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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내 아버지, 그 남자 <11>

한류작가 김하인 장편소설 / 삽화 정재남

2015년 02월 17일(화) 09:17 140호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Hodie mihi, cras tibi

종합병원 CT촬영실 모니터에는 직경 십 센티미터와 오 센티미터의 흰 반점 두 개가 선명하게 간에 잡혔다. 그리고 우측 신장에도 오 센티미터의 전이성 반점이 찍혀나왔다.
촬영이 끝난 후 그는 방사선 의사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안면이 있던 의사는 대답을 주저했다. 그가 채근하자 의사는 얇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제가 보기엔 간암 4기입니다. 자세한 것은 담당의사에게 물어보십시오!
일순간 그의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암?! 그것도 간암 4기라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두 발로 딛고 선 바닥이 한 자나 푹 꺼지는 것 같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그의 무릎이 좌우로 엇갈려 꺾였다.
다른 병원 검진결과도 같았다. 간암 4기라는 확진.
마음 한 구석 오진일 거라고 믿고 싶은 그의 의지가 물에 적신 습자지처럼 돼버렸다.
어느 순간일까. 불현듯 그는 가톨릭 대구대교구청 본당 뒤편 성직자 묘역 입구에 새겨져 있다는 그 경구가 뇌리를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이탈리아어. 주검이 산 자에게 던지는 그 말이 그의 입 속에서 긴 탄식이 되어 음울한 신음소리로 되뇌어졌다.
가족들 얼굴이 쉼 없이 눈앞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신기할 지경이었다. 앞에 있는 모든 물상은 흐려지고 페이드아웃 돼버리는데 가족들 얼굴만 또렷이 보이니 말이다.
인체 내 장기 중에서 가장 크다는 간. 침묵의 장기라고 할 정도로 증상이 가장 늦게 나타나는 대신 나타났다면 치료가 어렵다는 건 상식이다.
그는 삼 년 전 종합건강검진을 받았었다. 그땐 전혀 잡혀지지 않았었다. 엑스레이 촬영이 정밀하지 않기 때문에 간과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사 얘기가 무책임하기 짝이 없게 들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이름도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구로구에 소재하는 회사 지정병원을 찾아가 따져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명백해진 사실은 그 자신이 빠르게 목숨이 소진되고 있다는 것이고 그동안 몸속에 시한폭탄을 넣고 다니면서도 초침이 째깍거리는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는 것을 탓하는 수밖에는.
내가 간암 말기고…… 내가 죽는다고?
그는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거울 속에 비친 그의 모습은 어제처럼 일 년 전처럼 멀쩡했다. 얼굴은 병색 하나 없고 붉은 빛까지 머금었다. 그때 통증이 우연히도 대가리를 치밀었을 뿐 일주일 넘도록 어디 한군데 아픈 데도 없었다. 그런데도 머잖아 죽는다는 명확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어이가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구나 자기에게 닥쳐올 불행을 가볍게 생각하고 싶기 마련일 것이다. 예전부터 병의 조짐이 진작 있었다고 해도, 뭔가 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어도 다른 곳으로 원인을 전가시켜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그때그때 무심코 지나쳤을 것이다.
막상 선고가 떨어지고 나자 예전에 때때로 목덜미와 어깨에 느껴지던 묵직한 피로감과 식욕부진, 구역질, 소화불량 등의 자잘한 증상들이 떠올랐다.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요즘 격무에 시달리다보니. 전날 잠을 모자라게 잤더니 몸이 찌뿌드드하고 컨디션이 엉망인 게지, 아무래도 잠시라도 짬을 내 사우나탕에라도 들러봐야겠군,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지난 이십 년간 약을 팔았었기에 그는 간암 4기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의사 말마따나 간을 절제해서 생존할 수 있는 기회를 이미 놓쳤다. 해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간 이식뿐인데 적합여부를 따져 공여자를 찾는다는 게 쉽지 않을 뿐더러 막대한 수술비며 수술 이후의 예후치료 또한 만만찮은 공력과 돈이 들어간다. 더군다나 신장으로 전이가 된 게 확실하고 척추도 전이가 의심된다는 의사 말은 뭘 말하는가. 병원으로선 현재 그 어떤 방법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의사 얘기를 넋 놓고 듣는 동안 그는 박 과장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가 부장으로 승진되었던 칠 년 전, 박주환 과장은 서른여덟 살이었다. 박 과장은 영업부서 직원들 중 자타가 인정하는 가장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밤 열 시를 마악 넘겨 회사 사무실에 놓고 간 물건이 있어 그가 들어왔더니 박 과장 혼자 책상에 앉아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서류 파일을 옆에 가득 쌓아놓고서.
-어이, 박 과장! 그만 퇴근하지 그러나. 웬만하면 함께 나가세나.
-그럼 그럴……까요?
그는 큰 덩치의 박 과장이 의자에서 일어나 서류가방에 서류 파일 몇 개를 집어넣는 것을 지켜보았다.
-뭘 그렇게 작성하던 중이었나?
-아, 이거요! 위장약 자룝니다. 특히 겔포스와 암포젤엠, 그리고 우리 회사 제품인 지큐, 이 세 가지 제품에 대한 십대 병원 점유율을 월별로 비교 분석해서 작성해 올리라는 전무님 지시가 있었습니다. 내일 오후 회의 들어가기 한 시간 전까지 책상 위에 갖다놓으라고 해서요.
-그래, 그 지시를 언제 받았는데?
-어제 출근하자마자 받았습니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 내내 이사님 모시고 지방과 평택 공장에 다녀오느라 손도 못 댔습니다.
-그거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시간도 촉박하고 말야.
-집에 가서 어떻게든 해봐야죠 뭐. 전무님 좌우명이 ‘안 되면 되게 하라!’ 아닙니까.
-풋! 특전사도 안 나온 양반이 그 말을 너무 우려먹는군.
그가 중얼거리는 사이 박 과장은 노트북 가방을 어깨에 메고 서류가방을 들었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두툼한 서류 파일 대여섯 개를 한꺼번에 가슴에 안아들었다. 서울 강남지역 담당 과장이었기 때문에 다른 부장 직속이긴 했지만 탐나는 부하직원이었다. 회사 중앙문을 빠져나온 그는 담배를 빼 입에 물려다가 곁에서 걷는 박 과장을 돌아보았다.
-한 대 줄까?
-부장님 저 담배 끊은 지 한참 됩니다.
-아하, 그렇지. 난 왜 그걸 자꾸 잊어먹는지 몰라. 끊은 지 얼마나 됐지?
-칠 년 됩니다. 대리 마악 달고 끊었으니까요.
-그래,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지. 근데 난 작심삼일이야. 완전히 포기했어.
-계기가 문제겠죠 뭐. 저는 제 사촌형님이 폐암진단 받고 젊은 나이에 사망하시는 것을 보고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때 제 아이들이 네 살, 두 살일 때였는데 그때 전 제 아이들 앞에서 사진을 함께 찍으며 맹세를 했었죠. 네 녀석들 다 키울 때 까지는 담배 끊고 건강을 지키겠다고. 그때부터 매일 이른 아침 유산소운동도 병행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른 아침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 아파트 단지와 공원을 두 바퀴씩 도는 조깅 말입니다. 지금까지 그 두 가지를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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