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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제안 / 고성군이 만해 선양사업 앞장서서 추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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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사상은 건봉사에서 잉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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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8월 22일(화) 15:27 201호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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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권성준 고성중·고등학교 교장 | ⓒ 강원고성신문 | 만해정신의 씨앗으로 세워진 민족의식과 근대 개화문명에 선각지 건봉사= 만해 한용운은 1908년 5월 근대문명이 발달한 중심부를 직접 보려는 마음에서 일본유학을 감행했다. 조동종대학에서 공부하는 한편 각처의 사찰, 공장, 은행 등을 견학하며 견문을 넓혔다. 그해 10월 건봉사로 귀국한 만해는 일본에서 보고 들은 문명을 민족운동에 활용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처럼 만해를 시작으로 건봉사에 있는 다수의 승려들을 서울 및 일본에 유학을 보냈고, 특히 건봉사 출신 재일 유학생들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건봉사에서 불교의 근대화에 매진하였다. 이에 따라 건봉사는 여타 본사보다도 비교적 많은 재일 유학생을 배출하였는데, 이는 건봉사가 근대화에 앞장선 사찰임을 말해 주는 단서이다.
이후 불교 유학생이 1910년대 전반기에서 시작하여 1920년대, 1930년대로 점차 증가하는 추세였으나 건봉사 출신 승려들의 일본 유학생은 주로 1930년대 중반 이후로 22명으로 집계된다고 하였다. 이는 김광식이 밝힌 통계 수치에서 건봉사는 두 번째로 유학생이 많은 본사에 해당한다.
건봉사가 비교적 다수의 유학생을 배출한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양한 측면에서 찾아야 할 것이지만 첫째로, 건봉사의 사세 및 경제력을 지적할 수 있다. 현전하는 유학생이 대부분 공비 유학생이라면, 유학을 후원하고 뒷받침할 수 있었던 사찰의 경제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다음으로는 건봉사만이 갖고 있었던 신문명과 신식 교육에 대한 정서, 분위기를 들 수 있다. 금강산의 외진 공간에서 설악산 일대의 사찰을 관리하면서 관동불교를 대변하였던 건봉사가 신문명과 신교육에 남다른 열성을 보였음은 특이한 일이다.
필자는 건봉사의 이 같은 정서, 문화를 설명하면서 1906년에 건립된 신식 보통학교인 봉명학교의 존재를 주목한다. 즉 건봉사 출신의 재일 유학생은 대부분이 건봉사에서 개설한 봉명학교 출신이었던 것이다.
이 봉명학교의 설립취지서에 보면, 학교에서 동서양의 학문을 다 배우게 된다면 당시 거세게 불었던 개화의 내용을 파악하게 되어 저절로 인재양성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인재양성을 통하여 우리나라가 독립과 자유를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이해하였다.
또 봉명학교에서는 신문학과 전통적인 학문(聖學, 佛敎)을 균형적으로 교육하겠다는 생각을 피력하였다. 이런 교육 이념을 토대로 봉명학교를 설립한다면 원효, 보조, 서산, 사명이 추구하였던 호국불교의 구현이라는 민족불교의 전통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바로 이 같은 현실인식, 신문명과 신학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민족불교의 구현을 이루겠다는 것이 봉명학교의 설립 이념이었다.
이 이념을 바탕으로 봉명학교에서는 토론회, 강연회, 독서반 운영 등을 특별 활동을 운영했는데 재일 유학생이였던 강사를 통해 진보적 흐름을 유입하는 교육과 만해 한용운에 의해 민족주의 흐름을 전파하는 교육을 운영하였다.
만해와 문하생에 나타난 건봉사의 교육활동과 항일운동= 건봉사는 만해 한용운이 승려생활을 했으며 봉명학교를 세워 민족사상 계몽교육의 구심체가 된 곳이다. 또한 다른 사찰에 비하여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했으며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주로 맡겨져 건봉사의 부속학교인 봉명학교에서 소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가르쳤다 한다.
