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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내 아버지, 그 남자 <44>

한류작가 김하인 장편소설 / 삽화 정재남

2018년 02월 21일(수) 17:01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너 혼자 나 몰래 어디론가 사라질 생각 같은 거 절대 하지 마. 밖은 온통 눈 천지야. 네가 묵었던 그 집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다면 내 차로 널 거기까지 편안히 데려다줄 테니까. 내 말, 알아들었지?
-내가 가긴…… 어딜 가냐?
-뭐어?
그가 비죽한 선웃음을 입가에 흐릿하게 지었다.
-네가 왔잖아. 그래서…… 나는 꿈꾸는 것처럼 좋은데…….
-어히구! 그러셔?
그녀도 어이가 없어 그를 따라 피식, 소리를 내 웃었다.
건봉사는 간성읍에서 차로 삼십 분 거리다. 우리나라 최북단이고 비무장지대가 코앞이라 군부대가 산재한 곳이다. 산야에 쌓인 적설량이 이십 센티미터가 넘었지만 ‘건봉민박집’으로 가는 도로사정은 생각보다 좋았다. 비상시 이동을 최우선으로 하는 군인들이 눈이 쌓이는 족족 중장비를 이용해 도로를 말끔하게 밀어놓은 덕분이었다.
차는 민박집 근처까지 수월하게 진입했다. 뒤편에 낭떠러지 형태의 계곡이 있고 앞쪽으로 아름드리 적송이 우거진 설경이 펼쳐진 민박집은 민가와도 외따로 떨어져 있어 산장 느낌을 주었다.
-그러슈. 그렇게 허긴 하시우만. 댁 혼자 다시 와서 묵는다고 했으면 내 어젯밤에 받은 그 돈 다시 돌려주고 거절했을 것이오. 손님이 어젯밤 늦게 들어 어둡기도 하고 산속인지라 내가 반갑게 맞아들이긴 했소만……. 하지만서두 오늘은 부인께서 같이 묵는다 허니 내가 그렇게 해주는 것이오. 몸도 성치 않으신 분이 어쩌자고, 쯧쯔쯔쯔……. 기왕지사 또 우리 집에 찾아드셨으니 박정하게 손을 내저을 순 없는 노릇이고.
육십대 후반의 푸근한 인상을 한 주인 할아버지였다. 이게 대체 무슨 괴이쩍은 일인가 싶은 못미더운 눈치가 아직 남아있었지만 새로이 나타난 이경희의 옷차림과 교양 있는 말투에 적잖게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고맙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곁에 있으니 다른 민폐는 없도록 하겠습니다.
-민폐는 무신……. 우리 집은 혹시나 시간도 대중없게 들이닥칠 손님들을 위해 방 세 개는 늘 장작불로 달궈놓고 있소이다. 손님이 묵던 방 아궁이에도 한 시간 전 장작 대여섯 개를 집어던져 놓았으니께로 몸을 지져도 좋을 것이오.
산세를 닮은 주인장 마음처럼 그의 옷가방이 놓인 방은 윗목 아랫목 할 것 없이 방바닥 전체가 뜨끈뜨끈했다.
-차암, 저녁식사는 하셨소들? 안 들었으면 할멈에게 얘기혀서 지금이라도 내오도록 하고.
-아닙니다. 병원 앞쪽에 국밥집이 하두 맛있다고 해서 먹고 들어왔습니다.
-아, 제천댁 소머리국밥집 말이우? 네. 거기가 이 일대선 유명하지요. 양도 푸지게 담아주구.
-캔맥주 있습니까?
-그렇긴 하오만…….
-아니, 무슨 술이야?
-괜찮아. 너도 왔는데 한 모금만 마시지 뭐. 주인 어르신,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캔맥주 몇 개 하고 안주 될 거 좀 가져다주십시오. 마른 멸치라도 좋습니다.
-헛허허허, 그러시우. 돈 받고 하는 일이니 수고로울 거 까진 없지만…… 몸이 그러할찐데…… 어떻게 괜찮으시겠수?
-네, 전 흉내만 낼 겁니다. 방문을 활짝 열고 보는 커다란 소나무들과 쌓인 눈을 보니…… 달빛도 아주 환하고요.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절로 맥주 한 잔이 간절해지는군요.
-헛허허허, 그렇다면야 나는 이제 모르겠쑤.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이고 부인께서 곁을 지키고 계시니 알아서들 잘 하시겠지 뭐.
노인은 성큼성큼 눈발자국을 찍으며 안마당 쪽으로 사라졌다.
-들었지. 어르신이 네가 내 부인이란다.
-아니. 아마도 그냥 넘어가 주셨을걸.
-그런가?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평생을 살았다면 지나간 세월을 그저 몸에 장식처럼 지니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삶을 저만큼 사셨다면 측은지심이신 거다. 온 몸에 깊은 병색이 완연한 중년 남자와…… 전화 한 통을 받고 눈 내리는 날 그 남자를 찾아 부랴부랴 그 먼 길을 달려오고 이 깊은 산중까지 찾아든 중년의 여자. 아마도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거라고.
벽에 베개를 끼워 그를 기대게 했다. 그의 몸을 이불로 감싼 뒤 문을 열어놓고는 그녀는 캔맥주를 마셨다. 그는 입가에 거품만 묻힐 뿐이다. 문 가까이 앉은 그녀는 밖을 내다보며 푸른 솔가지 위에 쌓인 흰 눈을 바라보았다. 가슴 속에서 비린 슬픔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려 할 때마다 그녀는 맥주를 한 모금씩 들이켰다.
산기슭을 돌면 있다는 건봉사 쪽에서 목탁소리가 울리다가 이내 멎었다. 앞산 중턱 쪽에서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해 솔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밤공기를 시퍼렇게 가르며 쩍, 쩍, 쩍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그녀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힘들었다.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려서였다. 한 줄기 칼바람에 의해 흰 눈빛과 달빛이 높다란 푸른 솔가지까지 날아올랐다가 묵은 솔방울과 함께 툭, 툭 떨어져내렸다. 그리고 고요했다. 바람소리를 빼면 산천을 뒤덮은 적막감이 산 계곡 쪽에서 흘러내려와 뒷 벼랑 쪽으로 타고 우우우, 소리를 내며 떨어져내렸다.
그녀는 가만히 눈을 즈려 떴다 감았다를 반복했다.
참으로 이상했다……. 강원도 북쪽 끝자락인 이곳까지 그녀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내다보는 눈 풍경은 작년에 본 듯 아주 낯익었다. 이런 게…… 바로 기시감이라 하던가? 데자뷰 말이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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