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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의 성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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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40] / 삽화 윤광자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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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2월 25일(금) 08:43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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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고성신문 | | “외국인 악귀들이 우리 조상의 묘소를 훼손했다!”
공사장에 급히 도착해보니 성난 군중들이 살기가 등등한 모습으로 모여 있었다. 험악한 몸집의 고함소리, 손에 든 돌멩이로 금시라도 셔우드를 공격할 것 같았다.
그들을 진정시키고 이야기를 들어 보니 불량한 사람들이 큰 잘못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인 업자는 요양소 건물을 돌을 사용하여 짓겠다고 설계하고 돌을 많이 사들였다. 여러 사람들이 돌을 팔려고 가져 왔는데 이 중에서 양심이 없는 사람들이 묘소 앞에 있는 상석을 훔쳐 와서 깨뜨려 판 것이다.
셔우드는 사건의 전모를 들으며 아찔했다. 조선인들은 조상의 묘소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묘 앞에 음식을 차려 놓고 제사 지내는 상석을 훔쳐 왔으니 중대사가 아닐 수 없었다. 직접 가서 살펴보니 글씨가 새겨진 석판들이 돌무더기에 섞여있었다. 이 돌들을 중국인 업자들에게 팔아먹은 불량자들은 벌써 도망가고 없었다. 가져온 상석들도 이미 여러 조각이 나서 주인에게 돌려 줄 수 없었다.
셔우드는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했다. 깨뜨린 상석은 산소에 원상태로 복귀 해주고 위로금도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돈만 아는 사람들의 몰염치한 일이지만 미리 막지 못한 잘못을 거듭 사과했다. 군중들은 셔우드의 정중한 사과에 마음이 풀렸는지 원상태로 잘 복귀해 달라고 말하고 노여움을 풀고 돌아갔다.
‘아, 이런 사실을 건축이 완공된 후에 알게 되었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까?’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발견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결핵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려면 일광욕실이 필수이다. 적외선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셀루 글라스(cellu-glass)라는 특수한 재료를 썼다. 자외선 투과유리(vita)를 사용하면 적외선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지만 셀루 그라스는 내구성도 강하고 값이 저렴하여 환자들이 쓰기에 부담이 없다. 퇴원해 집으로 돌아가서도 요양소에서 배운 방법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셔우드는 조선인들이 외국인처럼 살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단지 그들에게 서구의 지식을 배우게 해서 자신들의 생활방식에 이용하게 해주고 싶었다.
‘동양과 서양의 좋은 점들을 취사선택하여 자기의 것으로 활용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수도…….’
건축자금이 넉넉지 않아 중앙관과 병동사이에 연결된 일광욕실을 하나 밖에 지을 수 없다. 더 필요한 공간은 건축 비용을 줄이기 위해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짓기로 했다.
중국인들은 돌을 다루는 일에 능숙하고 조선인들은 흙과 목공일에 우수한 재능이 있었다. 그 인부들을 다룰 때 소년시절, 어머니의 병원 짓는 감독을 했던 일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경험은 평생의 유익한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에서 ‘간호’라는 개념은 비교적 새로운 개념이었다. 처음 쓰이기 시작한 것이 1903년 마거리트 에드먼드 양이 해외여성선교회의 후원으로 평양에서 처음으로 간호사 양성소를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조선어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없었다. 어느 학식 높은 조선 어르신이 선교사들을 위해 간호원(看(덧말:간)護(덧말:호)員(덧말:원))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이 말은 병자를 보호하고 돌봐준다는 뜻이었다. 1906년에는 쉴즈(E. L. Shields) 양이 서울 세브란스에 간호사 양성소를 만들었는데 이때도 에드먼드 양이 도와주었다. 그렇게 하여 평양과 서울, 두 곳에 간호학교가 생겼으나 간호사 수가 많이 모자랐다. 당시 조선의 관습은 여자를 교육시켜 모르는 남자나 여자의 병을 수발들게 하는 직업은 나쁜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양원 병동에는 침대 두 개마다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이 사용할 독립된 부엌이 하나씩 있도록 설계해야 했다.
병원 건축에 관한 제반 문제도 신경을 써야했지만 의료품과 의약품의 구입하는 일에도 심려를 기울여야했다. 셔우드는 이 물건들을 관세 없이 통관 시킬 수만 있다면 많은 경비를 절약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통관 교섭을 시작했다. 의료기구와 용품은 일본 관리의 담당이었고, 의약품은 조선관리가 담당했다. 이 두 통관 절차를 허락 받기위해 명함도 일본 글씨와 한자 한글을 함께 쓴, 두 개의 명함을 만들었다.
먼저 일본 관리를 찾아가 의료품을 관세 없이 통과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그는 조선인들이 일본의 고마움을 모른다고 많은 불평을 하며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다.
