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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내 아버지, 그 남자 <27>

한류작가 김하인 장편소설 / 삽화 정재남

2016년 08월 08일(월) 17:54 176호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아버지…… 이해해 주십시오. 전 그렇듯 못난 놈이지만 아버지 앞에선 영락없는 철부지자식인 모양입니다. 어리광이라고 생각하시고 어여삐 봐주십시오. 감히…… 감히…… 제게 주어진 운명을 아버지 탓으로, 아버지 책임으로, 원망을 쏟아놓으려고 했던 저는…… 아직도 한참이나 사람이 덜 된 모양입니다. 여전히 어리석고 생각이 못 미치는 무지렁이인 모양입니다. 아버지……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제가 너무 다급하고 무서워서…… 두려워서…… 아버지께 분별없이 동동 매달렸습니다. 그저 옛날처럼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커다란 성인인 제가 매달리면 어디 아버지 어깨와 팔일지라도 온전하시겠습니까. 부러지고 꺾이실 것인데…… 그걸 미처 못 깨닫고 결국…… 아버지 가슴만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이마를 잔디에 찧으며 대성통곡했다.
솔잎 사이로 불어내려오던 한 줄기 바람마저 뚝 끊겼다. 원래부터 사람과는 무관하다는 듯 가을 햇살은 저 홀로 밝고 눈부셨다. 유치원생이 켄트지에 그려놓은 것처럼 파아란 하늘 중심에는 흰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서 볼륨 있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의 큰 울음소리에 놀란 듯 산의 소나무는 더욱 푸르렀고 단풍잎은 피처럼 붉었다. 처연한 울음소리가 바람결에 퍼지다가 천천히 잦아들 즈음 노란 새 한 마리가 묘소 근처 높다란 갈참나무 가지 위에 내려앉았다. 주먹만한 노란 새는 그를 등지고 해지는 쪽을 향해 앉아, 끄끄끄…… 끅끄 끄끄끄끄…… 하며 구슬프게도 울었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아이구, 우리 수범이아범 아닌감. 근디 워쩌? 우짠 일로 니가 평일에 집에 다 왔떠노? 미리 기별도 넣지않구스리?
거실에 앉아 곶감을 만들던 노모는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를 향해 부리나케 몇 발자국을 뛰어나왔다.
-부산에 출장왔다가요. 다행히 일이 잘 풀려 빨리 끝났습니다. 그래서 올라오던 차에 어머니를 뵙고 가려고 .
-그랴? 그라문 오늘 내로 갈끼가? 그렇다문 좀 이르긴 하다만 내가 저녁상부터 후딱 차리구.
-아뇨. 하룻밤 자고 갈 겁니다. 내일 오전에 출발하면 됩니다. 회사엔 오후까지 들어가면 되니까요.
그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산 천안호두과자 상자와 한과꾸러미를 거실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 우선 절부터 받으시소.
-야야, 명절도 아닌데 큰절은 무신.
노모는 손을 홰홰 내저었다. 하지만 그는 큰절부터 넙죽 드리고 감껍질이 신문지 위에 널려있는 거실 바닥 한 켠을 골라 가까이 앉았다.
-목 마르쟈? 참말로 배 안 고프냐?
-네, 점심을 늦게 먹어서 괜찮습니다.
노모는 그가 괜찮다는 데도 냉장고문을 열어 드링크음료를 꺼내서는 굳이 아들 손에 쥐어주었다.
-근디 니 얼굴이 많이 축났구만도. 볼태기살이 쑥 들어간 것이. 워쩌? 요즘 회삿일이 많이 힘든 가보제?
-핫하하하. 회삿일이 다 그렇죠 뭐. 일부러 살 좀 뺐습니다. 빠지니까 어떤가요? 한창 젊었을 때처럼 인물 나보이지 않습니까. 양복도 한결 태가 나고.
-보기는 그렇기도 하다만……. 나이 들문 적당한 나잇살이 있는 그기 보기 좋은 기라. 요즘 사람들은 살하고 무신 원수진 거 같더구만서도. 노상 살 뺀다문서 묵지도 않고 쌩닫이로 굶꼬스리. 허지만서두 말이다. 그거 알고보문 다 헛방이데이. 그저 먹을 일이 있을 땐 양껏 묵어두는 게 최고인 기라. 그기 다 영양분이 되고 힘으로 돌아오니께로.
