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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기억이다

금강칼럼 / 이성식 칼럼위원(고성문화원 부설 고성학연구소 연구원)

2023년 07월 18일(화) 08:40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기억은 생명의 중요한 기능이다. 기억이 소실되면 삶이 불가능해지는 경우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기억과의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최근에 만난 몇몇 어른들도 매일 천자(千字)를 쓰고 노래가사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기억의 문제는 생명현상이면서 중요한 정신작용이기 때문에 삶의 질을 좌우한다고 말할 수 있다.

기억은 경험의 전제조건이라고도 말한다. 기억은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경험의 가능성이다. 즉 기억이 선행적으로 있어야 경험적인 것이 가능해진다는 설명이다. 이때의 기억은 세상을 보는 눈이자 감각이고 지평이다. 눈과 감각이 없다면 세상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누가 어떤 기억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삶을 다르게 경험한다. 따라서 기억의 차이가 삶의 질적 차이로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기억은 삶의 흔적이다. 내가 세상과 마주치면서 만든 정신의 흔적이 기억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삶의 흔적은 상처로 얼룩져 있기 마련이다. 이 아픈 기억은 현재의 삶에 투영되면서 또 다른 기억으로 덧칠해지거나 다른 삶을 위한 에너지로 발현되기도 한다. 특히 기억은 의식적인 영역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많은 기억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면서 의식을 통제한다고 한다. 이쯤 되면 기억은 무서운 존재다. 어떤 기억은 우리를 괴물로 이끈다.

한편 냄새와 맛의 기억은 또 어떠한가. 특히 맛의 기억은 누구나 경험하는 보편적인 회상기억이다. 그것은 때로 어머니의 기억이고 고향의 기억이다. 대지의 물질성을 만나는 강력한 체험인 것이다. 맛의 기억을 통하여 우리는 체계적인 피로나 권태로부터 벗어나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잠시나마 맛볼 수 있게 된다. 이맘때 필자에게 맛의 기억은 소금에 절인 돌메기와 오징어를 봄여름에 찬으로 먹었던 일이다. 이런 맛의 기억은 단순히 회상적인 기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연상의 기호들을 따라 확장되는 의미의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그 순간 우리의 일상은 다채로운 색깔로 변한다.

또한 많은 기억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재구성되기도 한다. 순수한 과거가 없다고 말하듯이 순수한 기억도 없다. 심지어 어떤 기억은 왜곡을 넘어 자기부정을 불사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 공동체의 기억은 권력에 의해 조작되기도 한다. 그래서 기억의 문제는 복잡한 구조를 띠고 있다. 그럼에도 지역의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기억에 의존하여 역사를 재구성하고 해석하는 일이 다반사다. 특히 해방 전후 지역의 역사는 기억에 의한 구술사가 태반이다. 그마저도 1세대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만 간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역사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또한 과거의 시간과 공간을 매개로 빚어진 이야기를 현재라는 시점에서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것이 역사다. 시간과 이야기, 그리고 집단적 기억과 흔적은 역사의 뼈대라 할 수 있다. 많은 이야기는 기억으로 전승되고 있다. 역사(歷史)와 신화(神話)는 이야기의 구조를 공유한다. 그럼에도 오늘날 역사는 신화를 밀어내면서 자기 영역을 펼쳤다. 하지만 신화는 역사의 기원이란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신화에서 역사가 탄생했던 것이다. 단군신화가 그렇다. 단군 이야기는 신화이고 역사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교육은 단군신화를 마치 ‘믿지 못할 이야기’ 수준으로 교육을 실시해왔다. 식민사관의 교육적 폐해라 할 수 있다.

고성의 역사에서도 신화적인 이야기는 일부나마 전승되고 있다. 건봉사와 화진포 및 송지호를 비롯하여 마을 지명과 관련한 요소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요즘에는 대체로 이러한 이야기들이 잊혀져가는 분위기다. 사물로부터 기억이나 이야기가 소실되어 가는 것이 정보화 사회의 특징이다. 더구나 아이들이 이러한 이야기들로부터 멀어져 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기억은 ‘불필요한 정신노동’이 되었다. 기억은 정보로 대체되었다. “정보의 저장은 기억의 삭제, 역사적 시간의 삭제를 전제한다.”(한병철) 사물에서 기억이 소실되고 상품으로 취급되면서 역사 역시 홀대받는 사회가 되었다. 역사의식이란 개념도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다. 시간의식의 부재다. 정보가 돈이고 자본으로 대접을 받으니 기억과 역사, 시간과 이야기가 밀려나간다.

기억은 배움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맺고 있다. 배움은 결핍을 채우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배움은 인간을 새롭게 탄생시킨다. 우리는 배움의 힘으로 날마다 새로운 자신을 만날 수 있다. 배움은 인식이고 기억의 힘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

낯선 여행지에서 사전 지식이나 가이드 없이 홀로 여행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전부다. 이때 기억은 우리를 새로운 경험으로 안내하는 가이드가 된다. 기억의 힘으로 세상을 보는 셈이다. 우리가 만나는 대상으로부터 방출되는 신선한 기호(이미지)들이 기억과 마주치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것이다. 예술은 이러한 미적 체험과 다름없을 것이다.

이제 고성을 ‘안다는 것’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양한 해석을 열어놓고 먼저 운을 떼면, 고성의 사람과 장소에 대한 기억들을 갈무리하고, 고성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기억과 인식을 바탕으로 다시 사람과 장소를 새롭게 만나면서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 하나의 길이다. 개인과 공동체의 기억과 기호들이 마주치면서 다양한 자기 차이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방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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