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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숲으로 [41]

향토소설가 김담 연재 산문(散文)

2020년 05월 07일(목) 09:50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갈까마귀 떼 날아간 자리에 도둑눈이 내렸다. 숲정이에 듬성드뭇한 생강나무는 한껏 꽃망울이 부풀어올랐고 산 기스락 찔레꽃나무는 참새 혓바닥 같은 새싹을 내밀었으며 논두렁에 꽃다지는 깨알 같은 꽃잎을 터뜨리고 있었지만, 하룻밤 사이 꽃들은 난데없는 소나기눈 속에 갇히고 말았다. 우수와 경칩 사이 개구리들 입이 전례 없이 이르게 떨어졌으나 바투 다가온 농사일정에 기대 반, 근심 반이었던 어제 일들이 한순간 저 깊은 땅켜 속으로 까맣게 묻혔다. 해 질 녘, 빗방울은 진눈깨비를 지나 시나브로 함박눈으로 바뀌고 있었다. 자욱하게 피어나는 비안개로 겨우내 큰 눈비 없는 따뜻한 겨울을 보내던 대지는 모처럼 초근초근해졌다.
산책길에서 만난 이웃마을 어르신은 논둑에서 닥나무 껍질을 벗겨내고 있었다. 마을에 몇 그루 없어 오며가는 눈여겨보던 나무들이었다. 까닭을 여쭈었더니 손주들에게 팽이채를 만들어주려고 한다면서 함박웃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 어릴 때도 아버지께서 소나무를 깎아 팽이를 만들고, 닥나무 껍질로 팽이채를 만들어서 얼음강판에서 놀 수 있도록 해주었다. 팽이에 쇠구슬을 박고, 크레용으로 알록달록 색깔도 칠했다. 누구의 팽이가 오래 돌아가는지 내기했다. 닥나무로 만든 채찍이 내는 바람소리는 참으로 근사했지만 이젠 마을에서는 누구도 닥나무로 옷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종이조차 만들지 않았다. 오디가 익어가도 따먹는 이 없어 혼자 두고 먹던 나무들이었지만, 또 다른 쓰임새를 찾은 듯했다.
올해는 영등할미께서 딸과 며느리, 모두의 손을 잡고 오셨는지 바람과 비가 갈마들면서 바람은 곧잘 비가 되었다가 어느 날은 또 비와 바람이 한꺼번에 매우 사납고 거칠게 휘몰아쳐서 문밖출입이 쉽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 19’로 인해 사망자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던 터라 설상가상이었다. 속초시에서 확진자가 나왔고, 이 확진자 동선이 공개되면서 고성군 관내 마을 경로당이 폐쇄되었으며 예방 수칙을 안내하는 문자 메시지가 줄을 이었다. 하물며 확진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문자 메시지까지 오는 걸 보면 한편 안도하면서도 과도하다는 기분도 없지 않았고, 또 한편으로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다.
밤사이 도둑눈이 내린 줄도 모르고 있다가 아침 햇살에 놀라 문을 열었다가 주춤했다. 간밤 눈은 쌓여 세상이 온통 새하얗게 변했다. 천지개벽이었다. 햇살과 눈이 빚어내는 풍광에 눈이 시울었다. 눈곱도 떼지 못한 체 마을 앞산 기스락 근처, 논둑에 저 홀로 우뚝한 금강소나무를 찾아서 서둘렀다. 큰 산 산마루에서부터 내려오기 시작한 햇살은 봄눈을 녹이면서 빠르게 하강하고 있었다. 응달진 곳은 여전히 눈으로 덮여 있었지만 마음은 다급했다. 햇살은 맑고 바람도 없었으므로 눈에 덮인 세상은 그린 듯 빼어났지만, 고묵은 금강소나무 나무갓에 쌓여 있던 눈은 비처럼 녹아내리면서 나무 둥치 주변은 둥그렇게 금을 그은 듯 그곳만 눈석임물로 질척질척했다.
