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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 시대 100년의 이야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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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 멸치, 정어리의 각축장
금강칼럼 / 이성식 칼럼위원(고성문화원 고성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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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05일(목) 09:24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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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고성신문 | 간성의 명태는 역사가 깊고 옛 문헌에 등장할 만큼 그 이름의 가치(名聲)가 높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수산전문가로 알려진 정문기는 원산매일신문(1936.10.13)에서 “600년 전 고려시대에 강원도 간성군에서 많이 잡힌 고기는 북어(北魚)라 이름한다.”는 글을 남겼다. 이것은 흔히 17세기로 알려진 명태의 기원에 관한 일반상식을 뛰어넘는 주장이다. 이러한 설화 같은 이야기만으로도 우리에게는 그 울림이 작지 않다. 또한 1700년대 초 최창대는 『곤륜집』에서 수성가(水城歌, 水城은 조선시대 간성군의 애칭)라는 시를 남기면서 “(간성)어부가 하루 명태어를 잡으면 언덕 산처럼 쌓이고, 300에서 500냥으로 날마다 영서의 장사꾼에게 팔려간다”라고 읊었다. 조선시대 명태에 관한 기록이 흔치 않은 점을 고려할 때, 위의 내용은 간성이 명태의 본고장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오늘 간성의 명태가 바다에 살지 않고 국어사전에서 ‘간태(杆太)’로 살아남아 있다는 것은 다행스럽고 지역의 영예로운 일이다. 이처럼 명태라는 존재는 언어와 기억의 힘으로 언제나 되살아나고 있다. 그래서 살아있는 명태를 볼 수 없다는 현실이 꼭 불행으로 연결되는 것만은 아니다.
한편, 100년 전 고성지역은 명태가 어촌의 겨울풍경을 여전히 압도하고 있었지만, 점차 그 어획고는 떨어지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명태는 동절기가 되면 어김없이 고향을 찾았고, 온 육신을 살신하여 부모형제와 이웃의 밥상과 술상을 빛냈던 명물이었다. 비록 1920-30년대에 와서는 정어리, 고등어에 잠시 밀리는 신세가 되기도 했지만. 해방 이후 명태는 고성지역에서 어업의 왕좌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일본어민이 고성연안에 침입한 이후 그들의 관심(침탈) 어종은 우선 명태가 아니라 멸치(鰮,鰯)였다. 당시 명태는 일본사람들이 먹지 않았고 고급어종의 이름에서도 빠져 있었다. 반면 멸치는 비료 등으로 활용되는 유용한 어종이어서 우선적인 어획침탈의 대상이었다. 1900년 이전부터 강원도, 특히 고성지역이 ‘마른 멸치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바로 ‘후릿그물’로 상징성을 드러내던 강원도의 멸치잡이는 일본으로의 수출품이 되어 어민들의 어로 열기를 사로잡았다. 이 황금어장을 쫓아 일본어민들이 우리 고장에 많이 정착하여 관내 어장을 지배했다. 후릿그물은 연안 가까이 밀려온 멸치떼를 에워싼 뒤 그물 양쪽을 육지에서 끌어당기는 방식이다. 그래서 해안 모래밭(沙濱)이 잘 발달된 장소가 으뜸 어장인 것이다. 예로부터 고성지역은 명사(鳴砂:우는 모래)의 고장이었다. 이렇듯 멸치어업의 발달은 아름다운 해변이 낳은 축복이었다. 고성지역에서 멸치어업은 1960년대까지도 다른 어법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릴 때 ‘이리꾸(이리코)’라고 하는 잔멸치를 잡아와 해변에서 말리던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오늘날 멸치어업은 경상도 남해안이 주산지로 남고 말았다.
한편 1920년대 이후 동해안에서 멸치어업은 쇠퇴하는 추세였다. 그때 갑자기 대어군(大魚群)의 출현으로 어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고기가 ‘정어리(鰮)’였다. 이전부터 정어리는 한반도에서 한철 어부들의 밥상에 오를 정도의 존재감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런데 1923년 10월 24-26일(3일간) 함경북도 성진 앞바다에 정어리떼가 몰려와 대량 폐사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바다 이변은 함경도만이 아니라 강원도 연안에서도 목격되면서 어민들은 한동안 들뜬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당시 이러한 사태를 두고 수산전문가들은 1923년 9월 1일에 발생한 일본 관동대지진에 의한 해류변화라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명태의 감퇴현상에도 적용되었다.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에서는 명태의 생산이 계속 감소되었다. 반면 일본 북해도 지방에서는 명태가 많이 잡혔다. 명태를 먹지 않는 일본어민들은 1920년대 후반부터 북해도 명태를 잡아 조선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관동대지진으로 조선의 명태가 북해도로 갔다는 소문과 주장이 세간에 퍼져갔던 것이다.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조선어업의 왕좌’는 명태가 아닌 정어리어업이었다. 동해안 각처에서 정어리의 풍어 소식이 들리면서 일본은 정어리의 수산가공화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였다. 정어리는 기름을 짜서 다양한 공업 및 군사용 원료로 사용하는 온유(鰮油)와 그 찌꺼기를 비료 및 사료로 활용하는 온박(鰮粕)으로 가공되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온유비제조공장이었다. 일본은 정어리어업을 산업화하기 위하여 그것의 생산 및 유통, 판매를 조선총독부가 통제하였다. 당시 강원도의 경우 온유비제조업수산조합은 주문진에 본부를 두고 10개 지부(고저항, 장전항, 봉수항, 거진항, 대포항, 주문진항, 묵호항, 정라항, 임원항, 죽변항)를 조직했다. 고성군에는 장전, 봉수, 거진의 3개 지부가 설치될 정도로 정어리의 최대산지였다. 강원도 온비제조공장의 가동은 1926년 주문진에 처음 개설되면서 시작되었다. 1930년대 초에는 고성군에 60개소의 소규모 온유비제조공장이 있었으나, 1930년대 말에는 3배 정도 증가하였다. 당시 강원도 연안에는 정어리공장으로 빼곡했다. 대략 900여 개소의 공장에서 수만의 어촌노동자들이 고된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지금도 각 어촌마을에는 ‘공장거리’(정어리공장의 터)라고 전해지는 지명이 존재한다.
명태와 멸치, 그리고 정어리의 각축전 속에서 우리 어민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전통적인 명태어업에 종사하던 우리 어민들은 일본어민이 침입하면서 어업의 위기와 함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조선의 바다가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발달된 어업이 멸치어업과 정어리어업이었다. 특히 정어리어업은 한때 식민지의 주력산업이 되었다. 이러한 격변의 식민지 어촌의 삶은 나날이 피폐해졌다. 일본어민들은 발전된 어업기술을 바탕으로 한 동력선(1920년대 등장, ‘데구리배’)과 신종어구를 사용하여 바다를 약탈하고 어장을 독점했다. 또한 어민과 배임자(선주), 어업조합, 그리고 금융기관으로 연결된 자본의 고리는 고리대금과 착취의 구조로 공고했다. 따라서 식민지 어촌은 구조적인 민족차별의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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