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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내 아버지, 그 남자 <30>

한류작가 김하인 장편소설 / 삽화 정재남

2016년 12월 08일(목) 09:37 184호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어린 시절 기억이지만 그는 경희를 좋아했다.
경희도 싫지 않아하던 내색이었는데 초등학교 육 학년 초반기에 그녀 집이 대구로 이사를 가면서 연락이 끊겨버렸었다. 학교를 졸업 못하고 갔으니 초등학교 동창회 명부에 오르지 못해서였을까. 아님 연락을 했어도 본인 스스로 나오길 불편해했던지 간에 삼십 년이 훨씬 넘어서야 그녀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반가운 마음에 따스해졌다.
-완전 귀부인이시구먼. 우리 여자 동창들 중에서도 이렇게 우아하고 교양 있는 미인이 있었는지 나도 몰랐네.
-야하, 너는 어떻게 몸매도 처녀 때 탄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냐? 진짜 술 마셔서 그런 게 아니라 나 좀 전에 경희 들어올 때 한 눈에 뻑 갔다. 어떻게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게 나랑 악수 한번 대차게 하자.
입담 좋은 남자동창 한 명이 그녀 손을 잡고 감격스럽다는 듯이 흔들었다. 다른 여자 동창들 중에서 입을 삐죽거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녀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준 것에 대해 즐거워하고 반가워했다. 그녀는 오늘 함께 한 남녀를 통틀어 가장 눈에 두드러졌다.
-아…… 너도 와 있었네.
-그래…… 오래간만이다. 잘 지냈니.
그와 그녀는 웬만큼 거리를 두고 서로를 확인한 뒤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눈인사만 나눴다. 어릴 때 키도 크고 참 예뻤는데. 그 반짝이던 이목구비는 세월에 스러지지 않고 원숙함으로 살아 있었다.
-경희한테 내가 전화 넣었다. 민호도 참석할 거라는 전화를 넣으면서도 과연 쟤가 올까 싶었는데…… 훗후후, 내 예상이 빗나가진 않았네.
동창회장이 그의 귀에 넌지시 비죽한 선웃음을 흘려넣었다.
-내가 뭐? 경희에 대해 뭐가 어떻다고?
-어떻다니? 너, 오 학년 때 기억 안 나냐? 화장실 회벽마다 ‘오 학년 이 반 반장인 김민호랑 부반장 이경희랑 둘이서 연애하는 거 난 다 봤다. 얼레리 꼴레리!’라고 써 있던 거.
-야하, 놀랍군. 넌 어떻게 그런 세세한 것 까지 기억을 다 하냐? 난 다 잊어버렸는데. 근데. 그렇다면 혹시 네가 그런 얼토당토않은 낙서질을 한 장본인 아니냐?
-내가? 아냐. 내 기억이 맞는다면 저기 앉은 성수가 그랬을 걸.
-그러냐? 근데 저 자식은 우리가 그때 뭘 했었다고 그런 터무니없는 낙서를 도배질했냐.
-왜애, 그런 얘기 충분히 나돌 만했었지. 너희 둘은 노상 학교 파하고 집에 갈 때 언제나 산 하나를 넘어서 함께 갔잖아.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란히 같이 아카시아 잎과 꿀밤나무가 우거진 산길 사이를 둘이서 가로질러가는데 그런 소문이 안 도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너희 둘이 그때 사귄 건 사실이잖아.
-야야, 무슨…… 밤톨만한 꼬맹이들이 사귀긴 뭘 사귀냐. 그저 반장이고 부반장이니까 아무래도 같이 하교하는 시간이 많았을 뿐이야. 그리고 지금 우리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런 얘길 하고 있냐? 말만한 애들도 있고 남편도 있을 텐데.
동창회장은 옆자리에 앉은 그만 들을 수 있도록 그의 귓바퀴에 입술을 갖다댔다.
-경희, 재작년에 마취전문의인 남편과 갈라섰다. 아이 둘도 시댁 쪽에 남기고. 미국서 공부한다지 아마. 쟤는 지금 구미에서 약국하면서 혼자 살아.
-그래……? 흐으음, 안된 소식이네. 난 예전에 쟤가 효성여대 약대 다니고, 대구 쪽에서 이름난 개인병원집안 의사와 결혼했단 얘기까진 들은 적 있었는데…….
-그래도 봐라, 우리 동기 여학생들 중에서 확실히 곱고 우아한 여자가 경희다. 저 옆얼굴에 흐르는 턱선 좀 봐라. 어디 하나 처진 데 없이 은은하게 품위가 있고 앉은 자태 자체가 고아하잖아.
한쪽에서 다른 동창들이 왁자지껄 끼어든다.