논둑길 금강소나무는 마치 조선 후기 18세기를 살다간 능호관 이인상이 그린 ‘설송도(雪松圖)’를 떠올리게 했으므로 눈이 내려 쌓이면 일부러 찾아가곤 했다. 설송도는 바위짬에 두 그루 나무가 한 그루는 거칠 것 없이 완고하고 기세차게 위로 뻗어 올라갔고, 또 한 그루는 이와 다르게 강인하고 꼿꼿한 나무줄기 뒤로 눕듯 휘어져 가로와 세로가 절묘하게 어울렸다. 이를테면 직선에 함축된 곡선이 드러난 모습이랄까. 아마도 이(l)자로 하늘로 치솟듯이 뻗은 나무 한 그루만 있었더라면 그림은 야멸치고 강퍅해 보였을 테지만, 그 뒤로 슬그머니 휘어진 나무 한 그루를 배치함으로써 엄정하면서도 동시에 부드럽고 소탈한 풍정을 드러냈다. 두 그루 나무 모두 고묵어 나무줄기가 성기었고, 거기에 눈까지 덮였으니 세상 풍파 다 겪은 늙은이의 마음 한자리가 이와 같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무갓에서 끊임없이 눈 녹은 물이 떨어지고 있었으므로 오래 서 있지 못하고, 그리고 나무 전체 모습을 보려면 나무 아래서는 불가능했으므로 산 기스락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도 소나무의 전체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렇더라도 적당한 자리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산 기스락에 있는 작은 대숲까지 걸음이 이어졌다. 그늘진 대숲에는 눈더미에 묻혔던 대나무들이 댓잎을 덮은 눈을 털어내는 소리로 분주탕이었다. 마치 새떼들이 깃을 치듯 시끌벅적했다. 멀리서는 들리지 않던 소리가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고조되었다. 폭풍우가 휘몰아칠 때처럼 잠시잠깐 아득한 기분이었다. 나부랑납작 짓눌려 있던 대나무들이 허리를 곧추세우기 시작했다. 대숲이 수선수선하는 소리에 취해 잠시 소나무는 잊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이웃마을로 향했다. 이제나저제나 때를 가늠하고 있었으나 코로나 19로 조계종 산문 폐쇄 소식이 들렸다. 매해 이른봄이면 양양 낙산사에 들러 얼음새꽃을 만났으나 올해는 그럴 수 없었다. 이날 목적지인 현내면 산학리는 노인산과 고성산 사이에 자리한 마을로 고성군 보호수인 소나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옛 성터도 아직은 그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고, 무엇보다 얼음새꽃, 복수초(福壽草)를 볼 수 있었다. 옛 성터에는 12그루의 금강소나무가 한자리에 모여 있었으나 가시덤불을 헤치고 들어가야 나무들 그늘이라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그곳에 서면 왼쪽으로는 노인산을, 오른쪽으로는 고성산을 볼 수 있으며 정면으로는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까치봉 줄기를 엿볼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옛 죽정초등학교 앞을 지났다.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육상대회엘 나가야 하는데, 우리 학교에는 내게 맞는 ‘스파이크 운동화’가 없어서 이 학교에서 빌려 신었다. 죽정초등학교는 분교로 시작하여 학교가 되었다 다시 분교가 된 뒤 2008년 학생 수 감소로 폐교되었다. 늙은 미루나무가 울타리 곁에 있었으나 교문은 쇠줄로 가로막혀 있었다. 돌아서서도 텅 빈 운동장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사라진다는 것은 어쩌면 소리를 잃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라고 웅얼거리며 걷는 가운데 교문 앞에 서 있을 때도 그랬지만, 어디선가 자꾸 냄새가 흘러들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냄새는 더욱더 짙어졌다. 그 냄새는 우리 마을과 이웃 마을 사이에 있던 돼지 축사에 흘러나오던 냄새와 닮았다.
아니나 다를까, 모퉁이를 돌아서자 줄지어 서 있는 자동차들과 방역 초소 건물이 그리고 바닥에는 누런 석회가루가 덕지덕지했다. 그러고 보니 길섶 도랑 옆에 거대한 돼지 축사가 골짜기 움쑥하니 들어간 곳에 자리했다. 세상이 온통 코로나 19로 들썩거리는 까닭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아프리카 돼지 열병(ASF)이 여전히 종식되지 않은 채 우리들 사이에 있었던 것이었다. 치료제와 백신이 없다는 점에서 아프리카 돼지 열병과 코로나 19는 비슷했으나 아프리카 돼지 열병은 돼지과들 사이에서, 코로나19는 인수공통이라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전염병이라는 것은 동일했다. 집에서 기르는 돼지든, 야생에서 사는 돼지든 전염병 없이 살다 가면 좋으련만, 하물며 인간이랴.
청명했던 하늘에 시커먼 구름타래가 내뻗어오면서 흩뿌리던 비꽃은 그예 빗방울이 되었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았다. 금강소나무는 논들, 산 기스락 가까운 곳에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수풀이 무성하지 않은 때라서 더욱더 도드라졌다. 논길 한가운데서 노인께서 운전하는 경운기를 비껴서 조심스럽게 다가들었으나 눈앞에서 갑작스레 까마귀 떼가 날아올랐다. 외솔을 둘러싸고 까치 떼와 까마귀 떼가 서로 맞섰으나 단독인 말똥가리는 떼로 달려드는 까마귀들을 피해 멀찍이 줄행랑쳤다. 맹금인 말똥가리도 혼자서는 까마귀 떼들의 위협을 피할 수 없었던 듯했다.
철망으로 둘러싸여 있는 소나무는 외솔이었으나 두 갈래로 가지 뻗어서 자칫 잘못 보면 두 그루처럼 보였다. 조선 후기 간성군수를 지낸 권익륭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있다고 알려졌으나 글자가 마멸되었을 뿐만 아니라 메마른 덩굴 식물에 가려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그제야 이곳 외솔배기를 찾은 이유를 떠올렸다. 복수초, 얼음새꽃을 찾아 기스락으로 향했다. 묘지였을 그곳에는 빗방울을 머금은 얼음새꽃이 샛노란 연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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