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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내 아버지, 그 남자 <29>

한류작가 김하인 장편소설 / 삽화 정재남

2016년 11월 23일(수) 14:53 183호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초등학교 동창생들

밤 여덟 시가 넘어가는 시각. H읍에서 오일장이 서는 장터 끝, 오순물로 넘어가는 재 직전에 위치한 옛장터식당 방에는 십여 명의 초등학교 동기들이 모여 있었다. 사십대 후반부에 접어든 그들은 삼겹살을 굽는 연기 속에 소주잔과 맥주잔을 주고받았다.
그가 미닫이문을 밀고 들어가자 저마다 반갑다며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고향에서 일치감치 터를 잡은 친구들이었다.
이원학원 원장인 동창회장 채병탁, 대구와 경북 북부지역에 장의물품인 수의를 공급하는 사업을 하는 허주직물 대표 허정렬, 이웃한 J시에서 김지호치과를 운영하는 김지호, 이 지역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이 된 우희봉, 예전에 고교 교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농사를 짓는 박동춘, S시 시청에 근무하는 익영이, 비석 일을 하는 재원이, 호프집을 운영하는 총무인 기배를 비롯해서 현철이, 상태, 윤태, 성수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그는 악수를 나누었다.
여자동창인 인순이와 현옥이와는 눈인사를 나누었고 오늘 모임의 주인공인 웅천이와는 가볍게 포옹까지 했다. 천이백 두나 되는 돼지를 기르는 양돈업을 크게 하다가 일을 정리하게 된 웅천이가 호탕하게 그에게 맥주잔을 건넸다.
-아니, 너부터 한 잔 받아라. 오늘 자리가 네 자리인 만큼.
-자리는 무슨…… 아무튼 고맙다. 근데 야하, 너까지 오늘 보게 될 줄 몰랐다. 정말 반갑다.
-나도 반가워. 근데 어떻게 일은 접게 됐냐? 규모가 기업형이라 쉽지 않았을 텐데.
-뭐 그렇게 됐다.
-괜찮냐?
-물론이지. 나라고 뭐 평생 돼지똥만 치우며 살란 법 있냐? 봐봐라. 여기 냄새 좀 맡아봐. 내 몸에서 돼지똥 냄새 안 나냐?
-…… 안 나는데?
-여기 고기 굽는 냄새 때문인가 본데. 십몇 년 간 돼지만 키워봐라. 내장까지 다 냄새가 밴다. 지긋지긋하던 차에 잘 때려치웠지. 자, 그 얘긴 그만하고 내 술 한 잔 받아라.
-그래…….
그는 술을 입가로 가져가면서 그를 부르는 쪽으로 가서 앉았다. 치과의사 김지호였다.
-어떻게 쟤 우리 나이에 이직을 해도 괜찮은 거냐?
-믿는 구석이 있으니 하는 거겠지 뭐.
왼쪽에 앉은 동창회장 병탁이가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댔다.
-서울 쪽 친구들로부터 네 얘기 들었다. 좋은 소식이 아니어서 다른 친구들에겐 말 안 했다. 아직 너 회사 그만둔 거 여기 친구들 아무도 몰라.
-그래……?
그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정말 너 괜찮은 거냐?
-그럼 괜찮지. 요즘 한 집 건너 명퇴세상이잖아. 조만간 자리 잡을 테니 너무 염려 하지 마라.
-근데 너 신경 써서 그런가 몸이 좀 말랐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괜찮다. 운동 좀 열심히 했더니 지방살이 빠져서 그렇지 뭐. 보기 싫으냐?
-아니, 딱 됐다. 딱 보기 좋아.
-어이, 친구! 왜 그리 오랜만에 고향 나들이를 하셨는가? 효자 소리 챙겨 들으려문 홀어머니를 자주 찾아뵈어야지.
사업을 크게 하는 친구답게 정열이 목소리는 굵고 호탕했다. 그 친구는 맞은편 좌석에 앉더니 그를 향해 목소리를 은밀하게 낮추었다.
-그래, 이번엔 약 좀 가지고 왔냐?
-약? 약은 무슨 약?
-야, 인마! 비타민제랑 영양제 가지고 오랬잖아. 특제로.
-아……! 그거……? 이 년 전 동창회 때 했던 지나가는 말을 넌 아직도 안 잊어먹었나보네. 바쁘게 사업한다는 녀석이.
-야, 인마! 너 정말 약 안 가지고 왔어? 네 차 뒷트렁크에 잔뜩 실렸을 거 아냐. 어서 가지고 와.
다른 친구가 끼어들었다.
-저 자식은 돈도 많은 놈이 왜 공짜약을 저렇게나 밝히는지 몰라.