-야, 경희야. 희봉이 옆에 앉지 말고 저기 지호 옆에 가 앉아라. 의사와 약사 한 세트가 무지 잘 어울릴 거 같다.
-얌마! 미인을 지키려면 총 한 자루는 있어야지. 그러니 경찰인 내가 딱인 게야.
-웃기고 있네. 여기 누구 총 없는 놈 여기 있냐? 여자동창 세 명 빼고는 다 타고난 물총은 다리 사이에 달고 있다.
-저 자식은 툭하면 음담패설 쪽으로 화제를 몰아가네. 야! 자중 좀 해라. 이 자리에 의사, 약사, ‘사’자 돌림 두 사람이나 앉아있는데 대화 수준을 높여야 할 거 아냐. 지금부터는 욕하고 음담패설 빼고 중년의 격 있는 얘기를 품위 있게들 나누자고.
-지랄을 해요 지랄을. 음담패설 빼면 제일 사족을 못 쓰는 놈이.
-야, 그런데 어떻게 ‘사’자가 둘이냐? 셋이지.
-누구?
-나 있잖아. 보험설계사.
-읏핫하하하. 맞다 현옥이. 그러고 보니 열네댓 명 동창생만 모아도 ‘사’자 돌림 셋이면 어디 내놓아도 우리 절대 꿇리진 않겠다.
-그렇다면 나도 ‘사’자다.
-어이, 수의 파는 허 사장! 자네가 어떻게 ‘사’잔가?
-야. 나 오늘 처음으로 밝히는데 작년에 나 장례지도사 자격증 땄다. 내 일에 필요해서 말야. 내가 허 씨라 허언만은 죽어도 안한다는 거 모두들 잘 알지? 우리 집 가훈이 정직이란 것도.
-그래. 허 사장 말이라면 믿지. 그렇다면…… 어쨌든 요즘 개나 소나 전부다 ‘사’자 돌림 직업을 가진 게 확실하구만. 근데 난 청소부를 왜 환경미화원이라 개명했는지 이해가 안 가. ‘환경미화사’ ‘환경관리사’ ‘환경클린사’ 좀 듣기 좋아?
-야, 이 자식아! 그럼 내가 개냐?
-엇, 지호네. 야, 치과의사가 똥개 값이 아닌데 어떻게 개일 리가 있겠냐, 당연히 소지.
-소라면 우리 집 축사에 지호 구십두 마리가 들어앉아 있다.
-그럼 이빨 아프면 너희 집 찾아가면 되겠네?
-그래. 얼마든지 와라. 풍만한 젖소 젖 맘껏 물려줄 테니까. 근데 낼 지호 한 마리 도살장에 보내야 하는데. 이거 어떡하나?
-어히구, 저 미친놈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떠들썩하게 꼬리를 무는 친구들의 대화에서 연신 폭소가 터졌다. 초등학교 동창들 모임자리는 언제나 그렇듯 그렇게 유쾌할 수가 없었다. 잘나거나 못나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평생이 백수거나 상관없이 친구는 친구였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기억이 가슴 속 강물이 되어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펄떡거리는 강물의 숭어처럼 가슴이 생기차게 살아움직이는 모임은 초등학교 동창모임 빼고는 없을 것이다.
이들과 매년 한두 번씩이라도 이렇게 만나 세상의 고단함을 함께 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언제 봐도 정겨운 얼굴들. 다정한 목소리들. 어렸을 때 어깨동무를 하고 공을 차며 놀았듯이 그렇게 나이가 육십이 되고 칠십이 되어 고향 정자나무 그늘 아래 마주앉아 장기내기를 하고 짝을 지어 게이트볼도 치면서…… 그렇게 함께 삶을 석양처럼 저물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그윽하니 좋겠는가. 그는 친구들의 우스갯소리에 웃고는 있었지만 가슴 한 켠은 서늘함으로 눈물겨웠다.
-차…… 한 잔 할래?
일차가 끝나고 이차로 노래방을 향해 동창들이 몰려갈 즈음 경희가 손목시계를 보며 그에게 의향을 물어왔다. 밤 열한 시를 마악 지난 시간이었다.
-글쎄…… 이 시간대에 커피를 마실 공간이 있으려나?
H읍 중심로는 소주와 맥주를 파는 집과 노래방, 슈퍼마켓을 제외하고는 모든 상가에 불이 꺼져 있었다. 차가워진 밤바람 때문에 두 사람이 함께 건너다보는 시골 거리는 어둡고 휑했다. 을씨년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그래. 그렇긴 하다. 점촌 쪽으로 가면 카페가 있겠지만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겠지. 어때……? 잘 살고 있는 거야? 작년 연말인가 네가 제약회사 부장을 하고 있다는 얘길 들었었는데.