“당신과 나는 조선을 도우려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가 셔우드의 말에 동조를 하였다. 천연두 퇴치 등 일본의 위생 보건 활동에 대한 공적을 높이 치하하고 통관을 허락해 달라고 공손하게 부탁 했더니 그 관리는 숨을 크게 몰아쉰 후 서류에 ‘무관세 통관’이라는 관인을 찍었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이번에는 의약품을 담당한 조선인 관리를 찾아갔다. 조선인 관리는 품위도 있고 덜 의례적이었다. 인본인 관리처럼 긴장한 목소리도 아니고 사무실 옆방에 방석을 깔고 앉게 한 뒤, 찾아 온 용건을 물어 분위기도 편안했다. 일본에 대한 불만을 한 참 터뜨린 그 관리는 의외의 말로 셔우드를 놀라게 했다.
“당신은 어째서 이렇게 비싼 서양 의약품을 수입합니까? 우리 조선 의약품은 오래전부터 효능이 입증 되었습니다. 이를 테면 호랑이발톱, 표범담즙, 뱀으로 만든 약들 보다 효능이 좋은 것을 어디서 구한답니까?”
셔우드는 내심 놀랐지만 겉으로 태연하게 말했다. 자신도 서울에서 태어났고 조선에서 자라 그 같은 효능을 알고 있으나 이 약품들은 치료효과와 용도가 다르니 조선 사람들의 병 치료를 위해 통관시켜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하였다. 결국 그 조선 관리도 서류에 ‘무관세 통관’이라는 관인을 찍었다.
‘휴, 이제 하나하나 해결이 되어 가는 구나!’
셔우드는 관청을 나오며 긴 숨을 내 쉬었다.
요양원 건축공사와 그에 필요한 부수적인 일들이 차근차근 이루어져 갔다. 때 마침 어머니 닥터 로제타의 오랜 숙원사업인 여자의학교 설립의 꿈이 이루어졌다.
수많은 장애와 어려움을 극복하고 1928년 9월 4일 조선에서 최초로 경성여자 의학전문학교가 설립 된 것이다. (이 병원이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이다.)
로제타가 설립한 이 학교의 교수진이나 직원들은 모두 무료봉사를 자원하였다. 훗날 학교가 계속 발전하여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자 조선 사람들 스스로 경제적인 지원을 맡아주었다.
요양원 건물은 그해 9월에 완성되었다. 셔우드는 구불구불 휘어진 푸른 소나무 숲속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요양원 건물을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멀리 앞 쪽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고기잡이배들의 평화로운 모습은 환자들이 휴식하고 병을 회복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이루어 주셨음을 알았고 그 감동은 말로 표현 할 수 가 없었다.
‘해주결핵 요양학교’의 공식 개교식은 1928년 10월 28일로 정했다. 이 학교의 봉헌식은 웰치 감독의 후임으로 조선에 온, 제임스 베이커 감독이 맡아주기로 했다. 노블 목사, 빌링스 박사를 비롯해서 도지사 루터 박, 일본 관리 대표로 온 사사키 경찰국장 등 많은 내빈들과 함께 셔우드와 메리언도 나란히 개원 축하테이프를 끊었다.
닥터 김이 요양원 건립경위를 발표하였다.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오(Oh. K. S)학장은 요양원이 조선에서 얼마나 시급하고 중요한 일인지 연설했고, 베이커 감독은 해주남산에서 시작한 이 요양소를 1885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사라락 호숫가에 결핵요양소를 세운 트뤼도 박사의 요양소와 비교해서 연설했다. 결핵으로 고통 받는 조선의 결핵 환자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막이 열리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닥터 에스더 박 같이 그렇게 큰 뜻을 가지고도 비참하게 목숨을 잃는 일이 없길 바랐다.
환자들이 기본적인 생활용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요양원 상점의 선반에 일회용품을 진열했다. 해주 시장이 이것을 보고
“아하, 의료품이나 일회용품을 여기서 구입할 수 있으니 환자들이 시내로 나오지 않아 시민들에게 전염을 예방하게 되는 군요.”
셔우드는 고개를 끄떡였다. 이제야 그들이 자신의 뜻을 조금씩 이해 해 주는 것 같아 기뻤다. 현재 완성된 동쪽 건물과 같은 모양으로 지어질 별관 건물은 토목기사로 만주 신천에서 선교사로 있는 에드웬 캠벌이 설계하기로 했다. 본관 건물도 그가 설계한 것으로 앞으로 지어질 부수적인 건물에 대한 청사진도 제시했다. 별관 한 채를 짓는데 약 8백 달러의 건축비가 필요한데 별관이 지어지면 입원실로 쓰고 입원비로 왜래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해 줄 계획이었다.
처음 3주는 세 명의 여성 환자가 입원했는데 한 달이 지나자 전국에서 입원하겠다는 사람들이 쇄도하여 입원실이 부족하였다. 11월이 지나자 난방비로 운영비가 계속 적자가 되었다. 겨울은 지낼 난방비 걱정을 하고 있는데 가뭄 속에 단비 같은 반가운 소식이 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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