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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의 성 [21]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21] / 삽화 윤광자 화가

2020년 12월 10일(목) 07:19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1903년, 홀 부인은 미국에서 안식년을 마치고 조선으로 왔다. 배편이 여의치 않아 화물선을 타고 일본의 고베까지 와서 제물포와 서울을 경유해 평양까지 오는 6개월의 힘들고 긴 여정이었다. 병원은 닥터 에스더가 잘 관리하고 있었다.
“에스더,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요. 안식년 동안 대학원 과정을 더 공부해서 최신 의술을 익혔고 지인과 선교회에서 여성 전용 병원을 지을 기부금을 넉넉히 후원해 주어 힘이 나고 감사가 넘치네.”
“모두 선생님이 열심히 노력하신 덕분이지요!”
제자와 선생님은 오랜만에 차를 마시며 즐겁고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홀 부인은 시공 업자들을 만나고 병원을 짓는 건축 작업에 들어갔다. 본관은 2층 건물로 양철지붕에 벽돌 굴뚝이 있게 설계하였다. 이런 서양식 건물은 당시 평양 주민들에게는 구경거리였다. 조선식 완만한 곡선의 한옥은 예술적이긴 해도 비용이 많이 들어서 병원 시설을 늘리고 개선하는 데는 서양식 건축이 경비나 건물 활용 면에 도움이 되었다.
새 건물은 깨끗했고 쓸모가 많았다. 건물 이름은 전에 평양 감사가 지어준 ‘광혜여원’을 그대로 붙이기로 하였다. 병원에 날이 갈수록 환자들이 많아졌고 홀 부인은 정성을 다해 그들을 치료하였다.
그런데 나라에 또 전쟁의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조선을 둘러싼 각 나라가 조선에 그들의 권력을 심으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904년 2월, 노일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불길한 소문이 나돌았다. 홀 부인은 십 년 전, 청일전쟁 중 다친 환자들을 돌보다가 남편이 전염병으로 사망한 뼈저린 아픔을 겪은 터라 긴장되었다.
조선에 와서 힘든 전쟁을 여러 번 겪었기에 전쟁에 대처하는 능력도 생겼다. 병원에 필요한 보급품과 물을 확보하고 모래주머니로 방책을 쌓았다. 무기와 탄약들도 공급받았으나 직원들 대부분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몰랐다.
동학군들이 다시 나타나 외국인들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소문까지 나돌아 긴장하였다. 1894년 동학군이 패배한 뒤 새로운 지도자로 손병희가 나타났다. 그는 많은 조선 청년들을 일본에 데려다 공부를 시켰다.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가 험악해지자 손병희는 동학 추종자들에게 ‘진보회’라는 정치 조직을 만들게 하였다. 필요하면 민중을 규합하여 정부의 부패를 없애고 조선의 정치적인 독립의 길을 다지는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병희로부터 정치적 임무를 수행 받은 동학군이 진보회를 일본의 앞잡이인 ‘일진회’에 팔아버렸다. 이 소식을 접한 손병희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동학이라는 이름을 ‘천도교’로 바꿨다. 손병희는 조선의 독립을 갈망하며 30개 이상의 학교를 세우고 100개 이상의 전도소를 만들었다. 이 천도교는 후일 기독교 단체와 연합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해 공헌하였고 삼일만세 운동에 큰 디딤돌이 되었다.

동학군들이 외국인을 공격하러 온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고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셔우드는 망원경을 가지고 언덕에 올라가 그들의 동태를 살핀 후 어머니께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다. 망원경으로 보니 멀리 일본군 선봉대가 평양으로 접근하는 것이 보였다. 일본 공병은 강을 건널 수 있게 부교를 가설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코사트 병사들은 평양의 북쪽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수염을 짙게 길렀고 날쌘 기마를 탄 몸집이 큰 병사들이었다.
십 년 만에 또 전쟁을 겪는 평양 주민들은 전쟁의 악몽이 생각나 모두 피난을 떠났다. 일본인 관리들은 백인 선교사들 가족에게 위급할 때 내어 보이라고 색깔 있는 작은 배지를 발급하였다.
그날 아침은 전투가 벌어질 기미가 없었다. 셔우드는 보통 때처럼 학교에 갔다가 성문으로 와보니 일본군이 성문을 지키고 있었다. 학교에 다녀온다고 배지를 보였으나 그 일본군은 배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고 셔우드가 러시아 꼬마스파이라고 의심을 하였다. 약간 수상쩍다는 혐의만으로도 몇 사람은 스파이로 간주되어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아, 저는 미국 선교사 아들이에요. 우리 엄마는 ‘광혜여원’ 의사셔요. 지금 학교에 다녀오는 길이예요. 저를 집에 보내 주세요!”
셔우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손짓, 발짓을 섞어 다급하게 말하였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마침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일본 장교 한 사람이 무슨 일인가 하고 다가왔다. 그는 다행히 조선말을 할 줄 알았다. 셔우드 말을 듣더니 부하 한 사람을 성안 광혜여원으로 보내 사실이 확인되자 그제서야 놓아주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홀 부인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셔우드의 외출을 금지했다.
전쟁은 평양과 가까운 북쪽에서 벌어졌다. 일본군들은 전사자들을 강둑으로 운반해 수 백구의 시체를 쌓아 놓고 단체 화장을 했다. 불길이 타오르자 시체들을 뒤틀리고 꼬부라졌고 어떤 시체들은 살아있는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앉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바라보지 못하게 하였어도 어린 셔우드는 이 끔찍한 장면을 멀리서 목격하였고 전쟁이 잔혹하고 끔찍하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알게 되었다.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1905년 9월 5일,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의 뉴햄프셔에서 포츠머스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그 후 2여 년이 지난 1907년 7월, 조선 황제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즉위한 순종 황제는 1910년 8월, 조선이 일본에 정식으로 합병될 때까지 이름뿐인 황제로 존재했다.