-그래. 사람 사는 거야 다 비슷하지 뭐…….
-네 모습 말야. 변하긴 했지만 낯설지가 않다. 어릴 적 눈매며 눈빛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아.
-그런가? 나, 많이 탁해지고 세파에 찌들었을 텐데.
-아냐. 근데 어째 내 안부는 안 물어보는구나?
-……응?
-너도 들은 게지? 나 이혼했다는 거.
-그래…… 오늘 자리에서야 들었다. 그래서 좀 놀라기도 했고…….
-이젠 많이 괜찮아졌어. 어떻게 살든 장단점이 있는 거니까.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지니까 의외로 좋은 점도 많이 있더라.
-그래…….
-너, 기억하니? 우리 오 학년 때 여름방학 직전의 하교길 말이야. 그때 나 뱀에 물렸었잖아. 그래서 네가 내 발목에 난 상처에 입을 대고 독을 빨아내줬던 거. 내 종아리도 손수건으로 칭칭 동여매 꽉 묶어주었었고.
-그럼. 생각나지. 그때 때마침 지나가던 탈탈이 경운기를 잡아 뒤에다가 널 태우고 읍내 병원까지 함께 갔었지.
-그래. 맞아. 그 다음날 하고 사나흘 간 그때 네 입이 퉁퉁 부었었어. 독을 뱉어내느라 그 독이 네 상처 난 잇몸에 퍼져서.
-훗후후후, 그랬었지.
-그 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살면서 난 문득문득 네가 떠오르더라. 아니, 젊었을 때는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었어. 근데 나이를 이렇게 먹고 나니까 새삼스레 그런 생각이 자주 나더라고. 신기하지?
-……!
-그때 왜 네게 고맙다고 얘기하지 못했을까. 후회가 되더라. 그래서 동창회장으로부터 네가 고향에 왔다는 얘길 듣고 오늘 나름 용기를 내보았어. 사실 내 처지며 주변머리가 동창들 술자리에 끼어들 만큼은 못되잖아. 내가 오늘 여기 온 이유는 너를 만나서 네게 그때 일이 고마웠다고, 고맙다고 말을 해주기 위해서야. 너무나 늦어버렸지만…… 이해해 준다면 지금 내 마음 받아줄래? 그때 일 고마웠어. 정말 고마워.
-그때도 난 아무렇지 않았었는데…… 아무튼 네 맘이 그렇다면 그 인사 받을게. 나도 정말이지 너무나 오랜만에 오늘 널 만날 수 있어서 무척이나 뜻 깊고 반가웠다. 나도 고맙다.
-뒷말은 좀 그러네. 삼십 몇 년 만에 만나 처음이자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것 같아서…… 어째 좀 싫게 느껴지네. 너, 나 오늘 보고 다시 못 볼 거 아니잖아.
-그럼. 물론이야. 또 봐야지.
그녀는 손가방을 열고 명함집에서 명함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연락해 줄래? 나…… 막상 너 만나면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되게 맘이 밝아지고 편해져서 좋다. 너무나 오랜만에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참 좋아.
-나도 덕분에…….
그녀는 가야겠다고 했다. 술은 마시지 않았다며 도로변에 주차된 자신의 차를 향해 앞서 걸어갔다. 요즘은 길이 잘 뚫려 그녀가 살고 있는 구미 금오산 쪽과 이곳 고향과의 거리는 삼사십 분 남짓이다. 차 문을 연 뒤 그녀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았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가로등 불빛 아래 서 있는 그의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참으로 많은 여운을 주는 맑고 촉촉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맨 뒤 그를 향해 손을 들어보였다.
-재미나게 놀아. 친구들한테 인사 못 하고 가서 미안하다고 전해주고.
-그래. 천천히 안전운행 해라.
-그래. 안녕!
-잘 가!
그녀는 차를 출발시켰다. 느린 속도로 H읍사무소 앞쪽인 구릉을 넘어 사라지는 차를 그는 지켜보며 한참이나 서 있었다. 마음 한 구석이 푸르게 시렸다.
삶의 아픔일까 서러움일까. 늙어가고 죽어가는 모든 감정들이 가슴 속에서 연한 푸른빛을 새로이 머금어내는 듯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겨울이 머잖았다. 차갑고도 쓸쓸한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일 거란 생각을 했다.
그는 친구들이 떠들썩하게 노는 노래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혼자 잠들어 계신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뚜걱 뚜걱 뚜걱……. 차도 다니지 않고 사람도 다니지 않는 텅 빈 아스팔트를 밟는 그의 구두굽에서 깊은 정적감이 묻어났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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