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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城사람으로 살다

금강칼럼 / 이성식 칼럼위원(고성문화원 고성향토사연구소 연구원)

2022년 08월 10일(수) 09:35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죽왕면 가진리. 내가 태어난 이곳은 초등학교 입학하기 직전(1963년) 행정구역이 ‘고성군’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니 출생지와 성장지가 행정상 일치하지 않는 셈이다. 지금까지 양양 출생임을 잊고 살았다. 의심 없이 나는 고성사람이다.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나를 규정하는 언어와 역사가 고성의 그것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언어, 그리고 역사!

몇 해 전 귀향했다. 최근 내게 귀향이 무엇인지를 요량해보았다. 우선 짚게 되는 것은 잃어버린 언어의 회복이다.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나 있던 언어의 조각들이 이곳저곳에서 장소성으로 깨어난다. 그동안 도시생활에서는 환기조차 쉽지 않았던 유년의 언어들, 이제는 그 억압으로부터 회귀하는 말들이 무의식을 깨운다. 마치 이민자가 고국으로 돌아와 모국어를 체험하는 것처럼 말이다.

골초신 할머니가 곰방대를 물고 봉담배를 피우며 툭툭 내뱉으시던 낯선 단어들, 아버지가 일상적으로 사용하시던 고기잡이와 관련된 숱한 단어들, 어머니가 부엌 아궁이 앞에서 가르쳐주시던 한글, 친구들과 온갖 놀이를 하면서 주고받았던 수많은 언어들, 동네 어른들로부터 듣거나 친구들끼리 주고받았던 각종 욕설들, 들과 산 그리고 해안절벽을 쏘다니며 붙잡으려했던 새들의 이름, 지게를 지고 나무하러 다니면서 익혔던 나무이름들, 군부대에서 빌려본 ‘육군만화’에 등장하던 단어들, 수영하면서 만난 물밑 조개와 해초의 이름들, 낚시비늘(미늘)에 걸려 고통스런 표정을 짓던 물고기의 이름들, 여름밤 온 동네사람이 옹기종기 백사장에 누워 드넓은 은하수를 보며 함께 속삭이던 때의 언어들, 성장기의 갈등을 감싸주던 앞바다에서 낚아 올린 검푸른 언어들, 수평선을 바라보며 무한을 상상했던 언어들이 해오름처럼 불쑥 얼굴을 내민다.

우리가 사물과 만나는 것은 감각직관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개념이라는 언어를 가지고 사물을 규정하고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하여 세상과 소통하고 만나는 셈이다. 우리는 사물 그 자체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언어는 은유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은유는 다의성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하나의 사물에도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진다. 또한 인간은 환경에 따라 특별한 언어를 사용하고 발달시킨다. 예를 들면 북극의 이누이트인들은 얼음과 눈에 관한 언어를 발달시켰고, 인디언들의 말에는 뱀장어에 관한 수십 가지의 명칭이 존재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고장의 명물로 남아있는 명태(杆太)도 십 수 가지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표준화된 서울말과 지방의 사투리가 존재하듯이 여성과 남성의 언어, 어촌과 농촌의 언어가 차별성을 지닌 채 존재한다. 나는 고성지방과 남성, 그리고 어촌의 언어환경에서 성장했다. 이처럼 언어환경이 다르면 세계관도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언어라는 대롱을 통하여 세상을 본다. 이러한 대롱의 세상은 결국 해석의 세상이다. 대롱의 차이만큼 보는 세상도 다르다. 언어는 인간의 존재와 문화를 규정하는 요소다. 내 성장기의 언어들이 오늘의 나를 규정하는 요소임은 분명하다. 비록 빈약했지만 그 언어의 힘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성장했다. 내가 고성사람이란 정체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언어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

한편 나는 지금까지 내가 이 세계에 있어왔음, 즉 그 역사성을 토대로 ‘나’가 된다.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은 앞선 이해(역사성)가 있음으로 해서 가능해진다. 우리가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사회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앞선 이해의 조건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해의 지평이다. 모든 이해는 나의 이해의 지평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상대방에 대한 이해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법이다.

또한 어떤 장소에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내 선친을 비롯한 조상들은 간성군에서 그리고 고성군에서 살아왔다. 그분들의 역사가 내 삶의 일부이자 이해의 지평이 된다. 그처럼 간성군과 고성군의 역사는 이 고장 사람들의 삶에 투영되어 그림자처럼 나타난다. 내가 고성의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것도 그분들과의 인연의 힘이라고 본다. 고성사람은 고성의 역사와 문화에 빚지고 살 수밖에 없다.

미국인이 된다는 것은 자유와 다원성의 귀중한 실험에 참여함으로써 자존감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미국의 백인이 된다는 것은 한 민족(인디안들)의 파괴와 다른 민족(흑인들)의 노예화를 포괄하는 역사에 귀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데이비드 트레이시)

위의 내용은 독일인이나 일본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런데 독일인과 달리 일본인은 여전히 역사의식에 있어 보편적인 기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인이라면 그 제국주의 침탈의 역사를 성찰하고 그 책임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 마땅하다. 자기 역사에 귀속되어 있는 민족이라면 그 역사적 책임을 외면하지 못한다. 이처럼 한 역사에 귀속된다는 것은 그 역사의 통합과 단절을 인식하고 대면하는 일이다.

우리는 수성(䢘城 / 가라홀 : 간성의 고구려 지명)이란 지명을 통하여 이곳이 고구려의 강토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역사의 숨결은 면면히 이어져 이 고장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을 물들여 왔다. 이어 신라의 사선(四仙)들이 이곳을 유람하였으며, 고려 및 조선의 식자층들의 쟁쟁(錚錚)한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던 장소가 간성, 고성이었다. 이러한 통합의 역사와는 달리 해방과 더불어 이 땅은 38선으로 분단되어 이념적인 대립과 단절의 아픔을 겪었고, 이어진 참혹한 전쟁으로 이 강토는 수많은 희생자를 낳으면서도 다시 분단의 아픔을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를 품은 고장에서 ‘고성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자랑스런 역사적 전통은 물론 단절의 아픈 역사를 대면하고 그 책임에도 각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정신적 고향은 수성(䢘城 / 가라홀)이다. 그 역사적 귀향의 여정은 또다시 시작이다.

강원고성신문 기자  
“행복한 고성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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