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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내 아버지, 그 남자 <45>

한류작가 김하인 장편소설 / 삽화 정재남

2018년 03월 06일(화) 09:57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그도 말이 없고 그녀도 말이 없었다. 남자는 벽에 등 기댄 채 문가에서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는 여자를 지켜보고만 있고 여자는 솔가지가 우수수 흰 눈을 털어내는 광경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그였다.
-많이…… 놀랐지?
-응?
-미안하다. 이런 모습 보게 하려고 널 이 먼 곳까지 오게 만들다니…….
-아냐. 별소릴 다 하네. 아니…… 아마도…….
-응?
-그 일 말야. 초등학교 오 학년 그 때 네가 독사에게 물린 내 발목을 입으로 빨아 살려준 거…… 그 은혜를 내가 갚을 기회를 준 것 같아서……. 난 오히려 네가 이렇게라도 사고치는 게 고맙다.
-살려준 건 뭐고 은혜는 또 무슨…….
-아냐. 살모사고 맹독이었잖아. 의사가 그때 네 신속한 응급조치가 없었다면 큰일 날 뻔 했다고 말한 것을 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데. 그리고 설령 그 일이 아니었다고 해도…… 난 네 일이기에 모든 걸 제쳐놓고 여기부터 달려왔을 거야.
-왜……?
그녀는 크크크, 가볍게 웃었다.
-우리 사 학년 때였을 걸. 학교에서 가을운동회 행사연습으로 학년 전체가 포크댄스 했던 거 기억나니?
-아…… 그래. 그랬었지.
-그때 여학생들이 남자애들과 손잡기 싫어서 하드 막대나 잔 나뭇가지를 분질러 그 양끝을 잡고 아이들이 너나없이 춤을 췄었잖아. 기억나?
-…… 그랬었나?
-그래. 그랬었어. 하지만 집단으로 원무를 만들어 상대를 바꾸어가던 그 포크댄스를 추면서 내가 너한테 맨손을 내밀던 거 기억나니?
-글쎄…….
-훗후후후. 그랬었어. 너한테만은 하드 막대를 감추고는 맨손으로 네 손을 잡았었지. 첨엔 네가 쭈뼛거리긴 했지만 이내 너도 싫지 않았던지 내 손을 맨손으로 잡았어. 그 다음에 상대가 바뀌면 난 재빨리 하드 막대를 내밀었고…….
그녀는 잠시 바깥으로 눈길을 돌렸다. 쌓인 눈 위를 싸리 빗자루로 정갈하게 쓸어가듯 드넓은 눈밭을 훑고 지나가던 바람이 갑자기 돌개바람이 되어 눈보라를 일으키며 몸을 세웠다. 쌔앵! 하는 칼바람이 매서운 소리를 내며 나무 사이를 사납게 휩쓸고 다녔다.
-그런데 정말…… 이상해.
-……?
-여기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여기는…… 세상의 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만 같아. 문득 이런 생각까지 든다. 훗후후후…….
-무슨 생각?
-만약에…… 만약에 말야. 너와 내가 동창이 아니라…… 좀 민망한 가정이긴 하지만…… 으응, 우리가 만약 부부가 되어 살았다면…… 과연 어떤 삶이었을까? 과연 어떤 세상이었는지가 참 궁금해지네.
-핫하하…… 그러냐?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내가 남편이라면…… 넌 지금 이런 나를 두고 얼마나 슬펐겠니. 난 그렇게 되지 않은 게 오히려 백번 천번 다행이라 여겨진다.
백번 천번이란 그 말이 그녀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설마…… 그런 거였니? 네 부인이 이런 너를 지켜보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 정도로 부인을 사랑하기에…… 너 혼자 이렇게 멀고 외진 곳까지 와서 혼자 죽음을 맞으려 하는 거니? 그렇다면…… 아냐. 넌 여자의 사랑을 아직 모르는 진짜 숙맥이고 바보다.
남녀가 한 몸이 되는 사랑이 어떻게 좋을 때 즐거울 때만 같이 함께하는 거라니? 사랑해서 얻은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면 그건 공짜가 아니고 모두 다 사랑의 빚이야. 삶을 살아가면서 젊은 날에 누렸던 사랑의 기쁨과 즐거움을 늙어서는 고통과 괴로움, 슬픔으로 그 빚을 온전히 되갚아야 해. 그래야 빛과 그림자가 있고 낮밤이 있듯이…… 삶과 사랑이 함께 맞물려 완성되는 거지.
그것도 몰랐다면 넌 참 바보다. 나중에 네 부인이 너 혼자 이 모든 고통을 짊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얼마나 한이 되겠니. 고통을 함께 나눌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했다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슬프겠니. 네 자식들과 네 홀어머니께서도 마찬가지일 거고.
그의 내뱉는 숨결이 빨라졌다. 조금씩 거칠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바깥 풍경만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뺨에 다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슴이 몹시 아리고 목이 메였다.
초등학교 때 백 번도 넘게 그의 이름이 그녀 일기장에 씌였었다. 손을 뻗으면 그 아이는 늘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그 호닥거리는 마음을 무슨 보석이라도 되는 양 가슴 가장 깊숙한 곳에 꼭꼭 숨겨만 두었다. 그 여자아이는 초등학교 육 학년 초반기를 마치고 대구로 전학을 갔다. 중학교에서부터 대학까지 그 도시에서 학업을 마쳤다. 십대 후반 시절, 그리고 이십대 대학 시절에도 그녀는 가끔 그를 떠올렸었다. 그는 어떻게 자라고 변했을까?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정작 그녀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의대를 다니는 남자를 사귀게 되었고 그 사람과 오 년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의사와 약사 부부.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돈도 많이 벌었다. 두 아이는 어릴 때부터 일치감치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삼 년 전 그녀는 남편이 오랫동안 두 집 살림을 해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보다 나이가 열다섯이나 적은 젊은 여자는 다섯 살 난 남편 아이까지 키우고 있었다. 그녀는 미련 없이 남편과 갈라섰다. 미국서 공부하는 두 아이는 이미 자랄 만큼 자랐다. 배경 좋은 시댁 쪽에서 든든히 받쳐주고 있었기에 그녀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하이스쿨에 재학 중인 두 아이들은 세상 어디에 있다고 해도 그녀는 엄마이기 때문이었다.
이혼을 하고 구미로 내려와 약국을 개업하고 혼자서 밥을 먹고 커피를 끓여 마시고 술을 한 잔 하다보면 문득 가슴 깊은 곳이 저미듯 아려오곤 했다. 어린 시절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그 사내아이가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도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고 서울에서 잘 산다는 소식을 바람결에 들었을 때 마음은 묘하게 쓸쓸했고 아팠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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