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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숲으로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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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소설가 김담 연재 산문(散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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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0일(목) 10:55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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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고성신문 | | 먼산주름 끝에 저녁거미가 내린 뒤 반닷불이들이 까막까막 냇둑을 날고 있었다. 덩두렷이 떠올랐던 한가위 보름달은 구름과 숨바꼭질 중이었고, 풀숲에서는 벌레들 울음소리가 불꽃처럼 치솟았다가 사그라지는 잿불처럼 숙지근했다가 어느새 다시 기세 좋게 밤공기를 흔들곤 했다. 떼판으로 피었던 짙푸른 달개비풀이 숙진 자리에 거미줄이 내려앉았고, 덩굴진 돌콩 이파리에는 무당벌레가 날아들었으며 보랏빛 조뱅이 꽃봉오리에는 여치가 앉아 있었다. 벼가 익어가는 논둑 가장자리에는 흰 빛의 보풀이 피어났고, 논배미 벼 포기들 사이에는 보랏빛 물달개비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으며 가끔가다 피도 보였고 줄풀도 저 홀로 서 있었으며 이 둘은 모두 열매를 맺고 있었다. 제초제 속에서도 살아남은 꽃과 열매였다. 저물 무렵 논배미에서 피 이삭을 자르고 있던 농부는 봄가물이 심했던 탓에 피가 그대로 자랐다고, 낫을 휘둘렀다.
달마중을 하러 나섰던 걸음이 보랏빛 물봉선이 떼판을 이룬 숲 기스락을 지나서 마을 입새 냇둑에 이르렀을 즈음, 마을 안쪽에서는 보이지 않던 보름달이 느닷없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징처럼 둥그렇고 맑고 끼끗해서 가슴이 다 두근두근했다. 그제야 달님을 향해 마음을 나누었던 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평안과 안녕을 빌면서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태풍이 지나가자마자 가을장마가 이어져 추석 전전날까지도 푸른 밤하늘은 기대하기 어렵지 않을까 염려하였으나 추석 전날 볕이 들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추석 당일에는 장마로 눅눅하고 끈끈한 습기를 날려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벼이삭을 흔드는 갈바람이 일었다.
명절을 앞두고 집안닦달을 시작했다. 아흔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이제 집안일 따위는 슬그머니 뒤로 미루고 모르는 체 하기 일쑤였을 뿐만 아니라 부모와 함께 살며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처지 때문에라도 집안닦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든 쟁여 놓기 좋아하는 어머니는 냉장고, 김치냉장고, 작은 냉동고 할 것 없이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식료품들을 쌓아 놓았다. 틈틈이 정리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어머니 없는 사이 냉장고, 김치냉장고, 냉동고 순서로 어머니가 쌓아 놓은 오래된 식료품들을 정리하여 치웠다. 정리정돈이라면 남 못지않던 어머니는 노쇠해지면서는 아예 손을 놓은 정도가 아니라 정리하는 일 자체를 성가셔했고, 갑갑한 놈이 우물을 판다고, 보기 싫으니 헐수할수없이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할 수 없는 게 또 집안일이었다.
어머니는 재료만 사다주고는 김장조차 아예 손을 대지 않은 지 퍽 오래 되었지만 추석 때 먹을 김치뿐만 아니라 추석 송편을 시장에서 사는 걸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맏며느리인 어머니는 집안 기제사를 다 없애고서는 명절 차례만 지내겠다고 선언했다. 아버지마저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당신의 큰아들네, 작은아들네 뿐만 아니라 맏손자까지 외지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댔다. 그러면서 당신이 죽으면 또 화장은 하지 말라고, 두 번 죽기는 싫다고. 당신이 장례를 치를 것도 아니면서 죽은 다음을 무엇 때문에 걱정을 하는지, 누구도 자신의 주검에는 손대지 못하는 게 죽은 자의 운명일진대. 그렇게 입을 삐쭉거리기는 했지만 어머니 앞에서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나이 순서대로 삶을 마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더라도 죽음에 가깝다고 할 나이는 어머니였으므로.
아버지 직계 3대가 모일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증조부모와 증손자녀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었다. 추석 전날 먼저 도착한 작은 올케와 함께 차례상에 올릴 차례 음식을 준비했다. 어머니는 제수만 사다 놓고서는 뒤로 빠졌다. 부엌은 이제 작은 올케와 내 차지였다. 손이 무진장 큰 어머니는 과일과 생선은 머드러기여야 하고, 전은 삼십 명이 먹어도 남을 만큼 부쳐야 했으므로 재료 또한 그만큼 많았다. 명절에 오던 사람들이 다 모이면 삼십 여명은 넘었고, 전은 오래전부터 내 담당이었으며 그리하여 아무도 손대지 않았으므로 구석에 자리를 펴고 조카 녀석을 옆에 앉혔다. 녀석에겐 부쳐 낸 전을 접시에 담는 일을 맡겼다. 명절 때마다 했고, 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녀석은 그것을 크게 불평하지 못했다. 저녁 무렵에 큰올케가 도착하자 부엌을 담당하는 이가 바뀌었다.