전쟁의 긴박감에서 벗어나자 선교사들은 그동안 힘겨웠던 마음과 머리를 식힐 필요를 느꼈다. 홀 부인은 배 한 척을 사들여 배 위에 기거할 수 있는 방을 만들었다. 조선의 배는 길고 밑바닥이 납작하여 수심이 낮은 곳도 갈 수 있었다. 짚을 엮어 지붕을 만들고 세 개의 방이 되도록 거적으로 칸을 막아 거실과 침실, 부엌으로 썼다. 배 양쪽으로 좁은 길을 두어 사공들이 뱃머리와 선미를 오가며 일하도록 설계하였다.
그동안 지친 병원 직원들에게 휴식의 시간을 주고 싶은 홀 부인의 배려였다. 배가 상류로 올라가자 높은 산들이 나타나고 경치는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모두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다 풀리는 듯 즐거워하였다. 배가 들어갈 정도의 큼직한 동굴들이 있어 동굴안을 탐험해 보기로 하였다. 동굴은 대낮인데도 시원하였고 천정에 아름다운 석순과 종유석이 가득 달려 있었다.
며칠간의 휴가를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에서 홀 부인은 이젠 셔우드가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급류 타기도 즐기며, 배도 잘 다루고, 낚시도 잘하는 모험심 많은 청소년으로 커 있었다. 점점 남편 닥터 홀을 닮아가고 있었다.

셔우드는 평양에서 하고 싶은 일이 몇 가지 있었다. “이 도시의 최북단에 비밀통로가 있는데 고대의 왕들은 위험한 사태가 닥치면 그곳으로 피신했다”라는 짧은 글을 평양 역사를 기록한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셔우드는 그 동굴을 탐사해 보고 싶었다. 그 통로는 강 밑을 지나 강 중심에 있는 커다란 섬으로 연결되었다고 하는데 그곳에 숨겨진 보물이 있을 것 같았다.
셔우드는 이 계획을 친구 존 베어드에게 이야기하였고 존도 찬성하며 적극적이었다. 두 소년은 이 일을 비밀에 부치고 탐험에 나섰다. 통로의 입구를 찾으려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이었다. 강 가까이에 덤불이 무성하게 자라고 땅이 우묵하게 들어간 한쪽에 동굴처럼 보이는 컴컴한 출입구를 발견하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바로 저기야!”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날도 어두워지고 혹시 뱀이나 야생동물들의 습격을 받을지 몰라 다음날 무장을 하고 다시 오기로 하였다.
다음날 성냥, 초, 삽을 준비하여 장화를 신고 다시 갔다. 그곳은 돌로 벽을 만든 통로였다. 통로를 따라 30미터쯤 갔더니 또 다른 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두 소년은 삽으로 벽 밑을 파기 시작하였다. 오래된 뼈다귀가 나왔다. 밑을 더 파서 벽 밑으로 통과하려고 했으나 그것이 무모한 모험임을 깨달았다. 밑을 더 파면 돌벽이 무너질 것 같았다. 주저한 끝에 탐사를 포기하고 말았다. 셔우드는 그 밖에도 장총을 다루는 것은 배워 사냥도 즐겼다. 누에 치는 것도 배워서 명주실을 뽑아 조선인 친구한테 부탁하여 명주 천을 어머니께 선물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모험을 좋아하고 장래 사업가가 되고 싶다는 셔우드는 1906년 어느 날, 그의 인생에 전환점을 준 은인을 만났다. 평양의 선교사들이 원산에서 선교사로 있던 캐나다 선교사 닥터 로버트 하디(R. A. Hardie) (1901년 간성감리교회 창립한 선교사)를 초청해서 선교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하디 선교사는 1890년 10월 셔우드 아버지 닥터 홀이 처음 부산에 도착했을 때 마중을 나왔던 분이기도 하다. 닥터 홀은 하늘나라로 갔지만 그가 세운 평양 교회에 와서 닥터 하디는 조선말로 특별 예배를 인도하였다.
셔우드는 그날 하디 선교사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업가가 되려던 꿈을 접고 의사가 되어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와서 조선인들의 병을 치료해 주는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하디 선교사의 설교는 이러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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