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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내 아버지, 그 남자 <48>

한류작가 김하인 장편소설 / 삽화 정재남

2018년 04월 17일(화) 10:03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그가 손을 더듬어 그녀 손을 잡자 그녀 눈에서 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말을 잇지를 못했다. 정말 그녀에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는 두 눈을 즈려감은 채 두 손으로 그녀 한 손을 감싸 쥐고 그녀 손등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그의 눈꼬리에서 투명한 물기가 번져나왔다. 눈물을 보이기 싫은 그는 베개에 마른 뺨을 떨어뜨리고 천천히 옆얼굴을 문질렀다.
-어쩌면 말야…… 나는 너를…… 이렇게라도 꼭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네가 내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기억하도록 해준 너인데…… 휴우, 나라는 놈은 그걸 핑계 삼아 너를 이렇게까지 힘들게 만들었으니…….
-아냐. 절대 그런 생각은 하지 마. 나도 이렇게라도 널 다시 봐서 정말 좋으니까. 진심이야.
그녀는 입술을 아프게 짓깨물었다.
왜…… 왜…… 눈물이 이다지도 멈추지 않고 쉼 없이 흘러내리는 걸까. 몸에서 흐르는 수로가 고장이라도 난 걸까. 언제 나는 이렇게 진한 눈물을 쉼 없이 흘린 적이 있었던가. 그래…… 민호야. 네가 힘들어할지 모르니까 나도 내 눈물을 네게 보이고 싶지 않아.
그냥 지금처럼 눈을 감은 채 짧게라도 내 무릎 위에서 네가 편히 잠을 이룰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이렇게 네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이유는 예전에 우리 외할머니께서 어린 내가 칭얼거리면서 잠을 보채면…… 이렇게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한없이 부드럽게 쓸어서는 숨어있던 잠을 불러내 주시곤 하셨지. 머리칼 숲에는 잠과 꿈이 숨어산다고 하셨어. 그러니까 너도 그냥…… 이렇게 편하게…… 한숨 푹 잘 수 있었음 좋겠다.
-고맙다……. 그렇게 말해 줘서.
-잠이 오면 자. 내가 지켜볼 테니까.
-……그래. 오래간만에…… 참 맘이 아늑하고 편하네. 잠이 오려나봐…… 경희야……!
-응.
-고맙다. 잊지…… 않을게.
-별 소릴 다 하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자. 낼 아침이면 네 몸이 한결 가뿐해질 수 있도록 깊이 푸욱 잘 자.
-그래…… 너도…… 곧 자…….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녀는 쉼 없이 그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손바닥을 내려 그의 마른 가슴팍을 가볍게 토닥거려주었다. 그는 정말이지 아주 어린 아이처럼 쉽고도 깊게 잠이 들었다. 통증에 십 분 시달리는 것은 십 킬로미터 마라톤을 뛰는 것처럼 과한 노동이 필요하다. 녹초가 될 만큼 에너지가 다 소진된다. 그는 가볍게 코까지 골며 깊은 잠에 빠졌다. 그녀는 그때까지 그의 이마를 살짝 짚어주고 그의 어깨도 가볍게 눌러주었다.
한 남자가 많이 아프다. 인생의 과다한 짐을 지고 여기까지 걸어온 그의 어깨가 시리도록 아프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의 잠든 모습을 오래도록 곁에서 지켜보았다. 새벽으로 시간이 넘어가기 직전 그녀는 그의 옆에서 모로 누워 잠이 들었다.
그녀가 인생을 이제껏 살아오면서 오늘처럼 놀라고 피곤했던 날이 또 있었을까. 없다. 먼 거리를 달려왔고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나 컸다. 놀랐고 무서웠고 슬펐다. 이혼 당시와는 또 다르게 그녀의 가슴 바닥에 고여 있던 온갖 감정을 모두 소진시킨 하루였다.
그녀는 아침 여섯 시경 잠을 깼다.
그런데 방 안에…… 그녀 혼자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그의 가방이 있던 자리며 방 전체를 빠르게 눈길로 더듬었다. 옷가방이 없었다. 방 벽에 걸려 있던 그의 외투도 사라졌다. 이…… 이럴 수가! 그녀는 방문을 밀치고 뛰어나갔다. 몇 발 못가서 그녀는 멈춰 섰다.
