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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짧은 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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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칼럼 / 김향숙 칼럼위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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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3월 26일(화) 12:16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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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고성신문 | 봄은 달려오는 것이다.
누가 시작 호루라기를 불기라도 한 것처럼 한꺼번에, 남녘에서부터 겨울의 무채색 위를 아름다운 연두초록 파도로 달려오는 것이다. 지난겨울은 유난히도 따뜻했다. 두터운 외투들을 별로 입어보지 못했고 정원의 화초들도 겨울을 쉽게 지나고 삼월이 왔다. 삼월의 바람은 혜풍(惠風)이라 하여 만물이 눈뜨고 자라게 하며 부드럽게 불어오는 동남풍이다.
만물이 눈뜨고 자라게 하는 봄
산골짜기의 얼음이 녹으면서 시냇물 소리가 들리고 물가에는 어김없이 버들강아지들이 먼저 눈을 뜬다. 물기 많은 흙에 꽂아놓기만 하여도 뿌리를 잘 내리는 버들강아지를 보면 옛 홍랑의 시조와 그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생각난다.
묏버들 갈해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 자시난 창밧긔 심거두고 보쇼셔 / 밤비예 새닙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묏버들 가려꺾어 보내노라 님에게 /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홍랑은 조선 선조 때, 함경도 홍원 태생의 기생이다. 아버지 없이 지극정성으로 어머니의 병수발을 하다 어머니마저 잃은 홍랑을 의원이 데려다가 수양딸처럼 키웠다. 어릴 때부터 문학적 교양과 감수성을 지니고 재색까지 겸비한 홍랑에게 시문을 가르치고 여자가 해야 할 예의범절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타인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을 찾다가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리고 경성 관아의 기생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고죽(孤竹) 최경창은 그 시대에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백광훈,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불렸으며 팔문장(조선시대의 여덟 사람의 뛰어난 한문 문장가, 곧 백광훈, 송익필, 이산해, 최경창, 최입, 이순인(李純仁), 윤탁연, 하응림)중의 한사람이었다.
고죽은 마침 북방의 변방 경성에 북도평사(北道評事)의 직위로 부임하게 되었고 그와의 술자리에서 기녀 홍랑이 읊은 시조는 바로 최경창이 지은 시조였으며 홍랑은 그의 시조들을 이미 즐겨 알았으므로 그들은 쉽게 사랑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러나 6개월 동안의 짧은 만남을 마치고 최경창은 한양으로 떠나야 했다. 최경창이 떠나던 날 홍랑은 최경창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기 위해 경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까지 따라갔다. 더 따라가고 싶었으나 다른 지역으로 벗어날 수 없는 관기였기에 홍랑은 더 이상 따라갈 수가 없었다.
최경창과 이별하고 돌아올 때, 함흥 70리 밖에 있는 함관령(咸關嶺)에 이르자 날은 어두워지는데 비까지 내렸다. 그곳에 잠시 머물면서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담은 시조 ‘묏버들 갈해것거’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담은 이 작품과 함께 길가의 버들가지를 꺾어 최경창에게 보냈다고 하니 그때도 초봄이 막 시작된 무렵이었을 것이다. 최경창은 나중에 홍랑의 시조를 한문으로 번역하고 ‘번방곡(飜方曲)’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다 한양으로 돌아간 고죽이 병석에 있다는 소식을 3년 만에 듣게 된 홍랑은 그날로 밤낮 7일을 걸어 그에게로 가서 병수발을 들었으나 당파싸움이 한창이던 1576년 봄, 홍랑이 관기의 신분으로 지역을 이탈하는 ‘양계의 금 (兩界之禁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는 제도)을 어겼다는 것과 당시 명종의 비 인순왕후가 죽은 지 1년이 안 된 국상기간에 첩을 들였다는 죄목으로 최경창은 관직박탈을 당했고 홍랑을 함경도 경성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홍랑과 최경창의 애틋한 사랑
그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 고죽이 지은 시에는 이별의 슬픔이 서려 있다.
贈洪娘詩(증홍랑시) / 고죽 최경창
서로 말없이 바라보며 그윽한 난초 그대에게 드리네 / 아득히 먼 길 이제 가면 어느 날에 돌아오리 / 함관령 옛날의 노래는 다시 부르지 마오 / 지금도 궂은비 내려 푸른 산 아득하겠지
최경창은 1582년 봄 종성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뒤 북평사의 참소로 성균관 직강으로 좌천되고 부임을 위해 상경하던 도중 1583년 3월, 함경도 경성의 객관에서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홍랑은 그의 무덤 앞에 묘막(墓幕)을 짓고 얼굴을 훼손시킨 뒤 씻지도 꾸미지도 않고 기약 없는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다 임진왜란을 당하게 되어 최경창이 남긴 유품인 작품들을 챙겨 함경도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임진왜란이 끝난 이듬해, 7년간을 지켜 온 유품들을 1599년 해주최씨 문중을 찾아 돌려주게 된다.
해주최씨 문중에서는 그녀를 가문의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녀가 죽은 뒤 시신을 거두어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밑에 묻고 무덤을 만들고 묘비 ‘시인홍랑지묘(詩人洪娘之墓)’를 세워주었다.
홍랑에게는 최경창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홍랑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말도 전해진다고 한다. 그 뒤에 문집 ≪고죽유고 孤竹遺稿≫ 1책이 숙종 9년(1683)에 간행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서(序)를 쓰고, 이민서(李民敍)·남구만(南九萬)이 발문(跋文)을 썼다.
묏버들 아니어도 지금 온 세상에 얼마나 많은 꽃나무 가지들이 물오르며 피어나는가. 애틋한 사랑 하나쯤 누구의 가슴에나 있게 마련 아니던가. 이 혜풍삼월에 꽃나무 몇 가지 꺾어 거실 창가 유리병에라도 꽂으며 홍랑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돌아봄은 어떠할지.
달려오는 봄,
그렇게 달려온 듯, 달려 가버릴 우리들의 짧은 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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