍성은 행정구역상 고성군 간성읍 하리 12번지에 위치한 고성군청을 중심으로 그 일대를 포함하여 위치하고 있으며, 1917년 간성읍 도로확장 때 동문과 서문을 철거하였고, 그 석축의 일부가 곳곳에 남아 있다. 이 읍성은 옛 간성군의 치소 역할을 하였으며 지금도 간성초등학교의 둘레에는 낮은 구릉이 있는데, 이것이 그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동문지와 서문지는 7번 국도가 가로질러 읍성 내부에 간성읍사무소, 춘천지방법원 고성등기소, 고성문화원, 고성교육지원청, 농협, 우체국 등 현 고성군의 주요 건물이 많다.
이 읍성은 7번 도로를 중심으로 좌우의 구릉지에 축조되었으며, 현재의 고성군청이 자리 잡고 있는 좌우의 능성과 그 반대편에 자리 잡고 있는 읍사무소 뒤편을 둘러서 돌아가는 능선을 따라 축조된 것이다. 외곽 남동쪽으로는 간성교회와 간성제일교회가, 남서쪽으로는 간성천주교성당이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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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간성읍 북벽. | ⓒ 강원고성신문 | | 북동쪽으로는 고성군수 관사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 관사 북쪽으로 잘 다듬은 화강석 면석이 남아있다. 그리고 필자가 확인한 결과 석축이 잔존하고 있는 구간은 간성제일교회 기단부이다. 약 35m 길이로 성의 윤곽을 엿볼 수 있는 구간이다. 그리고 土築이 확인 되는 부분은 간성교회부근과 간성제일교회 서쪽, 간성천주교회에서 서문까지, 충혼탑 뒤편에서 군청 주차장 부근까지, 군청 북쪽 끝에서 관사까지의 구간이다. 조사과정에서 일부 어른들이 말하기를 군청 뒤편의 성벽은 주차장을 건설하면서 약 100m 가량이 멸실되었다고 한다.
2003년 육군박물관 유적지표조사보고 조사에서 유물로는 기와류 11점, 토기류 3점이 채집되었으며, 기와류에는 배면에 어골문이 시문된 3점과 연화문이 시문된 2점, 포함하여 무문기와 6점이다. 그리고 회청색 경질로 뚜렷한 토기류 3점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분석한 결과 어골문과 연화문이 함께 시문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전기 이후에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양상은 안성 망이산성望夷山城)에서 출토된 峻豊四年(963)명 기와와 공반된 기와들과의 문양이 간성읍성 출토 기와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간성읍성에 관한 문헌기록은 근대에 들어와 쓰인 기록이 전부인데, 이를 바탕으로 문헌을 검토하여 보면, 현재까지 간성읍성에 대한 古기록은 처음 축조 시기는 정확하게 파악되고 있지 않고 있다. 다만 추측으로 보건대 고려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학계에 보고된 바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문헌으로 보면 문종 원년(1451)에 강원도 동해안 지역의 다른 6개 지역 읍성과 함께 수축된 것으로 기록화 되어 있다. 위의 기록으로 보면 간성읍성은 규모가 작았던 성을 증축하여 큰 읍성으로 확대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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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고성신문 | 김 광 섭
- 향토사학자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 위원
- 고성향토문화연구회 사무국장
- 논문 : 〈선유담의 고찰〉, <간성
의 만경대와 누정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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