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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장 거리·관사 거리·공장 거리… 거리로만 남은 기차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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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담 작가의 ‘옛 동해북부선 철길을 걷다 <3> 공현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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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5월 13일(화) 06:18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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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공현진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국민학교를 다닌 이들에겐 여전히 ‘정거장 거리’, ‘관사 거리’ 또는 ‘공장 거리’라는 지명이 익숙했다. 그렇더라도 거리로만 남은 기차역을 찾아가는 일은 퍽 쓸쓸하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현진역 터 또한 마찬가지였다. | ⓒ 강원고성신문 | | ‘공수전(公須田)’의 흔적이 마을 이름에 남아 있듯 공현진역의 자취도 ‘정거장 터’ 또는 ‘정거장 거리’라는 지명으로 남았다. 공현진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국민학교를 다닌 이들에겐 여전히 ‘정거장 거리’, ‘관사 거리’ 또는 ‘공장 거리’라는 지명이 익숙했다. 그렇더라도 거리로만 남은 기차역을 찾아가는 일은 퍽 쓸쓸하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현진역 터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십 년 전 공현진역 터가 어디인 줄도 모르던 때, 그때도 철도 취재를 위해 공현진 마을을 지나다가 만난 어르신은 기차를 타고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노라고 사뭇 들뜨고 아련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는데, 아니 왕곡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또 다른 어르신은 문천 군수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소 판 돈을 훔쳐 기차를 탔노라고 그러다가 전쟁이 났고 인민군으로 다시 국방군으로 복무하게 되었다고, 그렇지만 이제 그 어르신들은 다시 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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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문암역을 떠난 기차는 다리받침조차 남아 있지 않은 삼포철교를 지났을 테지만, 오호국민학교를 다녔던 이들은 모내기철이면 철둑에 앉아서 먹던 새참을 떠올렸고. | ⓒ 강원고성신문 | | 문암역을 떠난 기차는 다리받침조차 남아 있지 않은 삼포철교를 지났을 테지만, 오호국민학교를 다녔던 이들은 모내기철이면 철둑에 앉아서 먹던 새참을 떠올렸고, 다시 또 기차는 크고 작은 ‘철다리’를 지나지만 오호천을 가로질렸을 오호철교 자리는 아무런 흔적조차 없는 천변이었고, 도로로 남은 철길은 일제강점기에는 없던 죽왕초등학교를 옆에 끼고서 바다와 만나는 송지호철교를 지나다가 잠시 멈칫, 산 그림자를 품은 송지호는 어느 해는 재첩축제를 열기도 했으나 이제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이며 염생식물인 갯봄맞이꽃 자생지로 더 알려졌고, 꽃은 사월이 다가고 오월 말쯤이나 되어야 볼 수 있으니 봄을 맞이하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으니 북방계 식물임에 틀림없다. 한편 1977년 신문들은 송지호에서 혹고니, 큰고니, 고니 떼 수백 마리가 ‘월동’한다는 기사를 야단스럽게 전했지만 지금은 모형뿐이다.
