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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 시대 100년의 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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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은 시대정신의 제일선이었다
금강칼럼 / 이성식 칼럼위원(고성문화원 고성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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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1일(목) 09:53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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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고성신문 | 시대정신(Zeitgeist)이란 용어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독일에서 등장하였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사용하면서 점차 알려진 개념이다. 헤겔은 인류의 역사에서 어떤 시대이든 그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절대적인 정신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시대정신이라 규정하였으며, 그 시대정신은 한 시대가 끝나야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오늘날에는 조금 가벼운 의미로 축소되어 ‘지배적인 사상적 경향’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도 때로는 이념적인 색깔을 띠고 사용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해석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개념이다. 왜곡된 가짜 시대정신으로 우리의 역사를 더럽힌 사례도 있는가 하면 시대정신의 부재를 탄식하는 목소리도 들려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100년 전, 고성군 시대(1919~)가 시작될 무렵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을까. 당연 ‘독립(獨立)’이었다. 고성지역은 영동지역에서 가장 먼저 3·1독립만세운동(3월 17일)이 일어난 곳이다. 또한 조국 독립을 위한 ‘청년회’의 조직과 활동도 강원도 전지역을 선도할 정도로 활약이 컸던 지역이다. 이처럼 독립운동사를 돌아보면 고성지역은 당시 ‘시대정신’이 가장 역동적으로 펼쳐진 최전선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과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자. 우선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직후 제2의 독립선언을 계획하며 ‘조선민족대동단’을 조직하여 활동한 고성 출신 독립운동가 정남용(鄭南用, 1896~1921)이 있다. 그는 의친왕 이강(李堈)을 상해로 망명시키려다 발각되어 ‘5년 징역’이란 무거운 형벌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신음하다 순국한 애국지사로 현내면 철통리 출신의 건봉사 스님이었다. 그의 고결한 삶은 시대정신의 정수를 온몸으로 구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뿐인가. 1921년 4월 18일 정남용의 순국 소식이 전해지고 8개월 후 간성에서는 박태선(朴泰善, 1898~?)을 중심으로 수성청년회(䢘城靑年會)가 조직되었다. 이어 박태선은 후배 함연호(咸演嘷)와 함께 수성농민회(䢘城農民會)도 조직하면서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특히 박태선은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간성의 청소년들을 위하여 2년 과정의 수성학원(䢘城學院)을 개설하여 직접 교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수성청년회가 조직될 당시에는 아직 강원도의 청년운동은 미미한 수준으로 원주의 청년회 정도만 조직되어 있었다. 박태선을 중심으로 한 수성청년회는 강원도 청년들의 결집을 위해 ‘관동청년대회’를 주최하기도 하였다. 이 청년회의 탄생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사건이다. 이들이 사용한 ‘䢘城(수성)’이란 이름은 간성의 고구려 지명이다. 그런데 이들은 왜 고구려 지명을 갑자기 불러온 것일까. 당시를 돌아보면 2년 전(1919.5.15.) 조선총독부의 결정에 따라 간성군은 고성군으로 군명이 변경되고 군청마저 간성에서 (북)고성으로 이전됨으로써 고구려 시대부터 이어온 읍치(邑治) 전통의 맥이 끊긴 역사의 단절사태를 맞고 있었다. 이처럼 간성주민들의 상실감이 고조된 가운데 열산(烈山) 청년 정남용의 비보를 듣자 간성의 청년들은 나라를 잃은 민족으로서 침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수성학교(水城學校,1908)’ 출신인 박태선이 청년회를 조직하면서 조선시대 내내 사용해온 ‘水城’(조선시대 간성군의 별호)을 버리고 고구려의 간성을 상징하는 ‘䢘城’을 불러온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자존심을 고구려의 역사성에서 되찾고 싶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간성군이 폐하고 고성군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상실된 읍치(邑治) 전통의 회복을 상징적으로 표상하고 싶었을 것이다. 박태선은 수성청년회를 이끌어가면서 청년회관 및 건봉사 등에서 많은 대중강연을 열었는데, 특히 ‘수성청년(䢘城靑年)에게 소(訴)함’이란 제목의 강연도 열어 간성 청년들을 각성시키려고 애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강연 때마다 수백 명의 청중이 열렬히 환호했다고 당시의 언론은 전한다.
다시 수성 이야기를 이어보자. 수성청년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이 된 박태선은 간성 하리 출신이다. 그는 1908년에 설립된 간성의 대표적인 근대사립학교인 ‘수성학교(水城學校)’를 다녔다. 그가 수성학교 재학 중인 1912년 최초의 공립학교인 간성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면서 수성학교 학생들은 동일한 교사(校舍, 객사)에서 간성공립보통학교로 편입학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다면 간성초등학교의 역사는 최초의 사립학교인 ‘수성학교’에서 출발한 셈이다. 그런데 『백년사-간성초등학교』(2012)에서는 수성학교의 역사에 관한 기록은 아예 없다. 학교의 역사에서 기원에 관한 기록의 부재는 슬픈 일이다. 이제라도 바로 잡기를 희망할 뿐이다.
이처럼 당시 독립의 시대정신을 선도적으로 구현한 정남용, 박태선의 경우, 두 사람은 간성지역 최초의 근대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이다. 정남용은 우리 지역의 최초의 근대사립학교인 건봉사 봉명학교(鳳鳴學校, 1906) 출신이다. 정남용보다 2년 후배인 박태선은 간성의 대표 사립학교인 수성학교(水城學校, 1908) 출신이다. 이들은 모두 우리 지역에서 최초로 근대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비록 학교는 달랐지만 또 다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정남용은 건봉사 스님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박태선은 조부가 건봉사 스님이어서 어려서부터 조모를 따라 건봉사를 다녔고 성장해서도 건봉사에 다니면서 불교를 공부한 사람이다. 특히 그의 후기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초도 건봉사의 봉림학교(鳳林學校,1921)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건봉사는 독립의 시대정신을 배양시킨 지역의 큰 산실이기도 했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다.’, ‘역사 바깥은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이와 같은 역사 관련 수사는 하나로 귀결된다. 즉 역사는 해석이다! 우리는 과거의 사건을 오늘 새롭게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현실을 살아간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정치, 경제적으로 녹록지 않아 보인다. 아니 심각하다는 진단도 많다.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더욱더 위기의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다. 사회적인 갈등의 표출도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국면을 어떻게 진단하고 풀어갈 것인가. 정치적인 선택은 어떠해야 하는가. 국민 모두 고민이 깊다. 이처럼 위기의 국면일수록 과거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지혜도 필요하다. 100년 전 고성지역은 시대정신의 제일선이었다. 이러한 역사와 전통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잇고 있는가. 스스로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공통 기억의 회복과 공유가 그 시작이지 않을까.
‘수성학교(水城學校,1908)’ 출신인 박태선이 청년회를 조직하면서 조선시대 내내 사용해온 ‘水城’(조선시대 간성군의 별호)을 버리고 고구려의 간성을 상징하는 ‘䢘城’을 불러온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자존심을 고구려의 역사성에서 되찾고 싶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간성군이 폐하고 고성군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상실된 읍치(邑治) 전통의 회복을 상징적으로 표상하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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