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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의 성[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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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3] / 삽화 윤광자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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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5월 26일(화) 10:10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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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고성신문 | | 로제타는 닥터 홀의 편지를 받고 기뻤다.
중국 선교사로 갈 짐을 싸고 있다는 지난번 편지를 받고는 두 마음으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중국으로 가서 제임스 홀과 결혼해서 함께 의료선교를 하고 싶은 마음과 여성 해외선교회와 약속한 5년이라는 의무기간을 조선에서 채워야 한다는 갈림길에서 고심하고 있었다.
이 무렵 미국 감리교선교회의 중책을 맡고 있던 닥터 스크랜턴과 볼드윈은 성실하고 사명감이 강한 닥터 홀을 캐나다 선교회에 다시 보낸다는 것은 미국선교위원회로서는 큰 손실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캐나다 선교위원회를 설득하여 그를 미국선교회 의료선교사로 약혼녀가 있는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을 보았던 것이다.
닥터 홀은 로제타에게 편지를 보냈다.
“로제타, 나는 방금 조선 의료 선교사로 임명하겠다는 놀라운 소식을 통보받았소. 조선에서 사랑하는 당신과 함께 의료 선교를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소.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오. 나는 주님께 중국이든 어디든 주님 뜻대로 따르겠다고 기도드렸소.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디든지 주님을 위해 갈 것이라는 점을 아셨소. 나는 지금 의과 대학원 과정을 좀 더 공부하고 있소. 이 학업이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귀하게 쓰이길 바랄 뿐이요. 만날 때까지 건강하길 기도하오.” (1891. 9. 19. 당신을 사랑하는 제임스)
편지를 읽던 로제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사랑하던 약혼자를 혼자 미국에 두고 기약 없이 떠나오던 날이 생각났다. 결혼하여 남편과 같이 중국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조선으로 파견된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았고, 당시 은둔 왕국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에서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이 있을 거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약혼자 제임스가 조선으로 온다고 하니 꿈만 같고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로제타는 문득 일 년 전 조선에 처음 왔을 때의 첫인상이 기억났다. 그녀는 1890년 10월, 부산항에 첫발을 디뎠다. 언더우드 박사는 5년 먼저 조선으로 왔다. 미국 감리교단이 조선에서 선교 활동 시작한 것은 1885년이다. 조선의 선교는 현지의 관습과 풍습, 미신, 서양인에 대한 경계심 등을 고려하여 매우 세심하고 신중하게 시작해야 했다.
당시 조선은 이씨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다. 여성은 낮에 함부로 외출할 수도 없었고 가급적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해야 한다는 관습이 불문율처럼 되어있었다. 여성들은 대중 앞에 나서지 못하였고 부모 뜻대로 결혼한 뒤에도 남편 집에서 일하며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풍속 때문에 병이 든 여자를 치료하려면 여의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닥터 스크랜턴(감리교단의 대표)은 여성 해외선교회에 여자와 아이들만 따로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들어 달라고 청원했다. 이 요청이 수락되어 1887년 여의사 닥터 메타 하워드를 조선에 파견하였고 처음으로 여성 전용 병원이 세워졌다.
이 병원은 메리 피치 스크랜턴 여사가 조선에 처음 세운 여학교와 한 장소에 있었다. 이 학교의 이름을 명성황후가 ‘이화학당’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최초의 여의사 닥터 하워드는 수천 명의 여성과 어린이들을 치료하였다. 그러다가 무리하여 건강이 악화되어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귀국하게 되었고 그 뒤를 잇기 위해 로제타 셔우드가 조선에 온 것이다.
부산항에 도착하던 날 로제타는 다음과 같은 일기를 썼다.
“조선 해안이 시야에 들어왔다. 배가 육지에 가까워지면서 당분간 내가 살아갈 이 나라를 비상한 관심으로 바라보았다. 병든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려고 오는 나를 이 나라 사람들은 별로 환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언덕과 산들이 매우 가파르고 암석이 많고 나무가 없어 삭막해 보였다.