건봉사는 일제감정기인 1906년 만해 한용운이 이곳에 사립학교인 봉명학교를 설립하고, 1921년에는 봉림학교를 설립했으며, 1926년에는 불교전문강원을 설립해 공비생(公費生) 30명을 선발하는 등 꾸준히 근대적 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건봉사는 많은 근대적 학승들과 민족지도자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을 배출할 수 있었다.
그 중 ‘만해시문(詩門)’ 형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은 봉명학교였다. 만해는 건봉사의 사지 편찬 등의 공적인 일과 건봉사 스님들과의 교분 등으로 건봉사를 자주 찾았다. 이러한 방문 중에 봉명학교에 들러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만해시문의 문하생들은 이 봉명학교에서 교육과 습작을 통해 자연스럽게 만해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만해의 시집이 교재로 채택되어 학생들이 즐겨 암송했으며, 만해의 강연을 통해 그의 사상을 직접 접하기도 했다.
만해시문의 1세대 문하생인 박종운, 조명암이 있으며 2세대 문하생인 조영암, 박기호, 최재형, 박설산 등은 이 봉명학교에서 만해의 큰 영향 속에 1세대 문하생의 지도를 받아 문인으로 성장해 나갔다.
또한 만해시문의 문하생들은 봉명학교를 중심으로 한 건봉사의 근대적 교육 환경에서 성장하며, 건봉사의 항일 전통을 이어 나갔다. 건봉사는 일찍이 사명대사가 승군을 길러 내고, 조선 말 의병활동에 건봉사 승려들이 참가한 것은 이러한 전통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나가며= 홍성군은 만해 한용운이 출생한 생가가 있으며, 인제군은 만해가 출가해 승려로서 수행했던 백담사와 만해마을, 성북구는 만해가 입적할 때까지 거주했던 심우장이 있어 각각 만해 한용운의 초기, 중기, 말기의 삶과 사상적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이 세 자치단체서 만해 한용운의 선양사업을 위해, 홍성군에서는 매년 9월 역사인물축제와 만해추모제 등을 개최하고 인제군에서는 매년 8월 만해축전을 열어 만해시를 낭독하고 만해대상을 뽑아 시상하고 있다. 성북구에서는 매년 만해 한용운 선사가 입적한 6월 29일 선사를 추모하는 다례제를 개최하고 있다. 아울러 만해의 일대를 그린 뮤지컬 ‘심우’를 제작했으며 대한민국 홍보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교수와 서체디자인 전문회사 산돌커뮤니케이션과 함께 만해와 심우장을 알리는 한글 브로슈어 제작 참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우리다= 고성군 건봉사는 출생 생가가 있는 홍성군보다, 출가하여 승려로 수행했던 인제군보다, 입적할 때까지 거주했던 심우장이 있는 성북구보다, 더 깊은 만해만에 정신세계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만해 한용운이 이곳 간성에 있는 건봉사에서 책을 탐독하며 꿈을 꾸고 뜻을 품은 곳이며, 법호와 법명을 얻어 선의 세계에 몰입한 곳이고, 만해의 씨앗으로 돋아난 민족의식과 근대 개화문명의 선각지며, 민족사상 계몽교육을 통한 항일 전통의 맥을 이어온 곳이다.
진정, 이러한데도 건봉사에는 만해 정신이 없는 것인가? 백담사가 만해가 출가한 불교 입문 고향이요, 문학과 사상의 요람이라면, 건봉사는 안거를 통해 심오한 불교 정신을 터득하여 큰 뜻을 품고 불교의 근대화운동과 개혁·민족사상으로 항일 전통 맥을 이어온 선각지다. 이 얼마나 큰 족적을 남긴 곳인가?
이제 우리 고성군은 자치단체를 중심으로 만해 선양사업에 다른 자치단체 보다 더 앞장서서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행위가 우리가 살고 있는 고성에 위상을 찾는 것이며 만해가 남긴 업적을 기리는 길이라고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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