사방 천지에 새로운 흰 눈이 가득 쌓였다. 그것도 모자라 아이 손바닥만 한 소담스런 눈송이가 또다시 쉼 없이 하늘에서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무릎이 빠질 정도여서 민박집 주차장에 세워둔 그녀의 차도 흰 눈에 완전히 뒤덮여 있었다. 길도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모든 굴곡과 경계도 사라져 있었다. 그런데도 또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강원도에서만 볼 수 있는 폭설이었다.
민호야…… 민호야…… 이, 이, 나쁜 녀석아! 이 못된 놈아! 꼭 이렇게, 이렇게 사라져야만 했니! 그녀가 잠든 새벽녘 그는 혼자만의 길을 몰래 나서버렸다. 아무도 따라갈 수 없고 찾아낼 수 없는 길…… 눈을 밟고 가는 사람의 발자국을 내리는 눈으로 금방 쓱쓱 지우면서 사라졌다. 그는…… 친구는…… 세상에서 자신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길을 택해 그렇게 어디론가 서둘러 떠나버린 것이다.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인적 없는 사방을 휘둘러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나무도 사라지고 산도 사라지고 흰 눈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젠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흰빛만 봐도…… 하얀 빛만 봐도 가슴이 시퍼렇게 저리고 아플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깊이 떨궜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떠나간 그의 맘을 왜 모르겠는가. 폭설이 내리는 새벽시간에 자동차를 불렀을 리도 없다. 그는 두 발로만 길을 나섰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고 경계가 사라진 산길이지만 그는 쉼 없이 앞으로만 걸어갔을 것이다. 마치 그녀가 잠을 깨고 뒤쫓아오는 것을 염려하도 하듯이. 가능한 멀리…… 깊어지는 쪽을 택해 한사코 걸어갔을 것이다. 그렇게 무릎이 푹푹 빠지며 걷다보면 기력이 쇠진한다.
걷는 도중에 끔찍한 통증이 찾아왔다면 그는 옴짝달싹 못하고 그대로 눈밭에 쓰러져 사지를 휘저을 것이다. 비명을 지른다한들 들리겠는가. 폭설은 모든 소리를 아삭아삭 잡아먹는다. 폭설 소리만큼 세상에 큰 소리가 어디 있겠는가. 눈이 내리면 눈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지상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결국 어디선가 쓰러진 그의 몸 위로 또 눈이 내리고 폭설이 무심으로 쌓였을 것이다. 그가…… 사람이었다는 흔적을 단 일 분도 안 되어…… 그렇게 지상에서 깨끗한 흰 빛으로 완전하게 형체를 지워버릴 것이다.
설사 그렇다고 짐작을 한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들…… 지금 온천지가 폭설 중인데 눈 속에 묻힌 그를 어떻게 찾아내겠는가. 세상 모든 길들마저 눈에 지워졌고 하늘의 새가 나는 길마저 지워져버렸는데. 그가 걸어간 발자국마저 폭설이 삼켜버린 지 이미 까마득히 오래인데……. 아무도, 아무도 그를 찾지 못할 것이었다. 이처럼 깊은 산중에 이 정도 무지막지한 폭설이라면 해를 넘기고 봄이 와서야 겨우 눈이 녹을 것이었다.
그녀는 슬픔과 충격에 탈진한 얼굴이 되어 간신히 방문턱을 다시 넘어와서는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슉슉슉, 서걱 서걱 서걱……. 그렇게 하염없이 쏟아지는 흰 눈발…… 그녀의 눈물이 끊임없이 눈송이가 되어 허공에서 흩날려 내려오고 있었다. 방문 밖을 그렇게 한참이나 넋 놓고 바라보던 그녀는 어떤 생각이 미치자 지난밤 그가 기대앉았었던 맞은 편 벽 쪽을 황급히 돌아보았다. 문득 그가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여전히 앉아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없다. 벽과 방은 그의 부재로 텅 텅 소리가 나도록 완전히 비었다. 그녀 마음도 하얗게 질린 채로만 터엉 비었다. 가슴 저미는 슬픔을 참아내느라 그녀는 신음소리 같은 울음을 연신 삼켜냈다. 그러던 그녀 눈에 흰 종이가 설핏 띄었다. 지난 밤 그가 비스듬히 등 기대어 앉았던 바로 그 자리……!
반듯하게 갠 그의 이부자리 위에 눈이 한 움큼 내려쌓인 것처럼 반으로 접은 흰 종이 한 장이 오두커니 올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펴보았다. 다른 아무 말은 없었다. 그저 종이 가득 ‘夢寐難忘(몽매난망)’이라 크게 쓰여 있었다. 꿈에도 그리워 잊기가 힘들다, 는 뜻이었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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