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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서 법호 만해(萬海)와 법명 용운(龍雲) 받아

문화제안 / 만해 사상은 건봉사에서 잉태 [2]

2017년 08월 08일(화) 09:50 200호 [강원고성신문]

 

↑↑ 권성준 고성중·고등학교 교장

ⓒ 강원고성신문

필자는 지난호 고성신문에서 ‘건봉사와 만해의 여인 서여연화 보살’ 이라는 주제로 만해 한용운의 건봉사 비사를 소개하며 건봉사에 스며있는 만해님에 정신을 살펴보았다.
지난해 언론보도에 따르면 인제군이 서울 성북구와 서대문구, 속초시, 홍성군과 함께 만해 한용운 선양사업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이들 자치단체만이 만해의 정신을 계승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지역인가? 진정 우리 마을에는 그 분의 정신이 없는가? 무엇이 부족하여 선양사업에 낄 수도 없는가? 라는 안타까운 질문을 던지며, 건봉사에 스며있는 만해의 정신을 찾아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만해 사상은 건봉사의 요람에서 잉태되다’ 필자는 이런 명제를 제시하며 건봉사에 잉태된 만해 사상을 찾아보겠다.

건봉사 무불선원서 최초의 선 수업

먼저 건봉사와의 인연 전에 삶을 들여다보자. 만해가 18세에 서당 훈장이 되었을 무렵, 일본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우리 땅에 발을 디디기 시작했고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하는가 하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는 등 나라의 모습은 마치 바람 앞 등불 같았다. 만해는 마침내 더 이상 고향에 머무를 수 없다는 생각에 무작정 서울로 떠났다.
하지만 서울로 가던 도중 어느 주막에서 밤을 보내다가 문득 중국 고전에서 읽었던 ‘인간의 삶이란 덧없는 것’이라는 내용이 떠올랐고, 이때 ‘먼저 인생이란 것이 무엇인가부터 알아야겠다’고 결심하고는 그길로 발길을 돌려 속리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속리산에서 설악산에 도인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백담사로 옮겼다. 이때가 1905년. 드디어 만해는 삭발염의한 출가자가 됐다.
백담사에서 출가해 불교공부를 하던 만해는 당시 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던 고성 건봉사로 한 번 더 자리를 옮겼다. 건봉사는 사세가 커서 재산도 많았고 소장 도서도 많았다. 또 그곳에는 일본유학생들도 적지 않아서 나라 밖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만해는 건봉사에서 수없이 많은 책을 탐독하며 세계는 무한히 넓고 이제껏 알지 못했던 미지의 나라도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만해는 건봉사와의 인연을 맺은 각별한 곳이었다.
만해는 백담사에서 입산, 수계를 하였지만 백담사는 건봉사의 말사였기 때문에 건봉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06(28세)년 만해는 명진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당시 명진학교는 각 본산에서 청년승려 2명씩만 선발될 수 있었다. 명진학원은 현 동국대의 전신이다. 동대문 숭인동에 있었던 원흥사에 세워진 명진학교는 구한말 승려들이 불교의 근대화를 이끌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그 당시 정식 강원을 수료하지도 않았던 만해가 건봉사 추천으로 명진학교에 입학한 것은 파격이었다. 건봉사 출신으로 백담사에서 만해에게 경학을 가르친 이학암(李鶴菴)의 적극적 소개에 따라 이루어진 일로 추정된다.
신학문을 수학한 만해는 다시 건봉사로 돌아와 무불선원에 입방하여 선의 세계에 깊이 몰입하였다. 1907년(29세) 만해는 최초의 선 수업으로 하안거를 건봉사에서 보냈다. 이때 정만화 선사의 법을 전수받고 큰 깨달음을 얻어 만화(萬化)스님으로부터 만해(萬海)라는 법호를 받았다. 이를 통해 만해스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78세손으로 대선사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용운(龍雲‘) 이라는 이름은 강원도 고성 건봉사의 만화선사(萬化禪師)의 제자가 되었을 때 얻은 법명이다.

1928년 《건봉사본말사적》 편찬

특히 중국 청나라의 서계여가 1848년 지어 1850년에 간행한 10권 분량의 세계 지리 책 ‘영환지략(瀛環志略)’을 보고는 세계 문명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다.
이에 넓은 천지를 둘러본 후 뜻을 펼쳐보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세계 일주에 나섰다. 그렇게 걸망에 달랑 목탁 하나, ‘금강경’ 한 권만을 담고서 처음 찾은 곳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이었다. 하지만 어수선한 민심은 조선 땅 뿐만 아니라 러시아도 마찬가지여서 우여곡절 끝에 다시 돌아온 만해는 1908년(30세) 5월 근대문명이 발달한 중심부를 직접 보려는 마음에서 일본유학을 감행했다. 조동종대학에서 공부하는 한편 각처의 사찰, 공장, 은행 등을 견학하며 견문을 넓혔다. 또한 일본 체류 때 조동종의 청년단체로 화융회(和融會)의 기관지 <화융지>에 12편의 한시를 기고하였다. 이 책 제12권 제6호의 휘보(彙報)중 <한국 유학생 한용운 군이라는 기사를 보면 그는 ‘1908년 5월 9일에 조동종대학’으로 왔으며 ‘한국 강원도 고성군 건봉사’의 도제(徒弟)라는 사실이 명기되어 있다. 이로써 당시 만해는 건봉사를 자신이 소속된 본사로 인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해 10월 건봉사로 귀국한 만해는 일본에서 보고 들은 문명을 민족운동에 활용하기로 결심할 뿐만 아니라 이학암에게 《반야경》과 《화엄경》을 배움으로써 건봉사와는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또한 1928년 다시 건봉사와의 인연을 이어가 건봉사 본말사지인《건봉사본말사적》을 편찬하여 발간하게 되었다. 이는 만해 한용운의 그동안의 학술적 업적과 문학적 성취에 대한 건봉사 대중들의 요구와 평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한다.
건봉사의 사적을 편찬하게 된 동기를 한용운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本史蹟을 編纂하게 된 것은 다만 乾鳳寺 本末寺 各位의 懇曲한 委囑에 從함이오 조금도 編纂할 만한 自信이 있어서 붓을 잡게 된 것은 아니다.……”
이렇듯 한용운이 건봉사 사적을 편찬하게 된 것은 간곡한 위촉이지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고 겸손한 표현까지 보이고 있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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