막냇동생이 들고 온 살아 있는 문어를 손질하고 삶는 것은 내 몫이었고, 올케들이 부엌을 담당하는 사이 설거지와 걸레질은 내 일이었다. 그이들은 우리집 부엌살림의 주체가 아니었으므로 함께 해야 하는 일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밥상을 차리고 차린 뒤에는 설거지를 해야 하고, 다과를 준비한 뒤에도 또 설거지를 해야 하고. 명절이 일 년에 두 번뿐인 것을 기쁘게 여기는 까닭이었다. 십수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명절은 그야말로 비상이었다. 어른이든 누구든 모여 앉아 화투를 치지도 않았고, 술판을 벌이지도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렇더라도 낯선 집에서 부엌을 담당해야 하는 올케들에겐 여전히 즐겁지 않은 일일 수도 있었을 것이므로 차례든 기제사든 의무와 책임감으로 강제될 일은 아닌 것이었다.
우리집에서는 오래전부터 장을 담그지 않았다. 이번 명절 떡도 시장에서 샀다. 제주를 담그지 않은 지는 더 오래 되었다. 누군가 불편을 느끼기 시작하면 제도든 문물이든 폐기되기 마련이었고, 폐기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힐 것이었다. 명절 차례 또한 오랜 관습이었다고 해도 내 부모들이 세상을 떠나도 지켜질지 의문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집에서 지내던 차사(茶祀)들은 이제 다 없어졌다. 고려시대는 9개 명절이, 조선시대는 4개 명절이 그러나 지금은 겨우 설날과 추석뿐이었다. 그런데 우리집 차례상에 올린 지방은 아버지의 고조까지였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증손자녀들에게는 대체 몇 대 조인 것일까. 자신들 증조부모도 모르는 터에, 증조할아버지의 고조부모까지 알 턱이 없지 않은가. 며느리들인 내 올케들은 어떻고. 큰올케야 한동네에서 나고 자랐으니까 내 조부모를 알았지만, 작은 올케는 내 조부모를 알지 못했다.
세대가 바뀐 것은 물론이거니와 생활양식 또한 바뀌었다. 우리집 경우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명절에만 모였다. 그것도 경우에 따라서 한 번일 때도 있었으니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사람들에게 우애든, 사랑이든 얼마만큼의 크기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것도 내 부모가 생존해 있으니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장남과 장손으로 이어지는 카르텔에도 불구하고 조상들 묘소 벌초조차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막냇동생의 일이 되었다. 작은아버지들은 이제는 큰집 일이려니 했고, 장남과 장손은 남쪽 끝 도시에서 살고 있었으며 차남은 애초부터 무심했다. 그랬으므로 무덤을 없애지 않는 한, 자손들 가운데 누구라도 먼저 마음을 낸 사람이 하는 것이 좋을 것이었다.
반딧불이들 춤추는 광경을 혼자 보는 것이 아까워 식구들에게 알려줬더니 손녀들 손에 봉숭아물을 들이고 있던 큰올케는 아들, 손주들을 앞세워 냇둑으로 나섰다. 얼마 전 문득,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였고, 그것을 본 큰올케 또한 아이들 손톱에 물을 들여 주겠다면서 마을 샘터에서 봉숭아꽃과 아파리를 따서 절구에 찧었다. 손자 녀석은 싫다고 내뺐고, 손녀들은 할머니 무릎 앞에 얌전히 앉아서 할머니가 동여맨 손톱 위에 봉숭아물을 신기한 듯 들여다보다 제 손을 들어 불빛에 비춰보다 꽤나 재미있어 했다. 어릴 적 여름방학이면 냇물에서 멱을 감다가 싫증이 나면 냇가 바윗돌에 핀 바위옷을 돌로 갈아서 손톱에 물을 들이거나 아니면 아카시 이파리 줄기로 곱슬곱슬하게 머리를 파마하곤 했다. 여름 한철 동무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였으나 이제 그 동무들 다 어디로 갔는지.
밤새가 달빛을 가로지르는 사이 뜬금없이 소쩍새가 울었으며 어디선가 느닷없이 개가 짖었다. 샛노란 달맞이꽃들이 화들짝 놀라 꽃봉오리를 터뜨렸다. 밤에 깨어나는 숨탄것으로 수풀이 수선거리는 동안 달님은 구름 속을 빠르게 흘러갔다. 아니 구름이 달님 곁을 스쳐지났다. 밤길을 서성거리며 자식을 잃은 부모도, 부모를 잃은 자식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모든 이들이 저렇듯 덩두렷이 떠오른 달님만으로도 그저 한순간만이라도 평안하였으면, 그랬으면 좋겠다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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