부산항에서 24시간을 체류했다. 나룻배를 타고 육지에 올라 제일 먼저 전신국에 가서 서울 스크랜턴 여사(한국 개신교 최초의 여선교사)에게 부산에 도착했다는 전보를 쳤다. 이 전신국은 부산과 서울을 이어주는 조선에서 유일한 전신국이다.
마을을 둘러보니 산 근처에서 구불구불한 길을 왕래하는 조선인들을 볼 수 있었는데 모두 위아래 하얀 옷을 입고 있어 그림 같았다. 대부분이 남자였고 여자는 남자가 집에 들어온 뒤 해가 진 다음에야 밖에 나갈 수 있다고 하였다. 미국 남자들이 이 모습을 보면 얼마나 신기해하고 좋아할지 궁금하다.”
그녀는 조선에 와서 처음 본 인상 깊은 낯선 풍경들을 폭 15cm, 길이 31m가 되는 아주 긴 종이 두루마리에 써서 뉴욕 리버티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냈다. 그 내용 중에는 구한말 조선의 풍경들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기차나 철도도 없고 마차가 다닐 수 있는 큰길도 없고 먼 길을 가려면 걸어서 가던지 가마나 말을 타야 했다. 남자들은 결혼하기 전에는 머리를 길러 가르마를 타서 땋아서 뒤로 늘어뜨린다. 쉰 살이 지나도 총각이면 소년 취급을 했다. 중국인들은 정수리 부분을 면도하여 깎는데 조선 남자들은 이 부분을 길러 머리를 위쪽으로 틀어 올려 머리 중심 앞쪽에 상투를 만든다. 나무나 은으로 만든 핀을 꼽고 말총으로 만든 망건을 써서 머리털이 빠져나오는 것을 막는다. 또 한 그 위에 장신구 비슷한 챙이 넓고 관처럼 생긴 모자를 쓴다. 상투가 관에 들어가게 되어 있고 양쪽에 끈이 달려 턱 밑에 묶는다. 모자는 대나무를 가늘게 잘라 만든 뼈대에 얇은 천을 씌워서 만들지만, 고급품들은 말총으로 만들고 색깔은 대부분 검은색이다.”
조선의 남녀 복식을 비롯하여 풍물 생활습관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관찰하고 기록하였다. 그녀가 조선에 와서 제일 눈길을 끈 것은 ‘지게’이다. 나무로 만든 이젤 같이 생긴 것으로 조선인들은 그것을 등에 지고 무거운 짐들을 운반하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였다.
부산에서 제물포항으로 왔다. 환영 나온 게일 선교사와 미국에서 한배를 타고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칠 마거리트 벵겔 양과 또 다른 한 사람과 4인 1조가 되어 가마를 탔다.
가마 한 대에는 8명의 가마꾼이 따랐다. 한 시간에 평균 6km의 속도로 빠르게 걷는데 교대할 때는 가마를 내리지 않고 멜빵을 한쪽 어깨에 걸치면서 들어왔다. 이때 다른 편은 물러나는 식으로 민첩하게 교대하는데 걸음이 멈추거나 늦어지지 않았다.
거리에 바퀴 달린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가끔 양쪽에 짐을 지고 가는 작은 말이나 소가 끄는 작은 달구지는 볼 수 있었다. 우리의 여행 트렁크는 제물포에서 서울까지 장장 45km를 짐꾼들이 지게에 져서 날랐다.
지게꾼들의 어깨가 얼마나 아플까? 두꺼운 가죽이나 천을 대면 덜 아플 것 같다고 했더니 함께 한 게일 선교사가 몇 번을 권해도 자신들의 방법만 고수 할 뿐 절대 듣지 않는다고 한다.
앞으로 언어도 통하지 않고 풍습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진료를 하며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할까? 마음의 각오를 하고 오긴 했지만 로제타의 마음에 갑자기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저들을 진심으로 치료해 주고 섬기면 언젠가는 마음이 열리겠지….’
로제타의 마음이 숙연해졌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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