-그게 다…… 없이 살아서…… 내가 어릴 때 너무 없이 살아서 그런 거 아니냐. 난 돈 주고 사 먹는 약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체질상 약발이 안 받는다. 내 몸엔 공짜약이 직방이다.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넉살 좋은 허정렬 말에 그와 친구들은 한바탕 웃었다. 웃자고 한 얘기였다. 초등학교 동창들 술자리는 원래부터가 반이 욕이고 반이 낭자한 웃음소리였다. 어린 시절까지 들춰가며 욕을 하고 욕을 얻어먹는 쪽도 그저 함께 즐거워진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유달리 술을 빠르게 많이 마시고 있는 불콰한 기색의 웅천이를 그가 쳐다보자 동창회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속이 상해서 저럴 거다. 두 달 전쯤 쟤네 돈사에서 큰 불이 났었거든. 천여 마리나 되는 돼지들 중 삼분지 일을 화재로 끄슬려 먹고 난 뒤 저 녀석 양돈업에 완전히 의욕을 잃어버렸다. 자식처럼 기르던 돼지들이 삼백 마리 가까이 불길에 날려버렸으니 그만 오만 정이 다 떨어진 거지.
울산 쪽에 친누나가 사는데 거기 울산공단은 수입이 안정된 현대차 직원들이 밀집해 사는 곳이라고 하더라. 거기 제법 규모가 되는 노래방이 자리 났다고 해서 저 녀석이 그걸 해보겠다고 저렇게 가는 거지. 벽촌에서 돼지를 기르던 녀석이 최신가요 제목을 손님들에게 줄줄 읊어대야 하는 노래방이라…… 도우미 아가씨, 아줌마들 라인도 꿰차고 있어야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다고 하던데. 과연 저 녀석이 그런 일을 잘해낼 수 있을는지.
오늘 술값을 진작부터 제가 내겠다고 설레발이었지만 지호가 이미 계산했다. 좋게 잘 돼서 가는 것도 아닌데 술 한 잔이라도 사줘서 보내야지 그냥 얻어먹을 수는 없다는 거지. 근데 난 쟤 울산 가는 거 첨부터 말렸다. 이런 시골에서 무슨 뾰족한 수가 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고향에서 타격을 입고 정나미가 떨어져 타지로 나간다는 게 자꾸만 맘에 걸리더라고. 딱 한 번 맘먹고 거기까지만 말했었다. 아무리 동창이고 친구라고 해도 제 인생길을 지가 간다는 데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는 정 많은 동창회장의 침울한 얼굴을 돌아보며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 모두들 얼굴에 벌겋게 취기가 올라 떠들썩하게 입담질을 하고 있었다. 이 정도 살았으면 인생이 고단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누구나 아저씨고 중년인 까닭에 제 인생은 제가 책임지고 살아내야 한다. 그저 친구의 새로운 사업이 잘 되기만을 빌 뿐이었다.
술 한 잔에 아귀처럼 달라붙는 일상의 걱정들을 가뿐히 숨길 만한 내공 정도는 터득한 친구들의 술좌석은 시종일관 떠들썩했다. 그는 가능한 술을 덜 마시기 위해 친구들이 건네오는 건배 제의에 슬쩍슬쩍 구색만 맞추었다. 그는 오른쪽에 앉은 지호를 돌아보았다. 알코올이 조금만 들어가도 얼굴은 물론이고 목까지 다 붉어지는 지호는 머리칼이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반백을 넘겼다.
-너 머리가 참 많이도 셌다?
-내 대그빡? 허옇게 안 셀래야 안 셀 수가 있겠냐? 예민한 사람 입 속에다가 쇠붙이를 수도 없이 갖다대야 하는데. 휴우, 말도 마라. 각종 세금은 또 얼마나 많이 때려대는지. 요즘 매일같이 우체국 직인 찍혀 날아오는 종이 받아보는 것마다 스트레스다.
-그래도 사회적 대우 받으면서 너만큼 안정적으로 돈 많이 버는 친구가 어딨냐?
-돈은 무슨. 골머리 썩는 만큼 아쉽지 않을 정도 겨우 버는 거지 뭐.
-참, 지난달 말에 우리 어머니 치아 봐드렸다며? 고맙다.
-뭘 그런 거 가지고. 웬만하면 너도 어머니 임플란트 해드려라. 내가 공임 빼고 원가로 싸게 해줄테니까.
-글쎄…… 어머닌 별 불편이 없다고 하시던데.
-야, 임플란트는 잇몸에 철심을 꽉 박아 원래의 이처럼 완전히 고정시키는 거고 틀니는 끼웠다 뺐다 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아귀가 덜거덕거리기 마련인데 어떻게 그게 차이가 없겠냐. 음식 저작하는 느낌부터가 판이하게 다른데.
-그래……? 해드리면 좋긴 하겠지만. 일단 어머님과 상의를 해봐야겠지. 하시겠다면 내가 따로 연락하마.
미닫이문 입구 쪽에서 갑작스럽게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야하, 이게 누구냐? 너, 경희 맞지?
-그래. 다들 너무나 오랜만이다.
-그렇게 연락 때려도 동창회 한번 안 나오던 네가 오늘 웬 일이냐. 일단 이리로 어서 와 여기, 내 옆에 앉아라.
품위 있는 정장차림과 잘 가꾼 용모로 나타난 한 여자 쪽으로 이목이 쏠렸다.
이경희였다. 그와는 초등학교 시절 같은 리의 한 동네에서 살았었다. 경희네 집은 탱자울타리를 한 슬레이트집이었고 그의 집은 작은 기와집이었었다. 저만큼의 자리에 앉아 친구들에게 휩싸여 있는 그녀를 보고 있는 그의 감회가 남달랐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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