-네, 잘 먹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어머니 건강은 어떠세요? 전화도 자주 못 드려 죄송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이번 길에 꼭 들러 찾아뵈야겠다 작심을 했습니다만.
-나? 내사 별로 어데 아픈 데도 없고 상태가 좋대이. 우리 친구 할마시들이 말하길 나가 팔자 젤로 늘어져따 안카나. 자식과 손주 새끼들 무탈하고 똑똑하지러. 그 흔한 무릎 관절통이나 허리통도 여즉 없는 거 보문 신통방통이지. 밥도 땡겨서 잘 묵고. 잠도 씩씩 잘 자기 땜시로 아마도 내가 젤로 오래 살 거라 하는구만. 농방집 할미는 내가 백 살은 너끈할 거래나 뭐라나. 에이그, 쑹악한 할망구들. 백 살이 뭐여 백 살이. 들을 때마냥 징그럽꼬도 싫더구만.
-왜요? 당연히 장수하셔야지요.
-에그, 아이다 아녀. 살아도 적당히 살아야제. 머리 끄텅부터 발가룩지까증 온통 허옇게 돼서 노망이라도 나문 우짤라고. 내는 그저 욕심 안 부리고 딱 구십까지만 살 끼라. 그래야지만 수범이랑 승윤이한테서 우릴 증손자들을 볼 수 있으니께로.
-그럼요. 암요. 증손자들까지 보셔야지요…….
-그랴 그랴. 그랄라문 사람은 지 살던 한 곳에 나무맨키로 찰싹 붙박여 살아야 하는 기라.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적당한 일도 계속하문서 말이다. 니 혹시……? 또 서울 가서 살자는 얘그 할려고 요렇게나 갑짝시루꿍 들이닥친 것은 아이것제?
-……네.
-그랴 그랴. 이젠 내도 너캉 그런 싱갱이 하기는 지긋지긋하다 아이가. 내는 참말로 흙 하나 없는 서울서는 이렇게 말짱히 살아버틸 자신이 없는 기라. 니는 혼자 사는 낼 위한다꼬 늘상 같이 살자하는 거겠지만서도 우예겠노? 니는 거기 살아야 하고 내는 여기 살아야 살 수 있는디. 안 글나?
노모는 외아들인 그가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꺼내던 얘기를 다시 꺼낼까 싶어선지 미리 단단하게 입을 봉해둘 심산이었다. 노모는 익숙한 솜씨로 감을 깎아나갔다.
-어떻게…… 여기 금년 농사들은 다 잘됐습니까?
-하무. 다들 풍년 들었다 카데. 나락도 잘되구, 고구마도 잘되구, 감자도 씨알이 굵구…… 깨도 꽈악 들어찼구……. 봐래이 이 감도 대감 탕건 맨쿠로 큼지막하고 야물시러우믄서 뾰족하잖녀?
-네에…… 그렇긴 하네요. 근데 설마 올해 힘에 부치시게 밭농사 지으신 건 아니지요?
-어데. 쪼만하게, 그저 내가 운동하기 딱 알맞게꼬롬 쪼맨하게 지었다. 내 혼자 묵고 또 수범이네 나눠주면 딱 맞을 만큼만.
-절대 욕심내시면 안 됩니다. 무리하시면 운동이 아니고 병납니다.
-그람, 그라문. 니가 워낙 진득하게 얘그하니 내사 올해는 맘 딱 고쳐묵고 그 말 듣기로 했다아이가. 평생 놀리던 몸을 갑자기 안 놀리문 그 편한 게 오히려 병을 내니깨로 내는 딱 심심하지 않을 만큼만 짓는다카이. 내 한창 때 밭농사에 비하문 그야말로 새발의 피고 콧구멍만 하지러. 참…… 나 정신 좀 보거래이. 애어멈과 손주들 소식 물어봐야지 생각해 놓구스리. 그랴, 모두들 잘 지내지?
-그럼요. 애들 공부 열심히 하고 애엄마 살림 잘 꾸려나가고요.
-그랴 그랴. 아암, 그래야지러.
노모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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