여전히 멀쩡한 굴다리는 송암리에 이어 두 번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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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공현진역 터에 다다르기 전 송지호를 지나온 기찻길은 오봉리 입구에서 대전차방어벽을 만드느라고 변형되었고, 오봉철교가 눈앞인데 아주 작은 굴다리는 아직도 성하여 그 위에 닭장 같은 옴팡이 들앉아서 굴다리의 흔적을 지웠으나 여전히 멀쩡한 굴다리는 송암리에 이어 두 번째였다. | ⓒ 강원고성신문 | | 공현진역 터에 다다르기 전 송지호를 지나온 기찻길은 오봉리 입구에서 대전차방어벽을 만드느라고 변형되었고, 오봉철교가 눈앞인데 아주 작은 굴다리는 아직도 성하여 그 위에 닭장 같은 옴팡이 들앉아서 굴다리의 흔적을 지웠으나 여전히 멀쩡한 굴다리는 송암리에 이어 두 번째였다. 어느 순간 평화누리자전거길로 바뀐 기찻길에는 낯선 자전거 여행자가 오토바이를 탄 마을 주민이 뜀박질하는 군인들이 때로는 학교 버스가 지나갔다. 주변이 낮고, 크고 작은 건물 없이 그리고 자전거길이 한가운데로 지나면서 주변은 또 밭으로 경작되고 있어서인지 공현진역 터는 더 넓고 길어 보인다. 농사 준비가 한창인 역 터에서 북쪽을 바라다보면 한옥마을을 지나 ‘박첨지산’이라고 불리는 산 기스락에 초등학교가 들앉았고, 그 학교를 옆에 두고서 기찻길은 바닷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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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석호였던 선유담은 ‘말근담이’라는 옛말이 무색하리만치 갈대가 숲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버드나무들도 자리를 잡았다. | ⓒ 강원고성신문 | | 기찻길을 비켜서 잠시 선유담(仙遊潭)으로 향했다. 봄철이면 고집스럽게 찾았다. 신라의 화랑들이 놀았다고 해서만이 아니라 우암 송시열의 암각문으로도 단원 김홍도의 가학정 그림으로도 고려에 이은 조선의 시인들의 시로도 남은 옛 시인 묵객들의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어서만이 아니라 흔히 볼 수 없는 꽃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가장 흔한 이유는 무덤으로 바뀐 가학정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산 뿌다구니에서 만날 수 있는 유록화홍의 경치와 어떤 고요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곡선 속에 직선이 내재되어 있듯 그 고요 속에는 식물들과 숨탄것들의 숨소리 또한 스며들고 섞여 있었으므로 이른 봄이면 긴 꽃대에 자줏빛 술 같은 꽃을 피우는 처녀치마며 조선현호색과 산돌배나무꽃, 각시붓꽃과 콩제비꽃, 여름이면 노란색 기린초며 옛 문헌에 ‘봄에는 척촉화(철쭉)가 바위를 끼고 많이’ 핀다는 글 그대로 연분홍빛 철쭉, 함박꽃이 눈길을 사로잡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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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른 봄이면 긴 꽃대에 자줏빛 술 같은 꽃을 피우는 처녀치마며 조선현호색과 산돌배나무꽃, 각시붓꽃과 콩제비꽃, 여름이면 노란색 기린초며 옛 문헌에 ‘봄에는 척촉화(철쭉)가 바위를 끼고 많이’ 핀다는 글 그대로 연분홍빛 철쭉, 함박꽃이 눈길을 사로잡았으므로.(사진 산돌배나무꽃) | ⓒ 강원고성신문 | | 해마다 사월이면 새하얀 별과 같은 꽃숭어리로 피어나는 조름나물을 만나기 위해 숱하게 조바심을 내며 오갔다. 하지만 석호였던 선유담은 ‘말근담이’라는 옛말이 무색하리만치 갈대가 숲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버드나무들도 자리를 잡았다. 그 가운데 조름나물 군락지는 논둑을 경계로 논과 이웃했으므로 논농사를 짓는 농부는 논둑을 망가뜨리는 탐방객들이 못마땅하여 거친 소리를 내기 일쑤다. 그렇더라도 그곳에만 조름나물이 있는 것은 또 아니었으므로 기어이 꽃을 만나고는 했다. 오월이면 갈대들 틈바구니에서 보랏빛 제비붓꽃이, 선유담에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각시수련이 어느 틈에선가 맑고 순정한 꽃을 피우고 있었을 테니. 이 식물들 또한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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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른 봄이면 긴 꽃대에 자줏빛 술 같은 꽃을 피우는 처녀치마며 조선현호색과 산돌배나무꽃, 각시붓꽃과 콩제비꽃, 여름이면 노란색 기린초며 옛 문헌에 ‘봄에는 척촉화(철쭉)가 바위를 끼고 많이’ 핀다는 글 그대로 연분홍빛 철쭉, 함박꽃이 눈길을 사로잡았으므로.(사진 각시붓꽃) | ⓒ 강원고성신문 | | 무정한 꽃들의 속내는 알 수 없으니 때로는 물찬 제비떼를, 또 때로는 숨바꼭질하듯 자리를 바꾸며 목 길게 빼고 갈대숲 사이에 놓은 통발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왜가리를 구경하노라면 7번국도를 오가는 자동차들 소음마저 아마득하여 잠시 봄꿈을 꾸어도 좋을, 그러면서 ‘순채가 못에 가득’했다던 옛 글을 떠올린다. 순챗국과 농어회는 언제나 짝을 이루고, 그런 만큼 쌔고 쌨을 터인데 순채는 이제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으로 지정되었으니 통발 속에서 퍼드덕거리는 물고기들을 지켜볼 뿐. 그러다 물러서서 왕곡마을 뒷산(뒷배재), 엎어놓은 선사시대 토기 같은 그 산마루에 막대처럼 꽂아 놓은 중계탑을 따라가다 뒷배재를 감싸는 듯한 오음산 능선이 사라지는 순간 자리를 떴다.
