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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내 아버지, 그 남자 <42>

한류작가 김하인 장편소설 / 삽화 정재남

2017년 12월 19일(화) 11:11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몽매난망(夢寐難忘)
- 2011년 12월 27일

경희는 날자를 곰곰이 되씹어본 순간 머릿속을 뭔가가 서늘하게 가르고 지나가는 듯 했다. 아니, 지난 달 11월 19일이라면! 그날은 고향 H읍에서 초등학교 동창모임이 있었던 날이다. 그때 그녀는 단 한 사람에게만 자신의 명함을 건네줬던 기억을 떠올렸다. 김민호에게만. 그렇다면 지금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그것도 남의 지갑 속에 든 명함을 보고 강원도에서 낯선 사람이 전화를 걸어올 정도라면?
-하, 할아버지! 그 사람 이름이 김민호씨 아닌가요? 사십대 후반 남자인데요, 눈썹이 아주 짙고 눈매가 서글서글한데…….
-맞소. 생김새가 댁이 말하는 거와 얼추 비숫하우다.
-근데 대체 그 사람이 지금 어떻게 됐다는 거죠?
-글씨, 일을 당한 나도 당최 영문을 모르겠쑤다. 지금부터 한 시간 쯤 됐을려나. 내가 그 사람 묵은 방이 하도 조용혀서 들여다봤더니만 그 사람이 완전히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지 뭐요. 얼굴에 황달기가 진하게 배였고 배에 복수까지 불룩허니 차오른 걸 보니 아마도 큰 병이 든 듯싶소만…….
-그, 그럴 수가! 그 사람 키가 한 백칠십오 정도 되죠?
-키가 훤칠해 보였으니 그 정도는 될 거요. 눈썹도 숯검댕이처럼 짙으니께로 댁이 말한 그 사람이 틀림없을 성싶소만.
그녀는 입속이 빠짝 말라왔다.
-그, 그래서요? 얘기를 더해 보세요.
-글씨 뭐 깊은 산 속에서 민박을 치고 사는 늙은이 내외가 뭘 어찌해볼 요량도 없구 해서리 내, 119를 급히 불렀소이다. 그래서 119가 방금 읍내 병원 쪽으로 그 사람을 싣고 갔소. 그러구 나서 내가 그 사람 묵은 방을 확인하다가보니 그 사람이 들고 온 가방도 여기 그대로 있고…… 깔았던 이불을 개키다보니 이불 안에 떨어져있던 그 사람 지갑을 내가 이렇게꾸롬 발견한 거구…….
-거기…… 그곳이 어딘가요?
-여긴 강원도요. 강원도 고성이고 냉천리라 하는 곳인데……. 혹시 건봉사 와보셨소?
-아뇨.
-그렇구만. 아무튼 말이오. 냉천리는 건봉사 근처의 자그마한 산동네요. 근데 병원차가 그 사람을 간성읍으로 싣고 갔는지 속초 쪽으로 태우고 갔는지는 내도 잘 모르겄소. 생각하기로는 간성에도 웬만한 병원이 있으니 거리가 가까운 그쪽으로 실어갔을 성싶소만. 내 쪽으로 실어간 쪽에서 연락이 오문 내 다시 그쪽으로 연락을 넣도록 하겠소. 흐음……!
- 자, 잠간만요! 할아버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있는 그녀 표정은 창백했다.
이 일을 대체 어떻게 하나. 그녀 머릿속에서 복잡한 생각들이 빠르게 회전했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치면 어렵잖게 찾아갈 수 있다. 목적지가 강원도 고성군이라 하니까…… 그렇다면 동쪽으로 우리나라 최북단이다. 일단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가다가 여주 쪽에서 영동고속도로 갈아타야 한다. 그녀는 노인이 일러주는 주소지를 메모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뭘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지난 달 중순에 고향에서 봤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해보였던 그였다. 그런데 얼굴에 황달기가 있고 배에 복수가 차올라 있다? 그동안…… 민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그녀는 휴대전화를 열어 고향 동창회장 이름을 찾았다. 일단 걸려온 전화 내용을 회장에게 얘기하고는 ‘아무래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는 그 남자가 민호 같아 보이는데…… 나 혼자 가보기가 그러니까 시간을 내서 함께 가줬으면 한다’ 고 말해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불현듯 스치는 어떤 생각에 휴대전화를 닫았다.
얼굴과 온몸에 노란 황달기가 있고 복수가 두드러지게 찼을 정도라면 그건 말기 암증상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아무도 모르는 그 외지고 낯선 곳을 찾아들었다면 분명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곡절이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다시 문을 닫아 잠근 다음 약국 셔터문을 내렸다. 약국을 대신 봐줄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하루나 이틀 약국을 비우게 됐다고, 약국을 좀 봐달라고 했다. 약대 동기로 삼십 분 거리에 떨어진 대구에 사는 친구가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자 그녀는 차를 몰고 십 분 거리에 떨어진 아파트로 돌아가 간단하게 짐을 챙겼다.
그녀가 뒷좌석에 가방을 던지고 차에 시동을 건 시각은 10시 30분……. 그리고 승용차가 대관령을 통과하고 강원도 속초를 지나 고성군 간성읍에 소재한 세진병원 앞마당에 그녀 차가 도착한 시각이 오후 2시 20분이었다.
-그분…… 혹시 말 못하세요? 아니면…… 정신에 무슨 문제가 있으신 분이셨어요?
그녀를 맞은 간호사의 첫 질문이 그랬다. 응급처치로 읍급실에서 그가 의식이 돌아왔을 때 이름과 주소를 아무리 물어도 그 사람이 아무 대답이 없었다고 했다. 그저 응급실 천장만 바라보고 표정 없이 눈만 끔벅끔벅 거리다가 다시 눈을 깊게 그러감았을 뿐 지금까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응급실 시트를 비워놓기 위해 입원실로 옮기려하자 그가 완강하게 반항했다. 의사가 하는 수 없이 강제로 진정제주사 처방까지 했다는 것이다.
중간 규모 급의 개인병원이었다. 이 층 끝 방 안에 환자복을 입은 병색으로 얼굴빛이 파리해진 그가 누워 있었다. 다량의 수면효과가 있는 주사를 맞아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것일까. 그는 링거 병을 달고 시트 위에 반듯하게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아니길 빌고 빌었지만 아!…… 역시나 김민호였다. 그녀는 그의 모습을 본 순간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가 언제 집을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온몸에 병색이 완연했고 부랑인 이미지까지 배어들어 있었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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