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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과 나이

금강칼럼 / 박선애 칼럼위원(시인)

2022년 10월 19일(수) 10:11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얼마 전 김동길 교수가 향년 94세의 삶을 마감했다. 유명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그가 살아온 인생이나 어록이 재조명되곤 하는데, 평소 그의 정치적 성향에 관심은 없지만 구수하고 유머 있는 인생철학만큼은 재미있게 듣곤 했었다.

지인이 카톡으로 보내준 김동길 교수의 짧은 영상을 보며 깊은 공감을 했다. 다음은 영상에서 가져온 그의 말의 일부이다.

김동길 교수의 영상 보며 깊은 공감

“때가 아주 짙은 가을입니다. 여러분의 나이는 어디까지 왔습니까? 이제 가을이 천천히 가지 않습니다. 20대 30대까지는 굉장히 더디 갑니다. 음악의 용어로 하자면 아다지오 같은 세월입니다. 그러다가 40이 되면 달라집니다. 템포가요, 얼마나 빨리 가는지 아세요? 내가 느낀 대로 한마디 가르쳐드릴게요. 마흔! 그러면 그때부터 마흔, 마흔 하나, 마흔 둘 이렇게 안 갑니다. 잘 들어두세요. 마흔, 마흔하나둘셋넷…. 이렇게 해서 오십이 되는 게 인생입니다. 그렇게 빨라요. 템포가 아주 달라요. 그렇다면 50, 60사이는요? 50에서 하나 건너뛰면 돼요. 50, 55, 60 이렇게 갑니다. 60~70 사이도 살아봤는데 그건 65도 없어요. 60에서 70으로 직행하는 거야. ‘난 아직도 멀었어.’ 라고 반성 안하고 사는 젊은이들, 반성하세요. 그런 날이 오는 게 인생입니다. 그렇게 빨리 와요, 그게. 70이 되니까요, 70·80이 붙었어요. 그러다 80넘으니까요, 눈만 깜빡하면 일 년이 가요. 나도 예전엔 내 나이가 이렇게 많지 않았어요. 눈 몇 번 깜빡하니 아흔이 넘었어요.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다는 걸 깨닫고, 여러분의 인생도 이 가을에 깨닫고, ‘빠르게 세월이 흐르는데 무엇을 남기고 갈까?’ 남기고 갈 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을 깨달아야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특유의 맛깔스런 어투에 웃기도 했지만 영상이 끝날 때 알 수 없는 허무함이 밀려왔다. 마치 오장육부 중 서 너 개쯤 내어 놓은 듯한 허전함! 문득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서늘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랬다. 어느새 가을이 온 것이다.

몇 년 전 유난히 가을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동하면서, 좋아하는 계절도 나이를 따라간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다. 청소년기엔 눈을 녹이는 따스한 봄 햇살을 사랑했고, 가장 젊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시기에는 뜨거운 여름바다의 낭만을 사랑했었다. 자정까지 돌아다녀도 피곤하지 않았던 계절. 과감한 패션으로 해변을 활보하는 피서객들 속에 묻혀 매일이 불요일이고, 일시적이나마 번쩍였던 해수욕장 골목이 즐거웠던 때는 분명 재미있게 놀 궁리만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좀 오래된 것 같다- 여름이 슬슬 싫어지더니 지금은 더위도 못 견디겠고 무엇보다 시끄럽고 정신 사나운 도로도 아주 짜증이 나곤 한다. 자연스럽게 가을예찬을 하게 되면서 이 계절이 여름햇살보다 눈부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인생의 가을 녘에 와 있는 중년의 내 나이 역시, 지나온 날 중 가장 여유롭고 숯불처럼 빨간 열정으로 가득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다시 창밖을 내다보니 비바람에 떨어진 색 바랜 나뭇잎들이 데크에 붙어 가을날의 운치를 더한다. 젖은 낙엽이다. 일본의 주부들은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집안에 죽치고 들어앉은 남편을 ‘누렛타오치바(濡れた落ち葉)’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우리말로 ‘젖은 낙엽’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중년의 나이에 흔히 쓰는 표현이다. 밖으로 쓸어내고 싶어도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니 부담스런 존재라는 재미있는 표현이지만 당사자들은 상당히 서글프고 서러운 표현일 듯하다. 노령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현실을 감안하면 ‘젖은 낙엽’ 신세의 노인들은 앞으로도 대폭 늘어나게 될 것이다.

저 산 어느 나무인가 생각하게 된다.

세월과 싸울 수는 없기에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젖은 낙엽이 아닌 젖은 낙엽 정신으로 삶에 적극적이 되어 쓸데없는 무력감에 맞서야 한다. 사실 나이가 많아질수록 가슴 저 밑바닥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마음을 뿌리째 뒤흔들고 있음을 여실히 느낀다. 아직도 무언가 싹을 틔우려 스멀스멀하는데 색을 알 수가 없다. ‘이 나이에 될까?’ 하는 생각에 두렵고 조급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연두색이 아니면 어떤가. 꽃보다 붉은 단풍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평소에 마음만은 언제나 열여덟이라는 우스갯소리로 나이 먹음을 인정하지 않으려하는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가끔 동네 야트막한 가을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저 산 어느 나무인가 생각하게 된다. 앙상한 나무일까, 누렇게 마른 잎일까, 아니면 저 곱디고운 단풍나무일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명언대로 살아야한다. 가을저녁 홀로 앉아 궁상을 떠는 어리석은 짓은 이제 그만하고, 순리대로 비우고 연륜의 지혜를 발휘할 때이다. 건강관리에 힘쓰고, 보이는 것에만 연연해하지 않는 여유와 주변을 향한 배려로 세월을 다정하게 맞는다면 주름도 곱게 지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갖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꾸준한 독서와 핸드폰을 조금 멀리하는 습관 등으로 두뇌 트레이닝에 신경 쓰고 더불어 규칙적 운동, 긍정적인 마인드를 생활화 한다면 나이를 많이 먹어도 깊이 있는 멋스러움을 뿜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 소녀처럼 빠져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어갈수록 중후한 에너지가 우러나는 매력은 젊음의 그것과는 또 다른 은은한 멋이리라.

세월을 맞이하고 즐기는 방법에 따라 중년 이후의 삶은 달라진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 내공을 꿈꿔본다.

삶은 본인의 선택이다. ‘젖은 낙엽’이 되어 무력감에 살 것인가, ‘젖은 낙엽 정신’으로 삶에 애착을 갖고 살 것인가!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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