국민학교를 다녔던 이들에게 기차 굴은 통학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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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산이 택지로 조성되기 전부터 구경하던 기차 굴, ‘턴넬’은 대중매체에서 가끔 ‘공현진터널’로 쓰고 있지만, 가진리 주민들의 증언도 그렇고 1967년 초판 발행된 한글학회가 지은 『한국지명총람2(강원편)』도 그렇고, ‘가진굴’ 또는 ‘덕포굴’이다. | ⓒ 강원고성신문 | | 가진해변길로 이름한 기찻길로 접어들었다. 해변 모래불에서는 아낙들이 나물을 채취하고, 그물을 깁는 손길 또한 분주하다. 산이 택지로 조성되기 전부터 구경하던 기차 굴, ‘턴넬’은 대중매체에서 가끔 ‘공현진터널’로 쓰고 있지만, 가진리 주민들의 증언도 그렇고 1967년 초판 발행된 한글학회가 지은 『한국지명총람2(강원편)』도 그렇고, ‘가진굴’ 또는 ‘덕포굴’이다. 언어는 생성소멸을 반복하지만, 옛 동해북부선은 한국전쟁 와중에 이미 기능을 잃었으니 그때까지 불리던 이름으로 불러야 마땅하다. 1935년 동해북부선 공사 입찰 소식을 알리는 신문에는 14공구인 공현진역과 문암역 사이는 ‘240 메돌(米突)짜리 턴넬’로 인해 장구한 시일이 걸릴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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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기차 굴 입구는 철망으로 막혔다. 공현진 쪽에서도, 가진 쪽에서도 서로 내통하듯 굴 끝만 환했을 뿐, 봉쇄된 굴속은 음습하고 어두컴컴했다. | ⓒ 강원고성신문 | | 기차 굴 입구는 철망으로 막혔다. 공현진 쪽에서도, 가진 쪽에서도 서로 내통하듯 굴 끝만 환했을 뿐, 봉쇄된 굴속은 음습하고 어두컴컴했다. 1937년 7월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중일전쟁의 여파로 철도 부설은 ‘건설재료 수송이 지연’되는 사태를 겪으면서 그해 12월 1일 간성-양양 사이 철도 노선이 개통되었고, 공현진역은 간이역이었다. 1937~38년 중국 난징에서는 일본군에 의한 대학살이 벌어졌고, 러시아 연해주에 살던 18만 명의 고려인들은 밀봉된 화물열차에 실려서 중앙아시아로 추방되었다. 기차 굴 입구에는 명패가 붙었던 자리가 고스란했고, 전쟁의 흔적은 탄환자국으로 남았으며 궤도는 흔적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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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기차 굴 입구에는 명패가 붙었던 자리가 고스란했고, 전쟁의 흔적은 탄환자국으로 남았으며 궤도는 흔적조차 없었다. | ⓒ 강원고성신문 | | 가진리에서 공현진국민학교를 다녔던 이들에게 기차 굴은 통학로였다. 누구는 숨바꼭질하듯 육각형 모양의 대피소에 몸을 숨겼을 수도, 또 누구는 당근밭에서 서리한 당근을 우물거리며 삼삼오오 떼를 지어 제 목소리보다 크게 울리는 메아리에 쫓겨 달음박질했을 수도. 그러나 전쟁의 와중에도 그리할 수 있었을까. 입구 벽에 박힌 총알은 누구의 몸을 비켜나 어느 사람의 목숨을 살렸던 것일까. 또 몸을 관통한 총알은 어떤 목숨을 앗았을까. 강간, 방화, 살육의 아비규환이었을 굴속은 이제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뿐, 단단했던 콘크리트 벽을 뚫고 슴새는 물기는 벽에 홈을 내고 철을 녹슬게 하며 시멘트는 또 무르게 하면서 굴속을 해체하고 있었다.
가진리 쪽 굴 입구 가까이에는 짠내를 풍기는 그물들이 넓게 펼쳐졌고, 굴에서 벗어난 시선 끝에 금강산 향로봉 봉우리가 잡히자 그제야 안도한다. 깎아지른 절벽에는 함박꽃이라고 부르는 철쭉이 환하고, 울음인지 노래인지 알 수 없는 새들의 소리 가운데 검은등뻐꾸기 소리가 도드라진다. 시멘트 포장도로는 어느 순간 기찻길을 비켜서 바다로 향하고, 뚝 끊어진 ‘가진 철다리’는 자취를 감췄으니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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