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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내 아버지, 그 남자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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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작가 김하인 장편소설 / 삽화 정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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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5월 31일(화) 10:52 171호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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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고성신문 | | 그래. 그렇게 인정하고 거기에 충실하게 살면 그만이다. 개인이 노력해서 성공하고 돈 많이 벌고 말이다. 그러다가 지금 그처럼 퇴직과 암 선고라는 심각한 브레이크가 느닷없이 걸린다. 기존의 목표가 사라지고 내가 걸어온 길과 삶에 대해 본질적인 의문이 생긴다.
사람이 사는 게 대체 뭔가? 부모의 역할과 존재에 대해, 아내와 자식들의 존재도 다시금 다른 본질적 시선으로 들여다보게 된다. 나와는 대체 어떤 관계이고 나의 삶에서 그들은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하고 말이다.
예전엔 바삐 일하느라 무심코 지나쳤거나 인생 대충 그런 거 아니냐, 하고 넘겨버린 것들이 의문이 되어 생겨날수록 하나씩 급브레이크가 걸린다. 뭔가 미심쩍고 거슬린다.
자연에 순응하고 사회시스템에 적응하며 그가 팔십 넘어까지 무난히 살 수 있었다면 그냥 그러려니 그렇게 지나갔겠지만. 자식과 아버지라는 이 너무나 당연한 관계가…… 그 관계를 이 사회체제가 시스템적으로 떠받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면서 급격하게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그런 생각이 안 드는가. 모두들 완전한 가족과 가정의 행복이 곧 개인의 삶을 가장 완벽하게 완성시킨다는 그림을 걸어놓고 나이가 차거나 직장을 잡으면 결혼하라 애 낳아라 부추기는데…… 막상 분위기에 편승해 남자가 그대로 하면 아주 답답한 결과에 부닥치게 된다.
돌이켜보자. 남자로서 불평불만을 가질 필요도 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처자식을 먹여살리는 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굴절되던가. 하루하루 구체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 곳곳에서 총각 때와는 비교할 수 없게 비겁해지고 비굴해진다. 어떤 모욕을 받더라도 참아야만 하고 양심을 져버려야 하며 비리도 눈 감고 저질러야만 한다. 총각일 때는 내 혼자서 입에 풀칠 못하랴, 하며 사표를 내던졌겠지만 가장이 된 남자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
왜냐? 나뿐만이 아니라, 내 자존심과 양심 때문에, 내 자식들까지 배를 곯아야 하고 양질의 교육을 포기해야 하는 사태가 여지없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나를 포기하느냐, 가족을 포기하느냐, 이는 세상의 모든 가장들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딜레마다.
가장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자존심과 양심과 지성과 인격을 포기한다.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을 하게 된다.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은 자식 뒤로 미루고 판단은 유보한다.
이제 분노가 또렷이 보이는가.
애를 낳아 가족을 이루고 가정을 만들자마자 가장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상황으로 만들어가는 이 사회의 구조적 분위기…… 그런 시스템이 체제로 작동하고 있다. 내가 처자식이 있으니 섣불리 저항하지 못할 거라는 약점을 이용하여 내게 부당함을 강요하고 굴종을 강요한다.
하루하루를 일로 혹사시키면서도 반항하거나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시스템이 사회체제고 이 세상의 판때기라고 생각한다면 가장으로서 지금껏 살아왔던 자로서 그의 피해망상일까? 과연 그러한가?
어쨌든 말이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더럽고 치사해서 못 해먹겠다, 라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게 되는 게 일상적 습관이 된다. 그게 누적돼 한 남자의 피곤한 삶이 되고 고단한 인생이 되며 비겁하고 부정직한 삶이 된다.
그렇다면 가장인 남자 목을 죄는 개목걸이와 줄이 자식과 아내이어야만 하는가? 왜, 수많은 평범한 가장들이 하루에도 열두 번 넘게 직장에 사표를 내던지고 싶어도 어린 자식들을 떠올리고 꾸욱 참아내야만 하는 걸까.
자식은 너무나 생생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도 직장과 사회에 순응하고 적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엄혹한 현실인 바에야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진다.
왜 그렇게 살아야만 하나?
난 그렇게 목매여 질질 끌려가게 살지 않기 위해서라도 혼자 살겠다, 좋다. 결혼은 하되 아이는 안 낳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의식 있는 사람이 선택하는 삶의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행위, 라는 말이 성립이 된다.
남자라는 게 무슨 죄야? 가장인 게 무슨 죄냐고? 주위에서 모두가 결혼해라 애 낳아라 부추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내가 허덕거리며 힘들어하니까 모두들 나를 무능한 놈 취급하고 죄인취급까지 해?
본인의 선택이긴 했어도 억울함과 불만감은 생활 곳곳에 마음 바닥에 그득 쌓일 것이다. 그런 의식이 싹 트면 기존에 당연하게 여겨온 모든 관습과 체제에 거부감이 들고 비위가 상하기 시작한다.
결혼? 자식? 결국 그것들이 한 남자에게 무한책임만 지우는 것으로 현실을 철저히 강제한다면 어느 누가 섣불리, 혹은 당연하다는 이유만으로 냉큼 가정을 꾸리겠는가.
자식이 주는 삶의 기쁨보다 삶의 구속과 괴로움이 확실히 더 크다면 남녀 구분 없이 사람들은 본인에게 그때그때 필요한 섹스만 해결하려 하지 않을까? 자식을 낳지 않는 무수정의 사랑과 두 사람만의 삶을 선호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천 번의 구호와 만 번의 시위보다도 자식을 낳지 않는 것만큼 반사회적이고 반체제적인 것도 없다.
일견 이런 부정적이고 불순해보이는 사고가 논리적 설득력을 지녔다면 그 기저엔 한 남자의 생물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약점을 이용하여 누군가 사회적 이익을 챙기게 되는 구조적 모순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돈 많이 벌면 장땡이고 못 벌면 무능력자고 사회적 왕따!’라는 경쟁논리를 캐치프레이즈로 그동안 인간의 권리와 존엄에 대한 제 관점을 누군가 끊임없이 흩트리고 무화시켜왔지만.
분명한 건 처자식을 가정경제의 볼모로 삼는 시스템이 사회체제에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런 시스템을 디자인한 일부 계층이 피라미드 상층부를 점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경제를 누가 점유했고 기득권층은 어떤 세력이냐, 하고 따지는 것은 정치와 역사 쪽으로 심도 있게 논의가 번져나가야 하겠지만. 그 얘긴 너무나 장황하고 가방 끈이 아주 긴 인문사회적 식견과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를 필요로 할 것이다.
어쨌든 분명한 건 생물인 인간에게 탑재된 핵심 본능은 두 가지다. 자기보호본능과 종족번식본능. 한 개인으로서 자존심과 인간다움을 지키며 살고 싶은 욕구와 아내와 자식들로 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싶은 종족번식본능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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